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콰아아앙!

사정없이 부서진 유리 파편들이 밤하늘의 별가루처럼 사방으로 흩날렸어요.

아멜리아는 깜짝 놀라 품에 안고 있던 반쪽짜리 달빛풀을 반사적으로 등 뒤로 숨겼답니다. 매서운 밤바람을 타고 풍기는 서슬 퍼런 살기와 차가운 철 냄새가 온실의 따스한 공기를 순식간에 얼려 버렸어요.

“아멜리아 아가씨!”

온실을 가득 채운 철갑 기사들의 외침 뒤로, 대지를 뒤흔드는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답니다. 기사들의 칼날보다 더 날카롭고 매서운 기세를 품은 사내. 제국을 수호하는 괴수 가문의 수장이자, 아멜리아의 아빠인 카이든 에스카르디아 공작이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걸어 나왔어요.

전쟁터에서 수만 명의 적을 단숨에 베어 넘겼다던 그의 얼굴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유리인형을 마주한 것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지요.

‘앗, 들키면 큰일 나는데!’

아멜리아는 다급하게 머리를 굴렸어요. 등 뒤에 숨긴 은은하고 푸르스름한 달빛풀에는 마수의 독기가 조금 묻어 있었거든요. 만약 이 독기가 아빠의 눈에 띄기라도 하는 날에는, 검은안개 숲속에 만들어 둔 자신만의 비밀 요람이 통째로 날아갈지도 몰랐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어요. 공작가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해 다친 마수들을 치료하려던 계획이 첫 단계부터 완전히 수포로 돌아갈 위기였지요.

아멜리아는 재빨리 달빛풀 5송이를 포근하고 보드라운 분홍빛 실크 드레스 안쪽의 깊숙한 비밀 주머니로 쏙 밀어 넣었어요. 달콤한 바닐라 향이 감도는 드레스 자락 아래로 약초를 숨긴 그녀는, 다음 행동을 개시했답니다.

살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연약한 막내딸을 연기해야만 했어요.

아멜리아는 두 손으로 눈가를 살짝 비벼 촉촉하고 아련한 눈물이 맺히게 만들었지요. 그리고 하얗고 가냘픈 목덜미를 가냘프게 쥐며,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아주 약하게 기침을 뱉어냈답니다.

“콜록, 쿨럭…… 아, 아빠……?”

작고 가녀린 나비의 날갯짓 같은 기침 소리였어요.

하지만 그 소리가 들린 순간, 온실 안의 모든 공기가 뚝 멈춰 서 버렸답니다. 수십 명의 철갑 기사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켰고, 기세를 뿜어내던 카이든 공작의 걸음이 그대로 얼어붙었어요.

“……아멜리아?”

카이든의 시선이 아멜리아의 작은 손끝으로 향했답니다.

그녀가 흙을 파헤치느라 손가락 끝에 묻힌 축축하고 까만 흙먼지. 어두운 온실 속 횃불 빛에 그을린 그 검붉은 흙이, 카이든의 눈에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고 만 것이지요.

“저, 저건…… 피?”

카이든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듯 사정없이 흔들렸어요.

전장에서 적의 심장을 꿰뚫을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전신이, 겨우 흙이 묻은 딸의 손을 보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경악했답니다. 그의 눈에는 이미 아멜리아가 몹쓸 불치병에 걸려 피를 토하며 쓰러지기 직전인 것으로 보였던 것이에요.

“내, 내 천사 같은 아이가…… 피를 토하다니! 이 무슨 하늘이 무너질 소리란 말이냐!”

“아, 아니에요, 아빠! 이건 그냥 흙이……”

아멜리아가 다급하게 해명하려 입을 열었지만, 카이든의 극단적인 오해는 이미 겉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른 뒤였답니다.

“감히 어느 놈이 온실의 문을 열어두어 내 딸에게 찬 바람을 쐬게 만들었느냐! 기침 한 번에 폐가 상하기라도 하면 네놈들의 삼족을 멸할 것이다!”

공작의 폭풍 같은 호통이 온실 천장을 흔드는 순간, 아멜리아의 귓가에 경쾌하고 몽글몽글한 알림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어요.

띠링! 띠리링-!

