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뒤, 에스카르디아 공작저의 알현실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침묵 속에 잠겨 있었어요. 평소라면 아멜리아의 발걸음 소리 하나에도 온 저택이 따스한 분홍빛으로 물들었겠지만, 오늘만큼은 공기마저 팽팽하게 얼어붙어 툭 치면 깨질 것만 같았지요.
콰아앙―!
고요함을 가차 없이 찢어발기며 알현실의 육중한 청동 문이 사납게 열렸어요. 문을 부술 듯이 밀치고 들어온 것은 눈이 시릴 정도로 새빨간 제의를 입은 멜키오르 추기경이었답니다. 그의 뒤로는 칠흑 같은 갑옷을 입고 차가운 철퇴를 쥔 최고 이단 심문단원 수십 명이 떼를 지어 들이닥쳤어요. 빳빳하게 풀이 죽은 붉은 사제복 자락을 거칠게 휘날리는 멜키오르의 얼굴에는 승리에 도취한 비열한 미소가 일그러져 있었지요.
“여신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에스카르디아 공작가는 즉시 무기를 내려놓고 꿇어앉아라!”
멜키오르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외치며, 제국 법정의 황금빛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수색 영장을 허공에 거칠게 흔들었어요. 황금색 인장은 샹들리에의 불빛을 받아 기괴하게 번쩍였답니다.
“제국의 수호자라는 허울 좋은 이름 뒤에 숨어 더러운 마수들과 내통하고, 급기야 신성청의 하수인을 납치해 해치려 한 정황이 포착되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가문의 추악한 이단 증거물을 모조리 색출해 내리라!”
그의 매서운 외침이 알현실의 높은 천장을 때리며 웅웅 울려 퍼졌어요. 이단 심문관들의 가죽 장화가 대리석 바닥을 짓밟는 둔탁한 소리가 사방을 메웠지요.
“감히 이 자리가 어디라고 발을 디디는 거냐, 이 교활한 대머리 독수리 늙은이가.”
접견실 상석에 앉아 있던 카이든 공작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어요. 그의 붉은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너무나도 짙어, 대기하던 기사들이 일제히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지요. 카이든의 곁에 서 있던 소공작 렌 역시 얼음장 같은 미소를 지으며 검날을 반쯤 뽑아 들었어요. 스르릉,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알현실의 온도를 즉각 영하로 떨어뜨렸답니다.
그때, 카이든의 넓은 품 뒤에서 조그맣고 가냘픈 기침 소리가 들려왔어요.
“옥, 옥…… 콜록!”
아멜리아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입을 살짝 가린 채, 가냘프게 어깨를 떨었어요. 오늘 그녀는 은은한 살구빛이 감도는 부드러운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소매 끝에 달린 하얗고 폭신한 레이스가 그녀의 여린 손목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만들었지요.
“아멜리아!” “멜리!”
카이든과 렌의 시선이 번개처럼 아멜리아에게로 향했어요. 살기등등하던 두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는 걱정으로 가득 찼답니다.
[삐빅! 경고! 관찰 대상들의 ‘극단적 안절부절’ 수치가 한계 돌파를 향해 폭발적으로 상승합니다!] [가족들의 걱정, 불안, 집착 에너지가 마력으로 변환됩니다.] [+3,500 MP가 충전되었습니다! 현재 보유 마력: 16,000 MP]
아멜리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어요. ‘마력 충전 완료! 역시 우리 아빠랑 오빠는 가성비가 최고라니까.’ 하지만 겉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무해하고 유약한 요정처럼 눈망울을 촉촉하게 적시며 아빠의 굵은 소맷자락을 꼭 붙잡았지요.
“아빠, 오빠…… 저, 저는 괜찮아요. 손님들이 오셨는데 무기를 꺼내면 무섭단 말이에요…….”
눈물을 머금은 아멜리아의 애처로운 목소리에 카이든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어요. 그는 즉시 검을 내던지듯 밀어 넣고는 아멜리아의 작은 손을 양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안았답니다.
“그래, 그래. 우리 멜리가 놀라면 안 되지. 쉬이, 아빠가 미안하다. 저 더러운 잡배들을 네 고운 눈에 담게 해서 미안하구나.”
렌 역시 이성을 잃고 부들부들 떨며 손수건을 꺼내 아멜리아의 이마에 맺히지도 않은 땀방울을 정성스럽게 닦아주었어요.
“당장 가문 기사단을 불러 저놈들의 목을 베어 정원에 거름으로 주겠습니다, 아멜리아. 그러니 부디 노여워 마세요.”
이 눈물겨운 과보호의 현장을 지켜보던 멜키오르 추기경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어요.
