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얗고 솜사탕처럼 폭신하며 은실로 정교하게 수놓인 실크 드레스 자락이 붉은 핏빛으로 무참하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렌의 얼굴은 순식간에 핏기를 잃고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의 은청색 눈동자가 마치 세차게 부는 바람 앞에 놓인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피……? 아멜리아, 대체 어디가 아픈 것이냐! 어찌 몸에서 이런 붉은 피가 흘러넘치냔 말이다!”
렌이 당장에라도 바닥이 무너질 듯 거친 발걸음으로 다가와 아멜리아의 가냘픈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손끝이 사시나무 떨리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아멜리아의 귓가에 맑은 종소리와 함께 오직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반짝이는 민트색 반투명 창이 떠올랐다.
[띵동!] [대상 ‘렌 에스카르디아’가 극도의 공포와 파멸적인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걱정 마력이 폭발적으로 흡수됩니다!] [걱정 마력 충전율: 120%…… 180%…… 250% 돌파!] [마력 소스가 가득 차올라 ‘정교한 진단 키트’의 소환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아멜리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빠의 유난스러운 걱정 덕분에 마수가 필요로 하는 최고급 진단 도구를 소환할 마력이 단숨에 모인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아멜리아가 옅은 황금빛 마력을 손끝에 모아 키트를 불러오려던 찰나였다.
*그으으으…….*
방 안의 무거운 침묵을 깨고, 테라스 아래쪽 벽면에 작게 뚫린 배수구 구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의 처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가문 몰래 검은안개 숲으로 이어지도록 아멜리아가 파놓았던 비밀 통로였다. 그 깊고 어두운 구멍 속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뼈마디가 저릴 만큼 축축하고 고통스러웠다.
아멜리아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설마 낮에 보았던 그 다친 녀석이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렌의 날카로운 시선등이 아멜리아의 붉게 물든 치맛자락으로 향했다. 당장이라도 제국 전체를 뒤엎을 기세로 분노를 터뜨리려는 오빠를 진정시켜야 했다. 아멜리아는 얼른 자신의 작은 손을 입가등에 가져다 대며 가냘프게 몸을 웅크렸다.
“콜록! 쿨럭, 쿨럭……! 흑…….”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기침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아멜리아는 일부러 눈가에 눈물을 그득히 머금은 채,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요정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멜리아!”
렌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갈라졌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제 동생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 손길이 마치 조금만 힘을 주면 바스러질 유리인형을 다루는 듯 조심스러웠다.
“오빠…… 저, 괜찮아요. 이건 제 피가 아니라…… 아까 시녀 언니가 가져다준 달콤하고 따끈따끈하며 붉은 딸기 시럽을 쏟아서 그래요. 쏟아진 병을 치우려다 그만 드레스에 묻어 버렸어요. 콜록!”
아멜리아는 발끝으로 침대 밑에 굴러다니던 빈 시럽 병을 넌지시 툭 밀어 넣었다. 다행히 붉은 액체가 바닥에 흥건히 번져 있어 렌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렌의 걱정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기침 소리에 더욱 새파랗게 질려 의관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의관! 당장 내 동생의 폐를 진찰해라! 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지 않느냐! 폐병이라도 도진 것이라면 네놈의 삼족을 멸할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에비안 의관이 덜덜 떨며 청진기를 꺼내 들려 하자, 아멜리아는 얼른 렌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가냘픈 손가락에 힘을 주어 매달리는 시늉을 하자 렌의 사나운 기세가 봄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오빠, 의관님을 꾸짖지 마세요. 그냥…… 방 안의 공기가 조금 탁해서 그런 것 같아요. 요즘 날이 건조해서 먼지가 자꾸 기관지를 찌르는 기분이 들어요.”
“먼지라고? 당장 이 방의 모든 가구와 벽지를 뜯어내고 새로 도배를 하겠다! 기사들을 시켜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닦아 내라고 지시하마!”
“아니에요, 오빠. 그렇게 거칠게 청소를 하면 오히려 먼지가 더 날려요. 그보다…… 황실에서 쓰는 아주 특별한 물건이 있다고 들었어요.”
아멜리아는 이때다 싶어 눈동자를 반짝였다.
