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무쇠의 폐가 뿜어내는 뜨거운 수증기는 이제 광산의 어두운 심연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당신은 피스톤의 직선운동을 원운동으로 변환하는 회전축과 크랭크, 그리고 거대한 무쇠 플라이휠을 결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조선 야금술과 목공예의 정밀함을 극한으로 쥐어짜 만든 이 회전력은 다축 방적기와 대형 제분기를 맹렬히 구동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노동력에만 의존하던 가내 수공업의 한계를 비웃듯, 수십 대의 물레가 단 한 대의 증기기관에 물려 쉴 새 없이 돌며 규격화된 고품질의 면사를 자아냅니다.

이 경이로운 광경을 보고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조선의 돈줄을 쥐고 흔드는 거상들이었습니다. 개성의 송상(松商)들과 한강의 경강상인(京江商人) 행수들이 야행을 틈타 당신의 영지로 숨어들었습니다. 사대부들이 '천한 기예'라 치부하던 무쇠 괴물 앞에서 그들은 장사꾼 특유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거대한 돈의 흐름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이들과 독점 공급 및 유통망 장악을 골자로 한 최초의 근대적 상업 밀약을 맺었습니다. 대군의 기술력과 거상들의 유통망이 결합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결과는 가히 천지를 뒤흔들 만했습니다. 삼남의 면화와 곡물이 당신의 영지로 모여들었고, 증기의 힘으로 가공된 면포와 가루가 전국의 장시를 쓸어내렸습니다. 왜관을 통해 유입된 일본의 은(銀) 궤짝과 삼남의 동전이 당신의 창고로 해일처럼 밀려들었습니다. 왕실의 호조(戶曹)를 거치지 않고, 일개 대군의 가문으로 조정의 일 년 세입에 육박하는 대자본이 직접 흘러 들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비정상적인 자본의 팽창을 한양의 조정이 모를 리 없었습니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날 선 정쟁을 벌이던 대신들은 일제히 말을 아끼며 당신의 영지를 주시하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보위에 대한 집착과 의심이 병적으로 강한 군주, 선조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습니다. 종친이 사사로이 막대한 군자(軍資)를 모으고 백성을 선동한다는 상소가 사헌부 장령들의 붓끝에서 만지작거려지고 있었습니다. 정적들의 도끼가 목전에 다가오는 형국, 당신은 이 막대한 금력을 바탕으로 다음 행보를 결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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