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임진년의 봄, 남해를 가득 메웠던 촉풍(蜀風)의 적선들은 단 하루 만에 재가 되어 침몰했다.

풍향을 무시하고 검은 석탄 연기를 뿜어내며 침로를 꺾는 증기 철갑선 '진해(鎭海)'호의 현측에서 뿜어져 나온 32파운드 중포의 가공할 함포 사격은 왜의 세키부네들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겼다. 바다를 붉게 물들인 불길은 육지로 이어졌다. 조총의 사거리를 가볍게 압도하는 탄조 격발식 강선 소총을 손에 쥔 정규식 연대는 가토 기요마사가 자랑하던 구마모토의 정예 용사들이 돌격하기도 전에 삼백 보 밖에서 숨통을 끊어놓았다. 무연화약의 폭음이 천지를 뒤흔들 때마다, 적들의 시신은 야산처럼 쌓였다. 역사가 기록한 미증유의 국난은 당신이 구축한 철과 불의 과학 앞에서 그저 일방적인 가축 도살에 불과한 참극으로 종결되었다.

전쟁은 반 년 만에 왜국 간동(關東) 세력의 무조건 항복으로 무참히 끝났다. 백성들은 피를 흘리지 않고 나라를 구한 당신을 '신인(神人)'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유학자들이 목을 놓아 외치던 도덕 수양의 허울은, 적들의 목을 꺾고 나라를 보전한 강철의 실증(實證) 앞에서 연기처럼 흩어졌다. 무능한 선조는 분노와 공포 속에서 몰락해 가던 가문의 종묘사직을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백성과 군대가 전 일류의 대군을 연호하며 대궐 문을 가로막았던 그 날, 선조는 끝내 어보를 들어 당신에게 양위를 선언했다.

황금빛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보위에 오른 당신이 내려다본 한양의 풍경은 수백 년의 정체를 깨부수고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경복궁 근정전 뒤편, 일찍이 왕실의 사냥터였던 서강 나루터에는 거대한 연돌들이 숲을 이루어 하늘을 찌르고 있다. 당신이 고안한 고압 실린더와 보일러의 증기압을 견디기 위해 용광로에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온 고탄소강 강판들이 선박의 늑골이 되고, 철도를 달릴 기관차의 바퀴가 되어 웅장한 연주곡을 연주한다. 대포와 소총을 만들던 군기시의 용광로는 이제 천하를 이을 철로를 달구고 있다. 유교적 사농공상의 질서는 완전히 해체되었으며, 기계의 원리를 깨친 기술 장인들이 붉은 관복을 입고 조정의 정당한 녹을 받으며 국책을 논한다.

"소국이 대국의 순리를 거스른다며 겁박하던 명(明)의 사신단이 요동 요해처에서 아국의 증기 전차 철갑 기병대를 목도하고는 사색이 되어 물러갔사옵니다. 사신은 이제 황제를 폐하(陛下)라 부르며 칭신(稱臣)을 준비하고 있사옵니다."

도승지의 격앙된 상소가 조정을 가득 채우자, 사조룡이 그려진 장엄한 곤룡포를 입은 당신이 천천히 용상에서 몸을 일으킨다. 당신의 안광에는 시대를 고리타분하게 규정하던 동아시아의 낡은 천하관을 완전히 부수고, 대륙과 해양을 동시에 짓밟을 제국의 청사진이 정교하게 각인되어 있다.

창밖으로 우렁찬 증기적 소리가 도도한 천둥처럼 군정에 울려 퍼진다. 가마솥의 끓는 물로 대지를 흔들고, 무쇠의 뼈대로 세계의 패권을 움켜쥔 나라. 바야흐로 동방의 잠자는 호랑이가 아닌, 불타는 철혈의 대조선 제국이 그 장대한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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