“황실에서는 몸이 약한 황족들을 위해 하얗고 단단한 백자작나무로 만들고 안쪽에는 순은 판을 덧댄 ‘멸균 마차’를 쓴대요. 세균과 나쁜 기운을 완벽하게 차단해 주는 마차라고 하던걸요. 그리고 순도가 아주 높은 연소독용 알코올과 상처를 보호해 주는 부드러운 면 붕대를 가득 채워 둔대요.”
그녀는 양손을 모으며 소망 어린 표정으로 렌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보관함이 제 방에 있다면, 먼지나 세균 걱정 없이 언제나 깨끗하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텐데…….”
사실 그것들은 전부 다친 마수들을 치료할 때 필요한 일급 의료 소모품들이었다. 가문의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치료 도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기에, 아멜리아는 과보호를 역이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렌의 은청색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과보호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멸균 마차와 순은 소독 기구, 그리고 최고급 면 붕대라니!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준비해 두지 않았다니, 내가 동생을 돌보는 데 너무도 소홀했구나!”
자책감에 휩싸인 렌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등 뒤로 검붉은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의관은 바닥에 완전히 납작 엎드렸다.
“당장 제국의 모든 상단을 수소문해라! 황실의 것보다 세 배는 더 크고 완벽한 백자작나무 멸균 보관함을 제작해 이 방에 들여놓아라! 순은으로 도금한 소독 기구와 최고급 약초로 우려낸 멸균수, 그리고 상처에 자극이 없는 실크 면 붕대를 창고 가득 채워 넣어라! 한 시간이라도 늦는다면 상단주들의 목을 치겠다!”
“예, 예! 소인 목숨을 걸고 구해 오겠나이다!”
의관이 허겁지겁 방을 뛰어나가자, 아멜리아는 고개를 숙여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완벽해. 오빠의 유난스러운 걱정 덕분에 마수 치료용 최고급 일회용품들과 소독 장비를 공짜로, 그것도 산더미처럼 얻게 생겼네.’
가족들의 숨 막히는 집착은 참 버거웠지만, 이렇게 쓸모가 있을 때만큼은 참으로 든든한 마력 공급원이자 자원줄이었다.
***
그날 밤.
장막 같은 어둠이 에스카르디아 공작저를 무겁게 내려앉았다. 밤하늘에는 차갑고 푸르스름한 반달이 걸려 있었고, 정원 구석구석에는 은은하고 따뜻한 호박색 마력등이 깜빡이며 길을 밝히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밤하늘처럼 어두운 짙은 초록색 후드 망토를 깊숙이 눌러썼다. 낮에 입었던 화려한 드레스 대신, 움직이기 편하고 땀 흡수가 잘 되는 얇은 면바지와 헐렁한 셔츠 차림이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태엽시계를 가만히 응시했다.
째깍, 째깍.
기다리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지난 수개월 동안 공작저 시녀들의 교대 시간과 경비 기사들의 순찰 동선을 완벽하게 분석해 두었다.
정확히 밤 11시 45분.
아멜리아를 전담하는 수석 시녀 셰릴이 주방으로 내려가 밤에 마실 달콤하고 향긋하며 노르스름한 국화차를 우려오는 시간이었다. 동시에 서쪽 정원을 지키는 하급 기사들이 교대를 위해 자리를 비우는 틈이기도 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정확히 7분.’
아멜리아는 소리 없이 침대에서 내려와 테라스 문을 열었다. 낮 동안 미리 느슨하게 풀어 두었던 창살 사이로 가냘픈 몸을 쏙 빼냈다. 벽면을 타고 튼튼하게 자라난 담쟁이덩굴은 훌륭한 사다리가 되어 주었다.
스윽, 사각.
이슬을 머금어 축축하고 차가운 잔디밭에 아멜리아의 작은 가죽 장화가 닿았다. 그녀는 숨을 죽인 채 몸을 낮추고 장미 덤불이 빽빽하게 우거진 정원 외곽으로 달렸다.
날카로운 가시덤불이 가득한 장벽 앞에 다다르자, 아멜리아는 망토 자락이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가시가 돋지 않은 비밀 틈새를 향해 기어 들어갔다. 그 통로를 지나자 공작가의 눈이 미치지 않는 금단의 구역, 검은안개 숲 초입이 나타났다.
