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화염이 사방의 어둠을 집어삼킬 듯이 포효한다. 한양 도성 서쪽, 깊숙한 계곡에 우뚝 솟은 거대한 가마. 그것은 당신이 현대 기계공학의 원리를 조선의 야금술에 접목하여 세운 주응식(코크스) 고로다.
조선의 전통적인 토법(土法) 사철 제련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었던 일천오백 도의 고온. 무연탄을 구워 불순물을 제거한 코크스를 연료로 삼고, 수차와 기어의 맞물림으로 작동하는 이중 복동식 풀무가 끊임없이 산소를 불어넣는다. 고로 하부의 슬래그 배출구 너머로 푸른 불꽃을 뿜으며 쏟아지는 쇳물은, 잡질이 극도로 제어된 고품질의 탄소강이다.
"평생 철을 두드렸으나, 이토록 맑고 고운 쇳물은 난생처음이옵니다!"
비밀리에 사저로 초빙한 군기시(軍器寺)의 야철 장인, 야장(冶匠) 배무선이 붉은 안광을 반사하며 경탄을 금치 못한다. 평생을 감(感)에 의존하던 이들에게 규격화된 강철의 탄생은 천지개벽과도 같은 상서로운 기적이다.
그러나 당신의 목적은 단순히 좋은 쇠를 얻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대량의 양질 탄소강을 얻은 즉시, 당신은 설계도대로 신형 병기들의 제작을 명령했다.
그 첫 번째 결실이 대장장이들의 손에서 들려 나온다. 겉보기에는 일반 조총과 다를 바 없어 보이나, 포신 내부에 정교한 나선형 홈—'강선(腔線)'을 판 화승총이다. 화약의 가스압이 탄환에 회전력을 부여해 탄도 안정성과 사거리를 혁명적으로 끌어올리는 구조다.
그 옆으로는 전통적인 편전(통아를 사용해 쏘는 가는 화살)의 발사 원리를 함축한 신형 개량 화포가 위용을 드러낸다. 고장력 강철로 주조된 두꺼운 약실은 화약의 폭발력을 온전히 견뎌내며, 수십 발의 철편과 편전을 단숨에 격발해 가공할 살상 지대를 형성하게끔 고안되었다.
드디어 시작된 비밀 사격 시연. 오십 보 너머에 겹쳐 세워둔 두꺼운 철제 어린갑(魚鱗甲) 두 장이 '땅-' 하는 고막을 찢는 파포음과 함께 허무하게 꿰뚫린다. 탄환은 갑옷을 관통하고도 뒤편의 흙더미에 깊숙이 박힌다. 이어 시연된 편전 화포의 산탄은 백 보 밖의 목판 무리를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분쇄해 버린다.
"이, 이것은 천벌을 내리는 신물(神物)이옵니다……!"
장인들이 차가운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부르르 떤다. 적의 조총병을 아득히 뛰어넘는 사거리와 명중률, 그리고 명나라의 어떠한 불랑기포보다 가볍고 강력한 화포. 왜란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참화를 막아낼 무쇠의 군대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차가운 금속음이 가라앉은 야철지에는 이제 무거운 정치적 현실이 드리운다. 군주인 선조는 재위 기간 내내 왕권을 위협하는 싹을 가차 없이 잘라내 온 의심 많은 정치가다. 넷째 왕자인 당신의 손에 쥐어진 이 가공할 철의 힘은, 조선을 구원할 칼날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당신의 목을 겨누는 역모의 올가미가 될 수도 있다.
야철고의 불꽃이 벽면을 붉게 물들이는 가운데, 당신은 이 강력한 병기들의 향방을 두고 깊은 고민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