[돌발 상황! 가주 ‘카이든 에스카르디아’가 파멸적인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오해 수준: 우주 돌파급 (내 딸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착각)] [카이든의 극심한 발작성 걱정 마력 24,000점 강제 영입!] [시스템 에너지 충전율: 120% 돌파! 영수 육성 장부의 상급 치유 레시피가 일시 해금됩니다!]

우와아아아!

아멜리아는 눈앞을 가득 메우는 황금빛 팝업창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답니다.

무려 24,000점이라니!

가족들이 그녀를 걱정하고 집착할 때마다 쌓이는 이 기묘한 마력은, 아멜리아가 다친 마수들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최고의 자원이었지요. 기침 한 번에 이 정도의 대박이 터질 줄은 꿈에도 몰랐던 아멜리아는 터져 나오려는 광대를 꾹 누르느라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해야 했어요.

‘심봤다! 이걸로 뽀뽀의 특효약은 물론이고, 비밀 병원에 놓아둘 푹신한 수면용 담요랑 소독용 알코올까지 잔뜩 구비할 수 있겠어!’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가냘픈 요정처럼 아빠를 올려다보았답니다.

“아빠, 전 정말 괜찮아요…… 조금 으슬으슬할 뿐인걸요.”

그 말은 불이 붙은 화약고에 거대한 포탄을 던진 격이었어요.

“으슬으슬하다고?!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이 분명하구나! 당장 대륙 방방곡곡에 있는 명의들을 모조리 잡아…… 아니, 정중히 모셔 오너라! 신성청의 고위 사제들도 멱살을 잡아서라도 이곳으로 끌고 와!”

카이든은 붉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기사들에게 포효했답니다.

“그리고 이 쓸모없는 온실은 당장 분쇄해 버려라! 감히 내 딸에게 먼지와 찬 바람을 선사한 이 공간을 가만둘 수 없다! 당장 따뜻한 남부의 최고급 마력 석재로 온실을 새로 짓고, 바닥에는 사계절 내내 온풍이 나오는 마법진을 이중으로 각인해라!”

“예, 예! 공작 전하!”

기사들은 사색이 되어 온실의 화초들을 치우고 바닥을 부수기 시작했어요.

아멜리아는 거대한 소동의 중심에서 아빠의 품에 쏙 안겨 들었답니다. 카이든은 자신의 거칠고 커다란 손이 딸의 여린 피부를 상하게 할까 봐, 은빛 자수가 놓인 부드럽고 도톰한 검은 장막 망토로 그녀를 돌돌 말아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어요.

망토에서는 시원한 겨울바람 냄새와 포근한 소나무 향이 은은하게 풍겨왔지요.

“아멜리아, 조금만 참으려무나. 이 아비가 제국 최고의 약재는 다 구해주마. 네 몸에 털끝만 한 상처라도 남게 두지 않을 테니……”

카이든의 눈가에 촉촉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며, 아멜리아는 슬그머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답니다.

‘아빠, 미안해요…… 하지만 이건 다 불쌍한 마수들을 살리기 위한 생존 거래 같은 거니까요.’

과거의 배신 상처 때문에 타인의 맹목적인 애정을 100% 믿지 못하는 아멜리아였지만, 이토록 자신을 위해 온 세상을 뒤흔드는 아빠의 호들갑은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을 간지럽게 만들었어요.

막대한 걱정 마력도 얻고, 들킬 위험도 완벽하게 모면했으니 이보다 더 완벽한 해소는 없었지요. 아멜리아는 품 안에서 얌전히 눈을 감으며, 수확한 마력으로 장부 상점을 열어 뽀뽀에게 줄 사료와 소독 물품들을 구매하기 시작했답니다.

[‘소독용 붕대 50롤’ 구매 완료!] [‘특제 연어 닭가슴살 사료’ 10팩 구매 완료!] [남은 걱정 마력 자원: 18,500점]

인벤토리에 가득 쌓이는 구호물품들을 보며 아멜리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어요. 이제 비밀 요람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상처 입은 늑대 마수 뽀뽀를 완벽하게 치료해 줄 수 있을 터였지요.

카이든은 품에 안긴 아멜리아가 추울세라 더 꽉 끌어안으며 온실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답니다.

바로 그때였어요.

