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아! 아가, 세상에…… 이 가냘픈 손에 묻은 게 대체 무엇이냐! 설마 피더냐? 아니면 저 간악한 교단 놈들이 네 백옥 같은 피부에 상처라도 낸 것이란 말이냐!”
카이든의 커다란 덩치가 사시나무 떨듯 무너지며 아멜리아의 작은 손을 감싸 쥐었어요.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극단적인 공포와, 동시에 세상을 통째로 갈아엎어 버릴 듯한 광포한 살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지요.
그의 등 뒤로는 차가운 은빛 마력의 폭풍을 두른 오빠 렌이 성큼성큼 걸어왔답니다. 렌은 아멜리아의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며, 마치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하얗게 질린 입술을 짓씹었어요.
“……아멜리아. 숨쉬기는 편안해? 가슴이 쿵쾅거리거나 머리가 아프진 않고? 저 더러운 벌레들이 네 털털한 옷깃자락 하나라도 건드렸다면, 나는 오늘 제국의 절반을 얼려 버릴 거야.”
렌의 목소리는 지독하리만치 차분했으나, 그가 디딜 때마다 발밑의 부드러운 흙바닥이 푸르스름한 얼음으로 변해 쩍쩍 갈라지고 있었답니다.
아멜리아는 눈앞에서 당장이라도 세상을 멸망시킬 기세로 폭주하는 두 괴수를 보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어요. 그녀는 가슴팍에 고이 매달려 있는 투명한 핏빛 다이아몬드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속으로 소리쳤지요.
‘어머나, 마력 충전 수치 좀 봐! 무려 이만이라니!’
반짝이는 황금빛 시스템 장부가 눈앞에서 요란하게 경고음을 울려 대고 있었어요. 가문의 숨 막히는 과보호가 폭발할 때마다 들어오는 이 든든한 마력 에너지는 아멜리아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었지만, 지금 마주한 아빠와 오빠의 눈빛은 정말로 제국을 피로 물들일 기세였답니다.
아멜리아는 살포시 고개를 저으며, 부드러운 우유 거품 같은 목소리로 가냘프게 속삭였어요.
“아빠, 오빠…… 저는 정말 괜찮아요. 뽀뽀랑 냥냥이가 저를 아주 튼튼하게 지켜 주었는걸요?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하지만 그 가냘프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는 오히려 두 괴수의 가슴을 후벼 파는 기폭제가 되었을 뿐이었지요.
카이든과 렌의 시선이 천천히 아멜리아의 등 뒤, 짓밟히고 꺾인 검은안개 숲속의 요람 경계선으로 향했답니다.
그들의 눈길이 닿은 곳에는 아멜리아가 그토록 애지중지 가꾸던 은빛 이끼들과 달콤한 향기를 풍기던 약초밭이 무참히 짓밟혀 있었어요. 신성청 기사들의 거친 철갑 장화에 뭉개진 영지의 경계선을 바라보는 카이든의 얼굴이 순식간에 흑마 가죽처럼 싸늘하게 일그러졌지요.
콰아아앙-!
카이든이 들고 있던 거대한 대검을 대지에 그대로 처박았답니다. 엄청난 파괴음과 함께 숲의 단단한 지반이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지며 굉음을 뿜어냈어요.
“감히…… 내 딸의 정원을 밟아?”
카이든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짐승의 으르렁거림과도 같았지요.
렌 역시 주먹을 꽉 쥐며 매서운 얼음 송곳들을 허공에 띄웠어요. 그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부러진 칼날들과, 신성청 기사들이 흘리고 간 피비린내를 쫓았답니다.
그때, 렌의 예민한 후각에 아주 익숙하고 불쾌한 향기가 스쳐 지나갔어요.
은은하면서도 끈적끈적한, 장미와 백합을 뒤섞은 듯한 기괴한 인공 향수 냄새.
“이 냄새는…….”
렌의 눈매가 날카롭게 호선을 그렸어요. 아멜리아 역시 그 향기를 맡고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맞아요, 오빠. 지난번 서고에서 발견했던 그 붉은 밀랍 왁싱 편지 봉투에 묻어 있던 리일리향이에요. 하녀장으로 가장했던 신성청 첩자가 은밀히 반출하려던 공작가 비밀 지도를 기억하시죠? 그 지도를 제가 가짜 매복 작전 지도로 교체해 두었었잖아요.”
아멜리아의 맑은 눈동자가 잔잔하게 빛났어요.
“교단 놈들은 그 가짜 지도에 적힌 경로가 우리 공작가의 가장 취약한 비밀 통로인 줄 알고 기세등등하게 쳐들어온 거예요. 결국 제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것이죠.”
그녀의 야무진 설명에 카이든의 가슴이 웅장해졌지만, 이내 그의 시선은 아멜리아의 가냘픈 손끝에 머물렀답니다.
아멜리아의 뽀얗고 말랑말랑한 검지손가락 끝에, 아주 미세한 검은 그을음 먼지가 살짝 묻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것은 아까 전 신성청의 불법 마수 수거 마개가 폭발할 때 공기 중에 날아다니던 잿가루가 묻은 것뿐이었어요.
그러나 전신 카이든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살점이 타들어 간 치명적인 화상처럼 보였답니다.
“그으름…… 화상이라니! 내 귀한 아가의 손가락에 불똥이 튀었단 말이냐!”
카이든의 눈이 완전히 뒤집혔어요.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아멜리아가 뜨거운 화염 속에서 고통받으며 눈물을 흘리는 끔찍한 망상이 실시간으로 재생되고 있었지요.
“이 비열하고 천하에 다시없을 잡것들이…… 감히 제국의 보물인 내 딸의 몸에 먼지를 묻혀? 온 신성청의 목을 쳐라! 그 누구도 살려 두지 마라!”
