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무장 가득 자욱하게 깔린 아침 안개를 뚫고, 일정한 금속성 마찰음과 규율 잡힌 발소리가 대지를 흔든다. 당신의 안목과 집념으로 개편된 조선 최초의 신식 보병 연대인 ‘건양위(建陽衛)’ 시범 부대다.
그들의 어깨에 얹힌 것은 구식 승자총통이나 명나라식 화승총이 아니다. 영지의 정밀 공방에서 수력식 강선삭반(旋腔削盤)을 밤낮으로 돌려 깎아낸 ‘선강보총(旋腔步銃)’이다. 총열 내부에 가파르게 새겨진 네 줄기 강선은 납탄에 자이로 효과에 의한 강력한 회전력을 부여하여, 백 보 밖의 버드나무 잎조차 꿰뚫는 가공할 정밀도를 자랑한다. 격발 방식 역시 번거로운 화승을 버리고, 스프링과 부싯돌을 맞물린 수석식(Flintlock) 자발화 장치를 채택하여 약실의 방수성과 급탄 속도를 혁신적으로 끌어올렸다.
"전방 백오십 보, 일제 사격 준비!"
훈련관의 호령에 힘입어 일렬로 늘어선 삼백 명의 사수들이 일제히 견착 자세를 취한다. 오위진법의 복잡한 깃발 신호 대신, 근대적인 분대와 소대 단위의 엄격한 구령에만 움직이는 이 기계적인 군상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압도적인 위압감을 풍긴다. 이윽고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자욱한 백색 화약 연기가 연무장을 덮친다. 백오십 보 너머 세워진 두꺼운 철갑 표적들이 종이장처럼 찢겨 나가자, 참관하던 무관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린다.
그러나 이 빛나는 기술적 쾌거 이면에는 조정의 가차 없는 정쟁의 칼날이 도사리고 있다.
"가장 위대한 도(道)는 성현의 의리에 있거늘, 대군께서 기괴한 쇠대포와 정체불명의 군대를 조직하여 충효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나이다!"
성균관 대사성을 필頭로 한 사림과 예조의 관료들은 연일 붉은 피로 쓴 상소문을 편전 바닥에 뿌리고 있다. 사대부의 나라인 조선에서 활과 칼이라는 전통의 무예를 버리고 한낱 흙먼지 구르는 신량(賤民)들에게 군권을 쥐여주었으며, 군호를 ‘연대’라는 기괴한 초헌법적 편제로 묶어 왕실을 위협하려 한다는 탄핵이다. 아들의 급성장을 시기 섞인 눈으로 지켜보던 선조 또한 이들의 상소를 빌미 삼아, 당신의 영지를 압수하고 신식 조총의 생산 설비를 조정의 통제 하에 두려는 음직임을 노골화하기 시작한다.
정치가 어지러운 틈을 타, 남방의 바다에서는 이미 전란의 피비린내가 피어오르고 있다. 동래부사와 경상우수사로부터 연달아 올라온 대마도의 흉흉한 첩보는 왜적의 수백 척 병선이 쓰시마 섬 동쪽 포구에 집결하고 있음을 단호하게 가리킨다. 조총의 화망을 앞세운 왜군의 침략은 이제 기정사실이다.
조정의 서슬 퍼런 감시 속에서 간신히 실전 능력을 완성한 당신의 신식 연대. 이 강철의 칼날은 어디를 향해 먼저 뽑혀야 하는가. 오만과 편견에 싸인 조정의 사대부들을 향해 힘을 증명할 것인가, 아니면 도래하는 전란의 파도를 맞닥뜨릴 준비를 가다듬을 것인가. 당신의 결단에 조선의 사직과 가쁜 숨을 몰아쉬는 역사적 기술 문명의 운명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