아멜리아의 머릿속에서, 방금 전의 경쾌한 소리와는 전혀 다른 날카롭고 붉은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답니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긴급 상황! 비밀 요람의 환자 ‘뽀뽀’(펜릴)의 생체 신호 급격히 저하!] [현재 심박 수: 분당 40회 (위험 수준)] [경고: 뽀뽀의 상처 부위에서 ‘기생 마기’의 2차 변이가 시작되었습니다. 30분 이내에 정화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마수가 영구 폭주 상태에 빠집니다!]

‘뭐라고?!’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크게 흔들렸어요.

지금 당장 검은안개 숲으로 달려가 반쪽짜리 달빛풀로 특수 정양식을 만들어 먹여야 하는데, 그녀는 지금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유리인형으로 착각한 아빠의 품에 꽁꽁 묶여 침실로 실려 가는 중이었답니다.

아빠의 품은 너무나 따뜻하고 안전했지만, 그 안전함이 지금 아멜리아에게는 가장 거대한 철창이 되어 버린 것이었어요.

‘큰일 났다. 30분이라니!’

아멜리아의 가슴이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어요.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아빠의 품에 안긴 채 가냘프게 숨을 몰아쉬는 시늉을 해야만 했지요.

지금 당장 검은안개 숲으로 달려가도 모자랄 판에, 공작저의 가장 깊고 삼엄한 침실로 끌려가게 생겼으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는 기분이었답니다.

“비켜라! 당장 의무관들을 내 방으로 소집해!”

카이든의 포효와 함께 복도 모퉁이를 돌려던 찰나, 저편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웠어요.

아멜리아의 오빠이자, 공작가의 후계자인 렌 에스카르디아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고 있었답니다.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던 그의 은빛 머리칼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고, 손에는 다급하게 챙겨 온 듯한 은쟁반이 들려 있었지요.

그 쟁반 위에는 아멜리아를 위해 우려낸, 은은한 황금빛을 띠고 달콤하고 향긋한 향이 나며 기분 좋게 따끈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과 배차가 놓여 있었어요.

“아멜리아가…… 피를 흘렸다는 게 사실입니까?”

렌의 푸른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답니다. 그의 시선이 아멜리아의 손끝에 묻은 거뭇한 흙먼지에 닿는 순간, 은쟁반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쳉그랑 소리를 냈어요. 따스한 모과 배차가 붉은 카펫 위로 사방으로 튀었지만, 렌은 그것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어 보였지요.

“이럴 수가……. 가문이 이토록 강성한데, 겨우 내 동생의 건강 하나 지키지 못하다니. 이건 가문의 수치이자 나의 죄악이다…….”

렌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그의 수려한 얼굴이 절망으로 차갑게 굳어갔답니다.

띠링! 띠리링-!

[돌발 상황! 오빠 ‘렌 에스카르디아’가 극단적인 자책 상태에 빠졌습니다!] [오해 수준: 심연 돌파급 (동생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처벌하려는 욕구)] [렌의 눈물겨운 과보호 집착 마력 18,000점 추가 획득!] [현재 보유 걱정 마력: 36,500점]

엄청난 마력이 복리로 굴러 들어왔지만, 지금 아멜리아에게는 마력을 기뻐할 여유가 단 1초도 없었답니다. 머릿속의 경고 신호가 계속해서 붉은 빛을 깜빡이고 있었으니까요.

[남은 시간: 22분 14초]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해. 그러려면…….’

아멜리아는 결단을 내려야 했어요. 그녀는 렌의 옷자락을 아주 살짝, 겨우 나비가 내려앉은 것처럼 가냘프게 쥐었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나른하고 지친 목소리로 소근거렸어요.

“오빠…… 아빠……. 저, 너무 졸려요……. 그냥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방에서, 혼자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아멜리아! 하지만 의사의 진단을 받아야……!”

카이든이 안절부절못하며 앞장서려 하자, 아멜리아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한 방울 톡 떨어뜨리며 고개를 저었지요.

“사람들이 많으면…… 머리가 아파요. 부탁이에요……. 혼자서 조용히 쉬고 싶어요…….”

그 가냘픈 부탁에 두 괴수 같은 사내는 즉각 무기를 내려놓은 패잔병처럼 굳어버렸답니다. 아멜리아가 스트레스를 받아 병세가 악화될까 봐 온몸의 털을 쭈뼜 세우며 겁을 먹은 것이었지요.