“하! 가문 전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저런 유리인형 같은 계집애의 콧물 한 방울에 벌벌 떠는 꼴이라니! 비켜라, 에스카르디아! 오늘 우리는 정당한 법적 절차에 따라 저 요망한 공녀를 직접 심문하겠다!”
멜키오르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간이 심문 책상을 알현실 한가운데에 쾅 내려놓았어요. 그리고는 아멜리아를 향해 독사 같은 눈빛을 희번덕거렸지요.
“공녀 아멜리아. 네가 숲속에서 더러운 마수들을 정화하며 신성청의 법률을 위반했다는 밀고가 들어왔다. 순순히 자백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법왕청의 지하 노역소로 보내주마.”
그는 아멜리아가 겁을 먹고 울음을 터뜨릴 것이라 확신했어요. 칠흑 같은 심문관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압박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멜리아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녀는 아빠의 품에서 부드럽게 빠져나와, 우아하고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로 심문 책상 앞으로 다가갔답니다. 그녀의 부드러운 살구빛 드레스 자락이 흔들릴 때마다 달콤하고 포근한 바닐라 향기가 알현실에 은은하게 퍼져나갔지요.
아멜리아는 대답 대신, 멜키오르의 억압 가득한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저 생긋 미소를 지었어요. 그리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우아하게 의자에 앉아 침묵을 유지했답니다.
“……말을 안 하겠다는 건가? 죄를 인정하는 꼴이군!”
멜키오르가 윽박질렀지만 아멜리아는 그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맑고 투명한 눈동자로 그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어요. 침묵은 때로 백 마디 말보다 더 강력한 법이지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고요하게 미소 짓는 아멜리아의 태도에, 오히려 멜키오르의 미간이 초조하게 찌푸러지기 시작했답니다.
“이 건방진 년이……! 감히 이단 심문관들 앞에서도 입을 열지 않다니! 증거가 없어서 발뺌하는 모양인데, 이미 네년의 사치스러운 하녀장이 흘린 명백한 증거물이 우리 손에 있다!”
멜키오르가 품 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책상 위에 탁 올려놓았어요. 주머니가 열리며 굴러 나온 것은 푸른빛이 감도는 기묘한 금속 마개와,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편지 봉투였지요.
“이것은 공작저 서고에서 압수한 신성청의 극비 밀서와, 네놈들이 마수를 유인하고 가두기 위해 불법 제조한 ‘마수 수거 마개’다! 이 편지 봉투에 찍인 붉은 밀랍 왁싱과, 공작저 하녀장의 몸에서 풍기던 고귀한 리일리 향수가 바로 그 증거지! 이래도 발뺌할 테냐!”
멜키오르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어요.
하지만 아멜리아는 그 조잡한 증거물들을 보며 속으로 비웃음을 참아야 했답니다. 왜냐하면 그 편지와 증거물들은 모두 아멜리아가 며칠 전, 하녀장으로 위장했던 첩자의 품에서 빼앗은 진짜 지도와 서류를 교체해 둔 ‘가짜 미끼’였기 때문이지요.
아멜리아는 가만히 손을 뻗어 책상 위의 푸른 금속 마개를 손가락 끝으로 톡 건드렸어요. 그리고 마침내,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답니다. 마치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였지요.
“추기경님. 이 푸른색 마개는 제국 남부의 ‘라돈 광산’에서만 채굴되는 하급 청동과 아연을 7 대 3의 비율로 섞어 만든 합금이네요.”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멜키오르가 당황해 눈을 끔벅였어요. 아멜리아의 눈앞에는 이미 ‘영수 육성 장부’의 투명한 시스템 창이 정밀한 대조 데이터를 띄우고 있었지요.
[시스템 대조 완료: 신성청 특별 예산 제4호 밀거래 장부 기록과 일치.] [해당 수거 마개 제조 단가: 개당 12크로이. 신성청이 제국 귀족들에게 판매한 가격: 개당 1,500크로이.]
아멜리아는 생긋 웃으며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어요.
“이 마개의 진짜 제조 단가는 개당 겨우 12크로이에 불과하답니다. 하지만 신성청에서는 이를 ‘여신의 축복을 받은 정화 마개’라고 속여서, 제국 서부의 영주들에게 무려 백 배가 넘는 1,500크로이에 강매하셨지요? 제국 밀거래 장부 제14조 3항에 따르면, 이 마개는 마수를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수의 마력을 강제로 폭주시추어 폭사하게 만드는 ‘살상용 마법 도구’로 등록되어 있더라고요.”
“이, 이년이 무슨 헛소리를……!”
