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편전의 뜰에 자욱하게 깔렸던 화약 연기는 걷혔으나, 부왕 선조의 안광에 서린 의구심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역사의 장막 뒤에서 기축옥사의 피바람을 일으키고, 왕권을 위협하는 싹이라면 친자식이라 해도 가차 없이 쳐냈던 군주다. 당신이 서양의 기술과 야금술을 바탕으로 개량한 신형 조총의 위력은 선조에게 있어 국방의 든든한 방패이기보다, 자신을 겨눌지도 모르는 비수가 될 수 있었다.

이 혹독한 정치적 겨울을 버텨내기 위해, 당신은 정면 돌파 대신 철저한 은인자중과 치밀한 정쟁의 기술을 택한다.

"소신이 바치는 기예와 학문은 모두 주상전하의 만수무강과 이 땅의 사직을 보존하기 위한 격물(格物)의 도리에 불과하옵니다."

당신은 몸을 낮추되, 조정의 저울추를 영리하게 움직인다. 붕당의 소용돌이 속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온건 개혁파, 서애 유성룡과 약포 정탁 같은 조정의 중신들을 은밀히 사저로 불러들인다. 그들에게 보여준 것은 단순한 화약 무기가 아니다. 구리와 철의 함량을 정밀하게 제어하여 대포의 수명을 늘리는 야금법, 그리고 수차와 지레를 이용해 무거운 광석을 손쉽게 채굴하는 기계 장치의 도면이었다.

성리학의 이치를 세상의 만물에 적용하려던 진보적 사대부들에게, 당신이 제시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실증은 가슴을 뛰게 만드는 신세계였다.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국고를 채울 수 있다면 도학의 명분도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이 그들의 마음에 싹트기 시작했다. 류성룡을 비롯한 동인 일파와 일부 온건 서인들까지 당신의 뒤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옹호 동맹을 형성했다. 편전에서 당신을 탄핵하려는 완고한 척신들의 상소가 올라올 때마다, 이들 진보 관료들은 "대군의 학문은 왕실의 기예를 일으켜 국방을 튼튼히 하려는 충심"이라며 방어막을 쳤다.

이제 의심 많던 선조의 눈빛에도 미약한 타협의 기색이 감돌기 시작한다. 대군의 비범한 재주를 완전히 억누르기에는 그 기술이 가져올 조선의 국부와 군사적 이익이 너무도 달콤했기 때문이다. 군신 간의 팽팽한 대치 속에서 마침내 침묵을 깨고 상소의 답을 내릴 적기가 찾아왔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정비된 명분과 관료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당신은 조선의 운명을 바꿀 거대한 쐐기를 박아야 한다. 선조의 의심을 영원히 불식시키고 당신의 구상을 합법적인 제도 위에 올려놓을 선택의 순간이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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