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딸기 생크림처럼 몽글몽글한 레이스가 겹겹이 흘러내리는 침대 캐노피는 오늘따라 유난히 무거워 보였다.

아멜리아는 살구색 실크 리본이 아기자기하게 수놓인 소매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은은한 바닐라 향이 감도는 따뜻한 캐모마일 차가 은쟁반 위에서 하얗게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창문 너머 굳게 닫힌 철문으로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과보호가 아니라 감금이야.’

전생에 작은 동물병원을 운영하며 상처받은 길고양이와 강아지들을 치료해 주던 수의사, 그게 아멜리아의 진짜 정체였다. 트럭 사고로 허망하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제국에서 가장 잔혹하고 강력한 무력 가문이라는 에스카르디아 공작가의 막내딸로 환생해 있었다.

문제는 이 무시무시한 가문 사람들이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유리인형처럼 취급한다는 점이었다.

먼지 한 톨이라도 스치면 피부가 찢어질까 염려하고,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호흡기가 상할까 봐 방 안의 모든 창문을 쇠사슬로 걸어 잠그는 아빠와 오빠들. 그들의 숨 막히는 집착 밑에서 아멜리아는 매일같이 무거운 눈치를 보며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을 짜야 했다.

“휴, 그래도 이건 몰래 말려 둬야 하는데.”

아멜리아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침대 밑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정원 구석에서 몰래 뜯어온 초록빛 wild mint, 즉 야생 박하 잎사귀 몇 장과 앙증맞은 미니어처 황동 화로가 들어 있었다. 가문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숲속 다친 마수들을 치료해 줄 소독용 약초를 만들려면, 우선 이 약재들을 가볍게 구워 말려야 했다.

칙.

작은 성냥불이 황동 화로 속의 마른 장작에 닿았다. 치지직 소리를 내며 불꽃이 번지더니, 이내 야생 박하의 쌉싸름하면서도 시원한 향이 아주 미세한 보랏빛 연기와 함께 피어올랐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긋한 냄새에 아멜리아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평화는 정확히 3초 뒤에 박살 났다.

쿵!

“아멜리아!”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묵직한 대리석 문이 통째로 쪼개지며 나가떨어졌다. 굉음과 함께 흩날리는 먼지 구덩이 사이로 은빛 머리카락을 거칠게 휘날리는 청년이 난입했다.

에스카르디아 공작가의 차남이자, 아멜리아의 둘째 오빠인 렌이었다.

그의 손에는 푸른 마력이 흉포하게 일렁이는 새하얀 검이 들려 있었다. 평소에는 얼음처럼 차갑고 이성적인 제국의 천재 마법검사였지만, 지금 렌의 눈동자는 마치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연기……? 사방에 독가스가 가득하구나! 암살자가 침입한 건가? 기사단은 무엇을 하고 있었지!”

“오, 오빠? 이건 그냥 박하 잎을 굽는……”

“움직이지 마라, 아멜리아! 숨을 쉬어서는 안 된다!”

챙강!

렌은 손에 들고 있던 명검을 미련 없이 바닥에 내팽개쳤다. 값비싼 보석이 박힌 검이 대리석 바닥을 뒹굴었지만, 그의 안중에는 오직 아멜리아밖에 없었다.

그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아멜리아의 눈앞에 무릎을 꿇었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아멜리아의 가냘픈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손끝이 사시나무 떨듯 잘게 떨리고 있었다.

“목소리가 갈라지는구나. 이미 독연기가 네 연약한 기관지를 상하게 한 게 틀림없어. 가슴이 답답하지 않느냐? 머리가 어지럽지는 않고? 어서 말해 보아라, 아멜리아!”

“아니에요, 오빠. 정말 괜찮아요. 아주 조금 매캐했을 뿐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네 하얗고 고운 뺨이 이리도 붉게 상기되었는데 괜찮다니!”

렌의 얼굴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의 은빛 속눈썹 끝에 맺힌 눈물이 아침 이슬처럼 파르르 떨렸다. 가문을 완벽히 통제하는 냉혈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동생의 작은 상처 하나에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시스콘 오빠만 남아 있었다.

“내가 미련했다. 네 방에 이딴 가공되지 않은 불순물이 들어오는 것을 방치하다니……. 당장 저 화로를 만든 장인을 잡아 가두고, 가문 내의 모든 화기 사용을 금지하겠다! 아니, 제국 전역의 화로를 모두 회수하라고 명령할 것이다!”

‘아니, 제국 전역의 화로를 왜 뺏어!’

아멜리아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오빠의 극단적인 과보호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녀가 감기에 걸리면 황실 의사들을 납치해 오고, 발가락을 채이면 바닥의 대리석을 만든 석공 가문을 파멸시키려 드는 무시무시한 광기.

그녀가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윙-!

갑자기 아멜리아의 귓가에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흐릿하던 그녀의 시야 위로 맑고 푸른빛을 띤 반투명한 시스템 창이 실체화되어 떠올랐다.