멜키오르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갔어요. 아멜리아는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붉은 밀랍이 찍힌 편지 봉투를 예쁜 손가락으로 가리켰답니다.
“그리고 이 편지 봉투에 칠해진 붉은 밀랍 왁싱과 향수 말이에요. 정말 향기로운 리일리 향수네요. 하지만 이 향수는 제국의 일반 상점에서는 결코 구할 수 없는 물건이지요. 오직 신성청의 비밀 첩보 부대인 ‘장미 기사단’의 간부들에게만 지급되는, 특수한 추적용 마력 염료가 섞인 향수니까요.”
아멜리아는 품 안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가볍게 올려놓았어요. 그것은 잡혀간 하녀장이 진짜로 소지하고 있던, 신성청의 공식 인장이 찍힌 진짜 지령서였지요. 지령서 귀퉁이에는 멜키오르가 방금 제시한 가짜 편지와 정확히 일치하는 리일리 향수 자국과 붉은 밀랍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어요.
“하녀장으로 가장해 우리 공작저에 침투했던 신성청의 첩자가 흘린 진짜 지령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답니다. ‘공작가의 비밀 지도를 탈취해 신성청의 매복지에 정보를 넘기고, 공녀 아멜리아를 납치하여 이단으로 위장 처형하라.’ 그리고 그 지령을 내린 서명란에는…….”
아멜리아가 생긋 웃으며 멜키오르를 정면으로 바라보았어요.
“추기경님, 바로 당신의 인장이 아주 예쁘게 찍혀 있네요?”
알현실 안의 모든 공기가 한순간에 멈춘 듯 정적에 휩싸였어요. 멜키오르와 함께 온 이단 심문관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지요. 그들 역시 자신들이 들고 온 증거가 오히려 자신들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는 단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에요.
“네, 네년이 감히 신성한 추기경을 모함하려 드는구나! 그것은 위조된 서류다! 가짜란 말이다!”
멜키오르는 핏대를 세우며 바들바들 떨었어요. 얼굴이 흙빛에서 붉은빛으로, 다시 잿빛으로 변하는 꼴이 여간 우스꽝스러운 게 아니었지요. 그는 평정심을 완전히 잃고 침을 튀기며 씩씩거렸답니다.
“우리가 가져온 증거가 진짜다! 네놈들이 더러운 마수를 숨겨두고 키우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단 말이다! 저 가냘픈 척하는 년의 뱃가죽을 갈라보면 마수의 기운이 흘러나올 것이다!”
그의 저열하고 잔인한 본성이 심문관들과 공작가 기사들, 그리고 뒤늦게 알현실 문가로 모여든 황실 참관인들 앞에서 고스란히 폭로되는 순간이었어요. 아멜리아는 목에 걸린 투명하고 붉은 핏빛 다이아몬드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답니다.
“추기경님, 저는 그저 몸이 약해 방 안에서 책을 읽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일 뿐인데…… 어찌 저를 이토록 모질게 핍박하시나요?”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아멜리아의 연기에, 카이든 공작의 광증이 마침내 임계점을 돌파했어요.
“멜키오르…… 감히 내 딸의 가죽을 가르겠다고 지껄였느냐?”
카이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무시무시한 마력이 알현실 벽면의 유리창들을 일제히 파킨, 하고 깨뜨렸어요. 렌 역시 살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멜키오르의 목덜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지요.
자신의 음모가 완벽하게 탄로 나고 무력으로도 압도당하자, 멜키오르는 공포와 분노로 눈이 뒤집히고 말았어요. 이성을 상실한 그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지듯 물러섰답니다.
“으, 으윽……! 닥쳐라! 에스카르디아의 괴수 놈들! 너희가 아무리 발뺌해도 저 검은안개 숲에서 풍기는 불길한 기운과 구역질 나는 역병의 악취는 속일 수 없다! 저 숲속에 네놈들이 숨겨둔 이단의 요람과 마수 무리가 있는 게 분명하다!”
멜키오르는 땀 범벅이 된 얼굴로 헐떡이며, 알현실 창밖으로 보이는 검푸른 숲을 가리켰어요. 그의 눈에 광기 어린 독기가 가득 찼지요.
“내 군사들에게 이미 명령을 내려두었다! 지금 이 순간, 신성청의 정예 흑마술 군사들이 저 불길한 검은안개 숲을 모조리 불태우고 짓밟기 위해 진격하고 있다! 저 숲속의 더러운 괴물 놈들과 함께 네놈들의 음모도 모조리 재더미로 만들어 주마!”
멜키오르의 광기 어린 폭탄선언에, 아멜리아의 투명한 눈동자가 순간 차갑게 가라앉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