빽빽한 가시덤불 장벽 안쪽에는 아멜리아가 전생의 지식을 총동원해 몰래 가꾸어 둔 작은 ‘비밀 요람’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요람의 상태를 마주한 아멜리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아…… 정말 갈 길이 멀네.”
한숨과 함께 뿜어져 나온 하얀 김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비밀 요람의 전경은 그야말로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썩어가는 나무 판자를 대충 엮어 만든 삐걱거리는 환자용 침대 위에는 거칠고 딱딱한 마른 이끼가 듬성듬성 깔려 있었다. 약초를 말려 두는 건조대는 나뭇가지를 칡넝쿨로 겨우 묶어 두어, 밤바람이 불 때마다 위태롭게 흔들렸다.
아멜리아는 가만히 속삭이며 영수 육성 장부를 불러냈다.
“장부, 열려라.”
*티링!*
맑은 소리와 함께 허공에 영롱한 초록빛 필사본 형태의 장부가 스르륵 펼쳐졌다. 장부의 표지에는 아기자기한 발바닥 문양이 새겨져 있어 제법 귀여운 느낌을 주었다.
[비밀 요람 시설 현황 및 자원 보고] - 침대 안락도: 8% (환자가 누우면 허리 통증을 호소할 수준) - 약초 건조대 보존율: 15% (습기에 취약함) - 현재 보유 자원: * 정화수: 3L (매우 부족) * 일회용 일반 붕대: 5롤 * 저급 약초 즙: 2병 - 완치 평판: 0 (무명)
“정화수 겨우 3리터에 붕대 다섯 롤이라니. 오늘 낮에 얻은 마력으로 소독 키트는 연성했지만, 여전히 소모품 재고가 턱없이 부족해.”
아멜리아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장부의 수치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내일 렌 오빠가 방 안 가득 채워 줄 최고급 멸균 장비들과 면 붕대들을 어떻게든 이 요람으로 빼돌려 재고를 채워 넣어야만 했다.
바로 그때였다.
*바스락.*
어둡고 차가운 바람이 부는 덤불 속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달빛조차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숲 특유의 싱그러운 풀 내음 대신 지독하게 비릿하고 썩어가는 피 냄새가 바람을 타고 밀려왔다.
아멜리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덤불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일반적인 들짐승의 크기를 아득히 초월한, 집채만 한 크기의 거대한 검은 늑대였다. 녀석의 온몸은 무언가에 찢기고 뜯긴 듯 처참한 상처로 가득 차 있었고, 썩어가는 상처 부위에는 누군가 억지로 친친 감아놓은 듯한 더럽고 때 묻은 붕대가 피에 젖어 덜렁거리고 있었다.
붉게 충혈된 늑대의 눈동자는 극심한 고통과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스으으읍…….*
늑대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날카롭고 하얀 칼날 같은 이빨 사이로 뜨겁고 비릿한 김이 뿜어져 나왔다.
[경고! 고대 영수 ‘펜릴’(성체/오염 상태)과 조우했습니다!] [대상의 적대치: 95% (광증 및 통증으로 이성을 상실함)] [주의! 현재 상태로 치료를 시도할 경우 공격받을 위험성이 극도로 높습니다!]
붉은색 경고창이 아멜리아의 시야를 가득 채우며 요란하게 깜빡였다.
거대 늑대는 뼈가 으스러질 듯한 저음의 으르렁거림을 토해내며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녀석이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썩어가는 상처에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차가운 흙바닥을 적셨다.
도망쳐야 한다는 이성의 외침보다, 수의사로서 저 끔찍한 고통을 끝내주고 싶다는 본능이 아멜리아의 발을 묶었다.
하지만 상처의 독소에 오염되어 이성을 잃은 영수에게 인간의 가녀린 체구는 그저 한 입 거리 사냥감에 불과했다.
크르르릉!
순간, 거대 늑대의 앞다리 근육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녀석은 대지를 박차고 솟구쳐 오르며, 아멜리아의 가녀린 목덜미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이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거대한 턱을 벌린 채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