[시스템 콘솔 '영수 육성 장부'가 성공적으로 기동합니다!] [소유주: 아멜리아 에스카르디아] [보유 마력 소스: 5,600 / 10,000 (충전 완료!)]

‘이게 무슨……?’

아멜리아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 떠오른 푸른 화면은 전생의 게임 인터페이스와 무척 닮아 있었다. 허공을 휘젓는 아멜리아의 손가락 끝자락에 닿은 시스템 창이 부드러운 물결무늬를 그리며 새로운 텍스트를 출력해 냈다.

[경고! 대상 '렌 에스카르디아'의 걱정과 불안 수치가 임계점을 돌파했습니다.] [가족의 집착 마력이 대량으로 흡수됩니다! (+1,200)] [현재 누적 마력: 6,800]

[※ 안내: 본 장부는 다친 영수와 마수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영수 전용 경영 장부'입니다. 본 장부의 모든 기적적인 치유 기능(약초 레시피 소환, 붕대 제고 관리, 특제 사료 배합 등)을 활성화하는 유일한 에너지 소스는 '가족들이 아멜리아에게 품는 걱정, 불안, 집착의 크기'입니다.]

설명을 읽어 내려가던 아멜리아의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전생의 수의사 경력을 살려 이 험난한 세상에서 다친 마수들을 구해주고 싶었지만, 약초 살 돈도 없고 마음대로 방 밖을 나갈 수도 없어 절망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 장부를 활성화하는 동력원이 다름 아닌 ‘가족들의 과보호’라니!

‘그렇다면…… 오빠들이 나를 걱정해서 난리를 칠 때마다, 나는 마수를 치료할 수 있는 마력을 무한정으로 얻을 수 있다는 뜻이잖아?’

그동안 숨 막히고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가문의 극단적인 집착이,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든든한 ‘마력 충전소’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멜리아의 가슴속에서 영리하고 발칙한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문의 눈치를 보며 기가 죽어 지낼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세상을 다 잃은 척 연기하기만 해도 마력이 굴러 들어오는 최고의 환경인 셈이었다.

“아멜리아? 왜 아무 말이 없느냐? 역시 몸이 안 좋은 게 틀림없구나. 내 당장……”

불안감에 휩싸여 주먹을 꽉 쥐는 렌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그가 느끼는 공포를 대변하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즉각 행동에 나섰다. 그녀는 일부러 하얗고 가냘픈 손으로 목덜미를 살포시 감싸 안으며, 눈가를 아련하게 붉혔다. 그리고 리듬감 있게 어깨를 한번 가볍게 들썩였다.

“콜록, 쿨럭……! 오, 오빠……. 왠지 목이 조금 뜨겁고, 가슴이 간지러운 것 같아요…….”

연기는 완벽했다. 살짝 젖은 눈가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은 세상에서 가장 가녀린 요정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 순간, 렌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사정없이 흔들렸다.

“기, 기침을……! 아멜리아가 기침을 했다! 어서, 어서 제국 최고의 치유사를 불러와라! 아니, 신성청의 성녀를 당장 끌고 와라! 내 동생이 아프단 말이다!”

그가 고함을 지르며 비명을 지르듯 외치자마자, 아멜리아의 시야에 축제가 터진 것처럼 화려한 알림창이 쏟아져 내렸다.

[띵동! 대상의 극단적 호들갑 감지!] [가족 집착 마력 폭발적 충전 중! (+1,500)] [가족 집착 마력 폭발적 충전 중! (+2,000)] [현재 누적 마력: 10,300 (마력 저장고 최대치 돌파!)]

‘심봤다!’

아멜리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기침 몇 번에 마력 저장고가 터져 나갈 정도로 충전되다니, 이보다 더 남는 장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렌은 당장 방 바깥의 시종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먼지 하나라도 더 들이마실세라 아멜리아를 침대 안쪽의 가장 푹신한 오리털 이불 깊숙이 묻어버리는 정성도 잊지 않았다.

“아멜리아, 조금만 참으려무나. 이 오빠가 가문의 모든 권력을 동원해서라도 널 낫게 하마!”

“네에, 오빠……. 오빠가 곁에 있어 주시면 금방 나을 것 같아요.”

아멜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이불을 꼭 쥐자, 렌은 감격에 겨워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의 얼굴에 안도와 집착이 뒤섞인 묘한 표정이 떠올랐고, 그와 동시에 시스템 마력은 계속해서 짤랑거리는 금화 소리를 내며 쌓여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소란스러운 기사들과 하녀들이 방 안의 공기를 정화하겠다며 온갖 마법 도구를 들고 들이닥쳤을 때였다.

아멜리아는 오빠가 잠시 의사를 맞이하러 문가로 간 틈을 타, 장부의 상점 탭을 살포시 터치했다.

[마력 5,000을 소모하여 '하급 영수 진단 키트' 및 '멸균 붕대 세트'를 구매하시겠습니까?]

‘당연히 구매해야지.’

