서고의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들려온 발소리는 아주 미세했지만, 사방이 고요한 어둠에 잠긴 밤이었기에 아멜리아의 귀에는 천둥소리처럼 선명하게 박혔답니다.
바스락.
서고 문이 틈새를 그리며 소리 없이 아주 조금 열렸어요. 그 틈새로 촛불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붉은 밀서 잔해를 매섭게 응시하는 서늘한 눈동자가 드러났지요. 낮 동안 아멜리아에게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따뜻한 수프를 먹여주던 공작가의 하녀장이었어요.
하녀장의 손끝이 품속으로 스르륵 들어가더니, 붉은 밀서 조각 뒤로 차가운 은빛 칼날을 조심스럽게 빼어 들었어요. 길게 늘어진 칼날의 그림자가 아멜리아가 숨은 책장 앞까지 무겁게 드리워지기 시작했답니다.
‘나를 찾아내서 입을 막으려는구나.’
아멜리아는 차가운 서고 바닥에 닿은 발끝에서부터 오싹한 한기가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어요. 하녀장의 살기등등한 눈빛은 이미 눈앞의 어린아이를 목격했을 때의 망설임 따위는 지워버린 상태였지요. 이대로 가만히 숨어 있다가 들통난다면, 가녀린 목덜미에 차가운 쇠붙이가 먼저 닿을 것이 분명했답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전생에서 수많은 사나운 동물들을 상대했던 베테랑 수의사였어요. 위기의 순간일수록 머릿속은 차갑고 정교하게 굴러가기 마련이었지요.
지금 하녀장을 향해 소리를 지르거나 직접 맞서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어요. 아멜리아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행성이라도 부수어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미치광이 과보호 가족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래, 이 과보호 광기를 활용하는 거야.’
아멜리아는 하녀장의 구두 굽 소리가 두 걸음 더 가까워진 순간을 정확히 포착했어요.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일부러 책장 옆 장식대 위에 놓여 있던 유리 보석함을 팔꿈치로 툭 밀어 버렸답니다.
쨍그랑! 와장창!
정적을 깨부수며 오색 빛깔의 유리 파편과 반짝이는 진주들이 대리석 바닥 위로 요란하게 흩뿌려졌어요.
“앗……! 흐윽!”
아멜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겁에 질린 아기 사슴처럼 쪼그려 앉으며 길고 가느다란 비명을 질렀답니다. 부드럽고 폭신하며 은은한 우유 향이 솔솔 풍기는 하얀 레이스 잠옷 자락을 꼭 쥐고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는 완벽한 방어 자세를 취했지요.
하녀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어요.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처리하려던 계획이 이 요란한 소음 한 번으로 완전히 어그러진 탓이었지요. 하녀장이 당황하여 서둘러 칼날을 품속으로 밀어 넣으려던 바로 그 찰나였답니다.
쿵! 콰아아앙!
서고의 거대하고 육중한 참나무 문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튀어나갔어요. 문짝이 날아간 먼지 구덩이 사이로, 붉은 마기를 온몸에 휘감은 거대한 그림자가 무서운 속도로 들이닥쳤답니다.
“아멜리아아아아!”
저택 저편에서부터 바람을 찢고 달려온 큰오빠 렌이었어요. 그의 눈동자는 평소의 이성적인 푸른빛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굶주린 마수처럼 붉게 이글거리고 있었지요.
렌은 바닥에 주저앉아 떨고 있는 아멜리아를 발견하자마자 이성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답니다. 그의 시선이 아멜리아의 발치에 떨어진 유리 파편과, 그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하녀장의 손끝으로 향했어요. 하녀장의 소맷자락 사이로 언뜻 비친 은빛 칼날의 잔상이 렌의 무서운 직관에 포착된 것이었지요.
“감히.”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낮고 무거워 바닥을 진동시켰어요.
쿠웅!
렌은 단 한 걸음 만에 공간을 도약하듯 하녀장의 눈앞으로 쇄도했답니다. 하녀장이 비명을 지를 시간조차 없었어요. 렌의 단단하고 커다란 손귀가 하녀장의 목덜미를 거칠게 움켜잡았지요.
콰아아앙!
“커흑……!”
하녀장의 신형이 그대로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사정없이 박혀 버렸답니다. 바닥을 장식하고 있던 고급 대리석이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지며 사방으로 비산했어요. 하녀장은 숨이 턱 막힌 채 버둥거렸고, 그녀의 손에서 붉은 밀서 잔해와 리일리향이 묻은 얇은 단검이 바닥으로 뎅그렁 소리를 내며 굴러갔지요.
“내 동생의 터럭 하나라도 겁박하려 든 대가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지.”
렌의 구두 굽바닥이 하녀장의 손목을 가차 없이 짓밟았어요. 오도독하는 뼈가 어긋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서고 안에 차갑게 울려 퍼졌답니다.
“으아아악! 도, 도련님! 오해이옵니다! 저는 그저……!”
하녀장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엎드린 채 어떻게든 변명을 늘어놓으려 버둥거렸어요.
