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어스름한 새벽빛이 격자창의 한지를 푸르스름하게 물들인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 속에서 당신은 서서히 눈을 떠 창공을 바라본다. 손끝에 닿는 것은 거친 시멘트 바닥이 아닌, 극상의 부드러움을 자랑하는 주사(朱紗) 이부자리다. 코끝을 찌르는 낯선 백단향의 냄새와 사방을 둘러싼 목조 벽체. 당신이 혼란을 수습하기도 전에, 방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마마! 정신이 드시옵니까? 어의를 들라 하라!"

낯선 거울 속에 비친 것은 이제 겨우 소년의 티를 벗어던지기 시작한 앳된 얼굴이다. 기억의 파편들이 해일처럼 밀려와 가슴을 때린다. 당신은 선조 옹의 넷째 아들,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이 되었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기계공학도로서 증기터빈과 내연기관의 유체역학을 설계하던 당신의 지식이, 이 왕가의 육신과 기이하게 융합되어 요동치고 있다.

정신을 가다듬고 시대를 되짚어본다. 바야흐로 선조 24년, 신묘년(1591년). 파국은 코앞에 닥쳐 있었다.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이 일본에서 돌아와 왜적의 침략 가능성을 두고 조정에서 치열한 설전을 벌이던 바로 그 시기다. 군적은 썩어 들어갔고, 조선의 방어 전략인 제승방략(制勝方略)은 후방의 병력을 한곳에 모으다 각개격파당하기 딱 좋은 악수(惡手)에 불과했다. 이대로 1년이 흐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단련한 왜국의 정예병들이 조총의 포연을 앞세워 삼남을 짓밟고 이 도성을 피로 물들일 것이다.

수백만 백성의 목숨과 왕실의 존망이 눈앞에 일렁인다. 역사의 톱니바퀴는 이미 멈출 수 없이 돌아가고 있지만, 공학도의 이성을 장착한 당신에게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무기가 있다. 그것은 물질의 법칙을 지배하고 에너지를 전환하는 '기술'의 힘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미래의 기술을 쏟아낼 수는 없다. 조선의 가마는 철을 완전히 녹여내지 못하는 저온 제련 법에 머물러 있고, 황과 초석의 수급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물리적 한계와 경제적 토대를 고려하지 않은 혁신은 사상누각일 뿐이다. 조정을 장악한 사림들의 명분론과 서리들의 부패 속에서, 당신은 철저하게 현실적이고도 파괴적인 공학적 해결책을 제시해야만 한다.

"모두 물러가 있거라.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엄숙한 목소리로 시종들을 물리친 당신은 책상 앞에 서서 서늘한 먹을 간다. 붓끝을 쥐자 손가락 마디마디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다가올 난세를 평정하고, 나아가 이 연약한 반도 국가를 천하의 패권국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대담한 서막을 열 때다.

당신의 시선이 가평 한지 위에 머문다. 첫걸음은 가장 확실하면서도 치명적이어야 한다. 당신은 서서히 드러나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조선의 명운을 바꿀 설계를 구상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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