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매캐한 황과 초석의 탄내 속에서, 편전 앞마당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이십 장(丈) 밖에 세워두었던 변방 장수용 두터운 어린갑(魚鱗甲)은 참혹하게 찢겨 있었다. 고탄소강을 가공한 신형 조총의 탄환이 조선의 전통적인 철갑을 두부 자르듯 관통해 버린 흔적이다. 고로에서 흘러나온 선철을 초강법(炒鋼法)으로 정련하여 뽑아낸 고탄소 화승총의 신형 총열은 한 치의 균열도 없이 잔열을 뿜어내고 있다. 총열 내부에 미세하게 깎아 넣은 정밀한 나선형 강선(腔線)이 탄자에 강한 회전력을 부여하여, 비거리와 관통력을 극대화한 물리적 법칙의 결정체였다.

"이, 이것이 정녕 화승총 한 발의 위력이란 말인가……."

한 무신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중얼거린다. 그러나 그 경이로운 감탄은 이내 옥좌에 앉은 임금의 안색에 짓눌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선조의 눈빛에 떠오른 것은 치하가 아니었다. 그것은 본능적인 생존의 공포, 그리고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거대한 힘을 마주한 맹수의 살기였다. 방계승통이라는 태생적 콤플렉스와 왕권 수호에 사활을 걸어온 군주에게, 대군인 당신이 보여준 이 압도적인 무력과 장인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솔하는 지도력은 단순한 '재효(才效)'가 아니었다.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역모의 격문보다도 더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서인의 대신들은 눈치를 살피며 소매 속으로 손을 감추고, 동인의 영수 류성룡조차 이 무서운 권력의 기류 속에서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다. 화력의 혁신 뒤에 도사린 명백한 정쟁의 덫이 편전 뜰에 드리운다.

"대군."

선조가 천천히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하여 뼈를 시리게 만든다.

"이토록 천지를 뒤흔들 병기를 사사로이 기르고자 한 연유가 무엇이냐? 내 너에게 야금(冶金)을 허락한 적은 있으나, 국가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둔병(屯兵)의 힘을 쥐라 한 적은 없다. 네 정녕 이 가공할 철의 힘으로 무엇을 도모하려 하였느냐."

사방의 공기가 얼어붙는다.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역모의 굴레가 씌워져 도성 밖에서 사약을 마셔야 할 위기. 서늘한 가을바람이 조총의 화약 연기를 흩뜨리는 찰나, 당신은 선조의 예리하고 잔인한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