“서고에 침입자가 든 줄 알고 수색하러 왔을 뿐입니다! 아가씨를 해하려던 것이 절대 아닙니다! 정말이옵니다!”
그녀는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아멜리아를 바라보며 억울함을 호소하려 했지요. 하지만 그 교활한 위선은 오래가지 못했답니다.
스스스스.
숨이 막힐 듯한 살인적인 압박감이 서고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했어요.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거대한 존재감. 피도 눈물도 없는 에스카르디아 공작가의 가주, 아빠 카이든이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지요.
카이든의 눈빛은 이미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어요. 자신의 가장 소중하고 앙증맞은 막내딸이 한밤중에 칼을 쥔 하녀와 마주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괴수의 본능이 깨어난 것이었지요.
“침입자라며 칼을 쥔 손이, 왜 내 딸을 향해 뻗어 있었지?”
카이든이 낮게 읊조리며 다가오자, 하녀장은 목숨을 구걸할 문장조차 잊어버린 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주저앉았답니다. 가주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안개 같은 마력은, 이미 그녀의 영혼마저 짓개어버릴 듯 압도적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아멜리아, 이리 오렴.”
카이든은 하녀장을 벌레 보듯 무시한 채, 바닥에 웅크려 있는 아멜리아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어요.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유리인형을 다루는 듯 극도로 부드럽고 섬세한 손길이었지요.
아멜리아는 카이든의 넓은 품에 안겨, 겉으로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어요.
“아빠아…… 흑, 무서웠어요…….”
아멜리아의 가녀린 목소리가 서고 안을 울리자, 카이든과 렌의 눈빛이 동시에 한층 더 잔혹하게 번뜩였답니다.
[딩동!]
바로 그 순간, 아멜리아의 맑은 눈동자 위로 주황빛 홀로그램 화면이 반짝이며 떠올랐어요.
[축하합니다! 가족들의 극단적인 불안과 걱정이 극에 달했습니다!] [마력 소스 대량 충전 완료: +5,000MP] [위기 지표가 0.1% 하락하였습니다!] [주변 안전 점수가 150점 보너스로 영구 격상되었습니다!] [보상: 요람 영수 전용 소독약 레시피 잠금 해제!]
‘와우. 마력 충전 대박이네!’
아멜리아는 속으로 기쁨의 쾌재를 불렀답니다. 하녀장의 위선적인 첩자질을 가문의 미친 과보호 광풍을 이용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완벽하게 무력화시킨 셈이었지요.
“이 더러운 뼛조각을 당장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라. 신성청의 냄새가 나는 쥐새끼의 배후를 전부 찢어발겨서 알아낼 때까지 고통의 한계가 어디인지 가르쳐 주도록.”
렌의 차가운 명령에 어둠 속에서 대기하던 그림자 기사들이 일제히 나타나 하녀장을 짐짝처럼 끌고 사라졌어요. 하녀장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절망 속으로 처박혔답니다.
하지만 아멜리아의 마음은 마냥 편치 못했어요. 품속에 슬쩍 숨겨둔 붉은 밀서 조각과 리일리향의 냄새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지요. 게다가 레시피에 적혀 있던 강력한 정화 약재인 ‘반쪽짜리 달빛풀’의 가사 유도 성분 역시 머릿속을 맴돌았답니다.
‘일단 요람의 뽀뽀는 안전하겠지?’
아멜리아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하려던 바로 그 찰나였어요.
[띠링! 띠링! 띠링!]
귓가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시스템 경고음이 아멜리아의 시야를 붉은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답니다.
[경고! 비밀 요람 내 영수 ‘뽀뽀(펜릴)’의 상태 이상 발생!] [원인 미상의 3중 돌발 열병 감지!] [마력 폭주 수치 급상승 중 (현재 92%)] [은빛 털을 매개로 한 마나 방출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대로 방치할 경우, 30분 이내에 요람의 은폐 방벽이 붕괴하고 펜릴이 폭주하여 공작령 전체에 위치가 노출됩니다!]
‘뭐라고?!’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어요. 가장 큰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한 순간, 비밀 요람과 뽀뽀에게 최대의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답니다.
“아멜리아!”
카이든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지만, 아멜리아의 머릿속은 이미 붉게 타오르는 경고창으로 가득 차 있었답니다.
30분.
그 짧은 시간 안에 뽀뽀의 폭주를 막지 못하면, 그녀가 온 힘을 다해 가꾸어 온 검은안개 숲의 비밀 요람이 공작가의 무시무시한 토벌대에게 짓밟히고 말 터였지요. 게다가 신성청의 눈을 피해 상처받은 영수들을 돌보며 자신만의 완벽한 독립 요람을 세우겠다는 원대한 계획마저 물거품이 될 위기였답니다.
‘지금 당장 숲으로 가야 해. 하지만 어떻게 이 집착 광공 가족들의 감시망을 뚫고 나가지?’
아멜리아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어요. 아빠와 오빠의 눈길은 여전히 분노와 걱정으로 일렁이고 있었지요. 그들의 숨 막히는 과보호망을 역이용할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답니다.
“아빠…… 오빠…….”
아멜리아는 카이든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가냘프게 웅얼거렸어요. 그녀의 작은 어깨가 가늘게 떨렸지요.