“알았다, 내 아가씨. 네 뜻대로 하마. 당장 아가씨를 침실로 모셔라! 그리고 아가씨의 침소 반경 100미터 이내에는 개미 한 마리도 지나가지 못하게 통제해라! 숨소리조차 크게 내는 자가 있다면 그 즉시 참수할 것이다!”

카이든의 엄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멜리아는 자신의 폭신한 침실로 옮겨졌답니다.

렌은 눈부시게 새하얗고 구름처럼 몽글몽글하며 포근한 라벤더 향이 솔솔 풍기는 실크 이불을 아멜리아의 턱밑까지 꼼꼼하게 덮어주었어요. 두 남자는 아멜리아가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까치발로 방을 빠져나갔지요.

철컥.

육중한 방문이 닫히고 방 안이 완벽한 정적에 휩싸인 순간, 아멜리아는 번쩍 눈을 떴답니다.

[남은 시간: 15분 45초]

“지금이야!”

아멜리아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침대 밑으로 발을 디뎠어요. 드레스 주머니 속에 든 반쪽짜리 달빛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지요.

그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침대 뒤편의 비밀 통로로 향했답니다. 공작가의 삼엄한 감시망 속에서도, 숲속 마수들을 돌보기 위해 오랜 시간 공들여 파두었던 작은 개구멍이자 비밀 통로였어요.

아멜리아는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실크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어둡고 좁은 통로를 향해 거침없이 몸을 던졌답니다.

* * *

스산한 바람이 부는 검은안개 숲의 깊은 곳.

가시덤불 장벽으로 단단히 둘러싸인 아기자기한 비밀 요람 안으로 아멜리아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왔어요. 가녀린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뺨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지요.

“하아, 하아……! 뽀뽀야!”

아멜리아는 요람 한구석에 마련된 푹신한 약초 침대로 다급하게 달려갔답니다.

그곳에는 은빛 털을 가진 거대한 늑대 마수, 뽀뽀가 쓰러져 있었어요. 하지만 평소의 위엄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뽀뽀의 몸 위로 검붉은 마기가 기분 나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지요. 은빛 이마 위에는 굵은 핏줄이 검게 튀어나와 흉측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답니다.

“크으으으…….”

뽀뽀는 고통스러운 듯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신음하고 있었어요. 붉게 충혈된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어가는 폭주 직전의 상태였지요.

[경보: 기생 마기의 2차 변이율 95% 돌파!] [환자의 심장 박동이 불규칙합니다. 즉시 ‘달빛풀을 곁들인 연어 영양식’을 투약하십시오!]

“조금만 참아, 뽀뽀야. 누나가 금방 안 아프게 해줄게.”

아멜리아는 침착하게 인벤토리를 열어 아까 구매해 둔 싱싱한 연어 사료와 품 안에서 꺼낸 반쪽짜리 달빛풀을 꺼냈답니다. 그리고 요람 한쪽에 마련된 작은 절구에 약초를 넣고 빻기 시작했어요. 푸르스름한 약초의 즙이 연어 사료와 섞이며 은은하고 달콤한 정화의 향기를 풍기기 시작했지요.

다행히 아직 시간은 늦지 않았어요. 이것을 먹이기만 하면 뽀뽀의 폭주를 막고 상처를 진정시킬 수 있을 터였답니다.

아멜리아가 정성스럽게 갠 영양식을 들고 뽀뽀에게 다가가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어요.

스스스스…….

습기 찬 동굴 내부의 공기 사이로, 숲속의 흙냄새도, 달빛풀의 정화 향도 아닌 묘한 냄새가 섞여 들어왔답니다.

매혹적이면서도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인위적이고 화려한 꽃 향기. 그것은 공작저 서고 깊은 곳에서 발견했던 밀랍 편지 봉투에 묻어 있던, 신성청 고위 끄나풀들만이 사용한다는 극상의 사치품, ‘리일리향’의 냄새였어요.

아멜리아의 척추를 타고 서늘한 전율이 흘러내렸답니다.

이곳은 가문의 기사들도 찾지 못하는 자신만의 비밀 요람이었어요. 그런데 어째서 이 깊고 은밀한 곳에서 신성청 첩자의 향수 냄새가 풍겨오는 것일까요?

바스락.

어두운 가시덤불 장벽 너머, 보이지 않는 음영 속에서 누군가의 차가운 시선이 아멜리아의 뒤통수를 찌르듯 닿아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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