카이든이 검붉은 오오라를 폭풍처럼 뿜어내며 철혈 전진 명령을 하달했답니다.
“파멸 기병단! 당장 진격하여 도망치는 쥐새끼들의 숨통을 끊어라! 멜키오르 그 위선자 놈의 모가지를 가져와 내 딸의 발밑에 바칠 것이다!”
“넷, 대공 전하!”
숲속의 어둠 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에스카르디아 공작가의 정예, 파멸 기병단이 땅을 울리며 모습을 드러냈어요. 그들이 내뿜는 살기는 신성청의 어설픈 기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전장의 진짜 도살자들이 지닌 죽음의 기운이었지요.
말들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철갑을 두른 기병들이 대지 위를 폭풍처럼 쓸고 지나가기 시작했답니다.
요람의 결계를 간신히 빠져나가 숲 바깥으로 미친 듯이 도망치던 신성청의 패잔병들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저승사자의 발소리에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어요.
“도, 도망쳐! 괴수들이 온다!”
“살려 줘! 신이시여, 자비를……!”
하지만 공작가의 사전에 자비란 존재하지 않았답니다.
스사삭-!
차가운 참격이 대기를 가를 때마다, 도망치던 기사들의 목이 번뜩이는 칼날에 쓸려 추풍낙엽처럼 굴러떨어졌어요. 붉은 피가 하얗게 얼어붙은 대지 위에 장미꽃처럼 흩뿌려졌지요.
공작가의 기병들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 넘기며, 도주로를 따라 시체로 이루어진 끔찍한 탑, 즉 추풍관(秋風冠)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답니다.
그 격렬한 전장의 혼란 속에서, 아멜리아의 등 뒤에 서 있던 외뿔 달린 어린 새 마수, ‘냥냥이’가 솜털 같은 날개를 파르르 떨었어요.
냥냥이는 아멜리아가 숲속 구렁텅이에서 울고 있던 자신을 정성껏 치료해 주고 맛있는 영양 사료를 먹여 준 은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답니다. 자신의 소중한 은인이 위험에 처했었다는 사실에, 어린 새 마수의 이마에 새겨진 특이한 고대 정령 무늬 각인이 눈부신 황금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어요.
피이이이이-!
냥냥이가 하늘을 향해 맑고도 위엄 있는 울음소리를 길게 내뿜었답니다.
그 순간, 검은안개 숲의 하늘이 수만 마리의 새떼로 뒤덮이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전설 속에서만 전해 내려오던 하늘의 지배자, 고대 수호조 영수단이었지요.
수천, 수만 마리의 아름답고 거대한 영수들이 냥냥이의 부름에 응하여 하늘을 가득 메우며 신성청의 남은 병력들을 향해 맹렬히 강하했답니다.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이 허공을 가르며 도망치던 교단 병사들의 무구를 가차 없이 찢어발겼어요.
“이, 이게 무슨……! 마수 떼가 하늘을 뒤덮었다!”
저 멀리 언덕 위에서 전황을 지켜보고 있던 멜키오르 추기경의 얼굴이 핏기를 잃고 하얗게 질려 갔답니다.
그는 자신이 데려온 신성청의 정예 기사단이 공작가의 압도적인 무력과 하늘을 메운 영수 군단의 협공 속에 그야말로 먼지처럼 지워지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었어요.
“말도 안 돼…… 에스카르디아 공작가가 이 정도로 미쳐 날뛸 줄이야! 고작 그 계집애 하나 때문에 제국 전체와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는 건가!”
멜키오르의 입술이 사시나무 떨듯 파르르 떨렸답니다.
그는 공작가를 이단으로 몰아 처단하겠다는 자신의 거창한 계획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망한 도박이었는지 비로소 뼛속 깊이 깨달았어요. 저 멀리서 대지를 붉게 물들이며 다가오는 카이든과 렌의 압도적인 붉은 도살자 오오라는, 가히 일국을 멸망시키고도 남을 재앙 그 자체였지요.
“추기경님!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퇴각해야 합니다!”
부관이 비명을 지르며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지만, 이미 사방은 꽁꽁 얼어붙은 얼음 장벽과 하늘을 메운 수호조들의 그물망에 가로막혀 도망칠 곳조차 없었답니다.
카이든이 대검을 질질 끌며 멜키오르가 있는 언덕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어요. 검끝이 돌바닥을 긁을 때마다 붉은 불꽃이 튀며 고막을 찢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메아리쳤지요.
“멜키오르.”
카이든의 목소리가 대기를 짓눌렀어요.
“네놈이 감히 내 딸의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리려 했다는 사실을, 저승에 가서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하게 해 주마.”
막다른 골목에 몰린 멜키오르의 눈에 광기와 독기가 가득 차올랐답니다. 이대로 목이 잘려 죽느니, 차라리 공작가가 가장 아끼는 그 나약한 요정 같은 계집애를 길동무로 삼겠다는 추악한 본성이 고개를 들었어요.
“으아아아아! 죽어라, 괴물의 핏줄들아!”
멜키오르가 품속에서 시커멓게 일렁이는 불길한 기운의 보석을 꺼내 들었어요. 그것은 닿는 모든 생명체를 좀먹고 타락시키는 ‘대형 전염성 기생 고대 오염 핵석’이었답니다.
그가 광소하며 보석에 신성 마력을 불어넣자, 보랏빛의 끈적끈적한 저주받은 마법 광선이 아멜리아를 향해 한 줄기 빛처럼 강제로 기습 직사 투하되었어요!
“아멜리아-!”
카이든과 렌의 절규가 숲을 뒤흔든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