“아멜리아가 갑자기 머리가 너무 핑 돌고…… 가슴이 아기 토끼처럼 콩닥거려요.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더니 너무 졸려요…….”
그 한마디에 카이든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답니다. 렌 역시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듯 숨을 들이켰지요.
“의사를! 당장 제국 최고의 의사들을 전부 불러와라! 가문의 전송 마법진을 열어서라도 지금 당장 데려와!”
카이든이 포효하듯 외치자, 아멜리아는 서둘러 그의 옷자락을 꼭 쥐며 고개를 저었어요.
“아니에요……. 그냥 새하얗고 보들보들한 제 침대에 누워서, 은은한 라벤더 향기를 맡으며 조용히 자고 싶어요. 아무도 없는 방에서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요정의 간절한 부탁에, 두 남자는 차마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답니다. 그들은 아멜리아를 마치 세상에 단 하나뿐인 고귀한 보석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그녀의 침실로 향했어요.
아멜리아의 방은 사랑스러운 파스텔 핑크빛 벽지와 은은한 바닐라 향이 솔솔 풍기는 아주 아늑한 공간이었답니다. 깃털처럼 가볍고 따스한 이불 속에 아멜리아를 눕힌 카이든은, 그녀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어요.
“그래, 우리 착한 아가. 푹 자고 일어나렴. 이 아빠가 방 앞을 지키고 서 있을 테니 아무 걱정 말거라.”
“발소리 하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도록 저택 전체를 침묵에 잠기게 하마.”
렌 역시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요.
철컥, 하고 굳게 닫힌 문 너머로 두 남자가 기사들에게 ‘방 반경 100미터 이내로 접근하는 자는 반역죄로 다스리겠다’며 으름장을 놓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어요.
방 안에 홀로 남겨진 아멜리아는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났답니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지요.
[딩동!] [가족들의 극단적인 걱정과 안절부절못하는 불안감이 마력으로 치환됩니다!] [마력 소스 대량 추가 충전: +7,000MP (현재 보유 마력: 12,500MP)]
“좋아, 마력은 차고 넘쳐!”
아멜리아는 곧바로 머리맡의 서랍을 열어 비밀 통로의 열쇠를 꺼냈어요. 그리고 전생의 기억과 시스템 장부의 기능을 100% 활용해, 공작저의 감시망을 완벽히 우회하는 은신 마법을 전개했답니다.
슈우우욱.
아멜리아의 작은 신형이 은은한 빛무리 속으로 사라지더니, 이내 본관 지하의 비밀 회랑을 지나 순식간에 검은안개 숲으로 연결되는 경계선에 도달했어요.
바람을 가르며 가시덤불 장벽을 헤치고 달리는 아멜리아의 숨소리가 가빠졌답니다. 은은한 달빛이 쏟아지는 검은안개 숲 요람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눈앞에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어요.
쿠구구구구!
“르르르릉……! 크하아아악!”
평소라면 아기자기한 요람 침대에서 단잠을 자고 있어야 할 뽀뽀가, 지금은 온몸의 은빛 털을 날카로운 가시처럼 세운 채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답니다. 뽀뽀의 눈동자는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발치에서는 터져 나오는 마나의 파편들이 보랏빛 불꽃이 되어 타오르고 있었지요.
[경고! 영수 ‘뽀뽀’의 마력 폭주 수치 96% 돌파!] [내부 장기가 초고열로 인해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아멜리아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어요. 이대로 두면 뽀뽀는 자신의 거대한 마력을 이기지 못하고 자폭하고 말 터였지요.
그녀는 다급히 품속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답니다. 그 안에는 일찍이 공작저 서고 깊은 곳에서 찾아내 보관해 두었던 귀한 약재가 들어 있었어요.
‘반쪽짜리 달빛풀……!’
이 풀은 다친 마수의 심장 고동을 안정시키고 마력을 정화하는 탁월한 효능이 있지만,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었지요. 다량 섭취하거나 잘못 처방하면 영구적인 가사 상태, 즉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잠에 빠지게 만드는 양날의 검이었답니다. 게다가 지금 아멜리아가 가진 것은 완벽한 한 뿌리가 아닌, 약효가 불안정한 ‘반쪽짜리’에 불과했어요.
“뽀뽀야, 제발 정신 차려 봐……!”
아멜리아가 달콤하고 알싸한 풀 향기가 감도는 달빛풀을 든 채 뽀뽀에게 다가갔답니다.
그때였어요.
“캬아아아악!”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펜릴, 뽀뽀의 붉은 눈동자가 아멜리아의 작은 체구를 포착했지요. 수천 년을 살아온 고대 영수의 무시무시한 살기가 아멜리아를 향해 정면으로 쏟아졌어요.
콰아아앙!
뽀뽀가 앞발을 내딛자, 요람의 튼튼했던 나무 침대가 단숨에 가루가 되어 날아갔답니다. 거대한 은빛 야수가 흉포하게 아가리를 벌린 채, 자신을 치료해 주려던 은인인 아멜리아의 가녀린 목덜미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쇄도하기 시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