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험준한 산세로 가로막힌 미로 같은 골짜기, 삼척 도계의 흑색 대지 위에 탄식처럼 굵고 무거운 기계음이 메아리칩니다. 조정의 무능한 대간들이 한양의 대전에서 명분론을 일삼으며 이단(異端)의 학문을 성토하는 동안, 당신은 이곳 왕실 궁방전(宮房田)의 경계 안쪽에서 거대한 비밀 제국을 구축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웅장한 주응식 고로에서는 벌건 쇳물이 대지를 적시며 끊임없이 쏟아지고, 수차의 거대한 축과 피스톤이 맞물려 움직이는 기계 망치는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강철판을 두들깁니다. 이것은 단순한 야철지가 아닙니다. 석탄을 태워 고온을 얻는 제철 공정과, 증기 펌프를 통한 광산의 급수 통제가 유기적으로 결합한 조선 최초의 근대식 중공업 기지입니다.
당신은 사헌부와 의금부의 눈을 피하고자 이 거대한 시설들을 '왕실 공납용 광산 및 유민 구휼을 위한 농장'으로 은밀하게 위장했습니다. 영리하게도 종친의 면세 특권과 사유지 지배권을 백분 활용해, 조정의 관료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할 법적 방벽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검은 연기 속에서 진짜로 벼려지고 있는 것은 무쇠만이 아닙니다.
"전방 백오십 보, 표적 확인! 거총(擧銃)!"
교관의 묵직한 호령에 따라, 검은 가죽 가슴받이를 덧댄 신식 군복의 사병들이 일제히 화승총을 들어 올립니다. 그들의 손에 들린 무기는 왜적의 조총과는 궤를 달리하는 괴물입니다. 정밀 가공 선반을 이용해 총열 내부에 나선형 강선(螺旋溝)을 균일하게 파넣었고, 이로 인해 탄환은 공기의 저항을 이겨내고 회전하며 치명적인 선을 그립니다. 게다가 당신이 세밀하게 고안한 입자화 화약(Grain Powder)은 불연소율을 극도로 낮추어 사거리와 관통력을 기존 조총의 두 배 이상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방포(放砲)!"
쿠르릉! 대지를 흔드는 굉음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골짜기를 메웁니다. 백오십 보 바깥에 세워둔 두꺼운 두정갑과 철갑판들이 단 한 발의 오차도 없이 무참하게 뚫려 나갑니다. 기존 조선군의 사수들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조준 사격의 격차입니다.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유민들은 혹독한 근대식 훈련과 횡대 전술을 통해 철저히 통제되는 일격필살의 정예 사병, '신무위(神武衛)'로 재탄생해 있었습니다.
이 강력한 무력과 강철의 생산력은 이제 골짜기 안에만 가두어 두기에는 너무도 거대해졌습니다. 동래의 왜관에서 밀무역 상인들이 보내오는 첩보는 이미 왜적의 침략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명운이 풍전등화에 놓인 지금, 당신은 이 가공할 은밀한 힘을 세상의 중심을 향해 드러내야 할 결단의 순간에 직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