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의 심부는 칠흑 같은 어둠과 질척이는 지하수로 가득 차 있다. 등유 한 종지에 의지한 광부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죽 양동이로 물을 퍼 올리던 것은 이제 어제의 일이다.
당신, 선조의 넷째 아들이자 의창군인 이광은 강원도 금화의 탄광 한복판에 서 있다. 당신의 발치에는 조선의 야금 기술을 총동원해 주조해 낸 거대한 무쇠 실린더가 완강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실린더 내부에는 우도피(소 가죽)와 양의 기름을 짓이겨 다져 넣은 패킹이 피스톤을 완벽에 가깝게 밀착하고 있고, 그 위로 거대한 목제 밸런스 빔이 들치기처럼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지필(紙筆)이 아니라 쇠찌끼를 주무르는 군왕의 종친이라니." 멀찍이 서서 코를 찌르는 매연에 소매를 가리는 조정의 관료들, 사헌부 지평의 매서운 눈초리가 당신의 등에 박힌다. 그들의 눈에 비친 당신의 거동은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광증(狂症)에 불과할 터다.
"화덕에 불을 지펴라." 당신의 나직한 명령에 사군(私軍)으로 혹독하게 훈련받은 공장(工匠)들이 일제히 움직인다. 노(爐) 내부에서 석탄이 웅장한 불길을 뿜어내며 붉은 혀를 핥는다. 보일러 내부의 물이 끓어오르며 압력이 차오른다.
구리로 뽑가낸 도관이 뜨거운 증기를 실린더로 밀어 넣자, 육중 한 무쇠 막대가 마침내 신음하듯 서서히 솟구친다. 이윽고 응축기 밸브를 열어 찬물을 주입하는 순간, 콰아아— 하는 날카로운 파찰음과 함께 대기압이 피스톤을 아래로 사정없이 끌어내린다.
쿵! 쿵! 쿵! 대지를 흔드는 거대한 천둥소리가 광산 계곡을 뒤흔든다. 밸런스 빔의 반대편에 연결된 가죽 펌프가 지하 십여 장(丈) 아래에 고여 있던 흙탕물을 쉴 새 없이 뿜어내기 시작한다. 수십 명의 장정이 하루 종일 매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던 배수 작업이, 오직 쉼 없이 석탄을 삼키는 기계 한 대에 의해 단숨에 해결되는 순간이다.
"오오, 신물이로다! 신물이야!" 광부들이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 절을 올린다. 하지만 그 감격의 소리는 한순간에 끼어드는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묻힌다.
"대군 대감! 천지의 이치를 거스르는 요서(妖書)에 빠져 이토록 해괴망측한 사학(邪學)의 쇳덩이를 만드시다니요!" 사헌부 지평이 상소를 올리듯 서슬 푸르게 외친다. 뒤를 따르던 유학자 무리와 고관들이 앞다투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댄다. "대지의 맥을 찌르는 것도 모자라, 귀신이 통곡할 쇠귀(鐵鬼)를 들여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계십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 하였거늘, 이 사악한 기계는 천하의 이치를 무너뜨릴 징조이옵니다!"
수만 권의 경서에 갇힌 자들의 시선에는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노동의 고단함 대신 극복할 수 없는 기술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가 깃들어 있다.
이 경이로운 배수 기계의 가치는 이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광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 열쇠가 당신의 손끝에 쥐어져 있다. 하지만 저 보수적인 유신들의 반발을 꺾지 못한다면 이 무쇠 괴물은 단 하루 만에 도끼날에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당신은 석탄 연기 너머로 분노하는 대간들의 무리와, 기적처럼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번갈아 바라본다. 이 증기의 첫 박동을 조선 전체로 전파하기 위해, 당신은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