아멜리아가 마음속으로 버튼을 누르자, 그녀의 손바닥 위로 따스한 온기와 함께 정교하게 다듬어진 나무 도구들과 부드러운 하얀 붕대 뭉치가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향긋한 라벤더 향기가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인간의 기술로는 만들 수 없는 영수 전용의 정밀한 치료 도구들이었다.

‘이걸로 가문의 감시망을 피해 검은안개 숲속에 나만의 비밀 요람을 만들 물적 기반을 다질 수 있어. 가족들이 나를 걱정하면 걱정할수록, 나는 더 완벽하게 마수들을 구할 수 있는 거야!’

가족들의 숨 막히는 감금 생활을 역이용하여 최고의 영수 병원을 경영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이 드디어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아멜리아는 손에 쥔 진단 키트를 보며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바스락.

그때였다.

아멜리아의 침대 뒤편, 가문의 비밀 통로와 연결된 어둡고 깊은 옷장 틈새에서 아주 미세하고 축축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듯, 젖은 흙바닥을 긁는 소리와 함께 애처로운 신음이 어두운 공기를 갈랐다.

“낑…… 끄으응…….”

피비린내와 함께 숲의 차가운 독기가 옷장 틈새를 타고 아멜리아의 뺨을 스쳤다.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깊은 어둠 속을 향해 굳어졌다.

아멜리아의 작은 어깨가 흠칫 떨렸다.

기사들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틈을 타, 그녀는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운 토끼털 슬리퍼를 신은 발로 살금살금 옷장 앞으로 다가갔다. 달콤하고 따스한 바닐라 향이 감돌던 방 안에, 이질적일 만큼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과 눅눅한 피비린내가 섞여들고 있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아멜리아가 조심스럽게 옷장 문을 열었다.

가문의 비밀 통로가 숨겨져 있다는 소문만 들었던 옷장 뒤편, 삐걱거리는 나무 판자 너머에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어둡고 좁은 통로가 나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깊은 곳에서,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게 깜빡이는 두 개의 푸른 불빛이 보였다.

“……!”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곳에 누워 있는 것은 한 마리의 작은 아기 늑대였다. 아니, 늑대라고 하기엔 사방으로 뿜어내는 기운이 너무도 영험했다. 칠흑처럼 어두운 털모피는 피와 진흙으로 엉망진창 엉겨 붙어 있었고, 유난히 길고 우아한 꼬리는 힘없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띵동! 전설의 영수 '펜릴(유체)'을 발견했습니다!] [환자 상태 진단 중……] [상태: 심각한 독소 오염 및 다발성 열상. 마력 고갈로 인한 쇼크 위험군.] [스트레스 수치: 98% (극도로 예민함)]

시야에 떠오른 붉은 경고창이 사정없이 깜빡였다. 전생의 수의사 본능이 아멜리아의 심장을 거세게 두드렸다. 저 여린 생명이 숨을 헐떡일 때마다 잿빛 코끝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내버려 두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해.’

하지만 가문의 기사들이나 마법사들이 이 존재를 발견한다면, 즉각 신성청의 법률에 따라 ‘위험한 마수’라며 목을 베어 갈 것이 뻔했다.

그때, 복도 끝에서 대리석 바닥을 부술 듯이 달려오는 난폭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비켜라! 에비안 의관, 발이 그것밖에 빠르지 못하단 말이냐! 내 동생이 숨을 헐떡이고 있단 말이다!”

오빠 렌의 다급한 고함이었다.

아멜리아의 뺨이 하얗게 질렸다. 지금 이 다친 아기 늑대를 들킨다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그녀는 다급히 바닥에 주저앉아, 품 안에 안고 있던 새하얗고 푹신한 멸균 붕대와 소독초가 든 진단 키트를 옷장 구석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거칠게 으르렁거리는 아기 늑대를 향해 조심스럽게 두 손을 뻗었다.

“쉬이…… 착하지? 해치려는 게 아니야. 널 도와줄게.”

따스한 온기가 어린 목소리에, 잔뜩 날을 세우던 아기 늑대의 푸른 눈동자가 약하게 흔들렸다. 아멜리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녀석을 품에 안았다.

축축하고 뜨거운 피가 그녀가 입고 있던 새하얀 실크 드레스 자락을 붉게 물들였다.

쿵!

“아멜리아!”

문이 거칠게 열리며 렌이 의관의 덜미를 잡은 채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침대 아래, 하얀 드레스 가득 붉은 피를 묻힌 채 서 있는 아멜리아의 가냘픈 실루엣에 닿았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의관의 손에 들려 있던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고, 렌의 동공은 무참하게 찢어지듯 커졌다.

“피……? 아멜리아, 네 몸에서 어찌 그런 피가……!”

동생의 가슴팍에 번진 붉은 얼룩을 본 렌의 얼굴이, 마치 세상의 모든 빛을 잃은 것처럼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경고! 대상의 이성이 붕괴 직전에 도달했습니다!] [가족 집착 마력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폭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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