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메스에 묻은 피는 네 아내의 것이고, 메스 손잡이에 남은 지문은…… 100% 네놈의 것이다."
붉은빛이 깜빡이는 서부경찰서 제3취조실의 정적 속에서, 강민우 검사의 목소리가 차갑게 벼려진 칼날처럼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가 내민 소형 태블릿 화면 속에는 선명한 선홍색 혈흔과 그 위를 짓누른 지문 문양이 기괴한 대조를 이루며 빛나고 있었다.
어스름한 서광조차 차단된 밀실의 공기는 평소보다 몇 도는 더 내려간 듯 서늘했다. 쇠붙이 냄새와 오래된 방음재의 퀴퀴한 습기가 코끝을 찔렀다.
태신의 시선이 화면 속 지문에 고정되었다.
지문의 융선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처럼 그의 눈동자에 각인되었다. 과잉기억 증후군을 앓아온 태신의 뇌는 원하지 않아도 눈앞의 시각 정보를 강박적으로 픽셀 단위까지 분해하여 저장하기 시작했다. 화면의 밝기는 250니트, 이미지의 해상도는 최소 4K 이상. 그 고해상도 이미지 속 지문은 너무나도 정교하고 깨끗했다.
"자, 네 그 잘난 '기억 장부'로 이것도 연산해 보시지."
강민우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입술 끝이 비틀려 올라가며 가학적인 희열을 그려냈다. 그의 숨결에서 풍기는 들이켠 지 얼마 안 된 에스프레소의 쓴 향이 태신의 얼굴로 흩어졌다.
"과연 네가 정말로 아내를 죽이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네 잃어버린 4시간의 기억 속에 진실이 숨겨져 있다면 말이야."
태신의 손가락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뇌가 급격한 과부하를 일으키며 척수를 타고 내리꽂는 물리적인 거부 반응이었다. 머릿속 깊은 곳, 전두엽의 한 구석이 찌르는 듯한 고통과 함께 요동쳤다.
기억의 공백. 아내가 죽어가던 그날 밤의 4시간은 칠흑 같은 암흑으로 덮여 있었다. 그 암흑의 장막 너머에서, 정말로 자신이 저 피 묻은 메스를 쥐고 사랑하는 연희의 목을 그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의 불씨가 아주 찰나 동안 뇌리를 스쳤다.
"왜, 말이 없나? 하태신 프로파일러님."
임철주 형사가 가죽 재킷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낡은 가죽 냄새가 취조실의 냉소적인 공기를 흐트러뜨렸다.
"매사 기고만장하더니, 자기 지문을 보니까 이제야 실감이 나나 보지? 네 놈이 사이코패스처럼 연희 씨를 베어 넘길 때의 그 감각이?"
태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감정이 결여된 서늘한 눈빛으로 태블릿 화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무수한 수치들이 소용돌이치며 정렬되고 있었다.
'기억 장부(Memory Ledger)'가 가동을 준비하며 신경망을 자극했다. 상대의 호흡, 맥박, 동공의 떨림을 계량화하여 최적의 반격 경로를 찾아내는 초감각적 연산.
하지만 그 장부를 완전히 개방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무엇인지 태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매서운 한기가 뇌세포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연희와의 소중한 기억들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미 방금 전 연희의 손편지에 대한 기억이 지워졌다. 다음은 무엇을 잃게 될 것인가.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릴 것 같은 상실의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러나 태신의 입술은 단단히 다물어져 있었다. 진범을 지옥으로 보낼 수만 있다면, 설령 마지막 순간에 연희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껍데기가 된다 해도 상관없었다.
태신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화면을 좀 더 확대해 보십시오, 강 검사님."
"뭐?"
강민우의 눈썹이 꿈틀했다.
"확대하라고 했습니다. 지문이 찍힌 메스 손잡이의 경계면, 그리고 날과 손잡이가 연결되는 볼스터(Bolster) 부분을 300% 이상으로."
태신의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차분했고, 그 저음의 울림은 취조실 벽면의 방음재에 흡수되며 서늘한 긴장감을 더했다.
강민우는 헛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화면을 넓혔다.
"발악을 하는군. 그래, 어디 볼 테면 봐라. 네놈의 유죄가 더 선명해질 뿐이니까."
화면이 확대되자, 피 묻은 메스의 거친 금속 표면과 지문의 골짜기가 모니터 전면에 가득 찼다.
태신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뇌 속의 장부를 강제로 개방했다.
쩍, 하는 환청과 함께 머릿속이 하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전두엽을 관통하는 지독한 고열이 신경을 지졌다. 하얀 안개 너머로, 어떤 풍경이 빠른 속도로 바래져 갔다.
그것은 연희와 함께했던 결혼식 날의 기억이었다.
엄숙한 예식장이 아니라, 피로연이 끝난 뒤 둘만의 작은 아파트 거실에서 추었던 서툰 왈츠. 연희의 하얀 드레스 자락이 사뿐히 흔들리던 모습, 귓가에 닿았던 그녀의 따뜻한 숨결, "태신 씨, 발 좀 밟아도 봐줄게요"라며 장난스럽게 웃던 그 아름다운 목소리.
그녀의 웃음소리가 고열의 불길 속에서 재가 되어 흩어졌다.
연희의 얼굴이 뭉개지고, 그녀가 입었던 드레스의 색상이 무엇이었는지, 그날 어떤 음악이 흘렀는지 더는 기억나지 않았다. 가슴을 짓누르는 지독한 공허함이 강산처럼 뼈를 깎아내렸지만, 태신은 눈을 뜨며 그 고통을 분노의 연료로 삼았다.
대가는 지불되었다. 연산은 완벽해졌다.
태신이 눈을 뜨자, 그의 동공은 이전에 본 적 없을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수술용 메스 No.11. 탄소강 재질. 날 길이 4센티미터, 손잡이 포함 총 길이 14센티미터. 전형적인 외과용 메스군요."
태신의 입에서 건조한 수치들이 흘러나왔다.
"강 검사님. 당신은 이 메스가 내가 연희의 목을 그은 진짜 흉기라고 주장했습니다. 맞습니까?"
"그래. 국과수 분석 결과도 그렇게 나왔지."
"그렇다면 이 사진 속에는 존재해서는 안 될 치명적인 '물리적 모순'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태신이 손가락을 뻗어 태블릿 화면의 특정 지점을 가리켰다. 메스 날의 반대편 측면, 즉 지문이 찍힌 반대쪽 금속 표면이었다.
"메스의 손잡이에 남은 내 지문은 지나치게 깨끗합니다. 마치 도장을 찍듯 수직으로 정확하게 압력이 가해진 형태지. 하지만 연희의 목에 남은 창상은 심장 쪽으로 30도 하향 곡선을 그리며 베여 들어갔습니다. 경동맥을 절단하기 위해서는 최소 15킬로그램중(kgf) 이상의 악력과 마찰력이 필요합니다."
태신이 강민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강민우의 동공이 미세하게 축소되는 것이 보였다.
"흉기를 쥐고 그 정도의 강한 힘으로 인체를 그었다면, 손잡이에 남은 지문은 마찰력에 의해 반드시 뭉개지거나 흐려지는 '쓸림 흔적(Smudge)'이 남아야 합니다. 손가락이 미끄러지면서 지문의 융선이 가로로 늘어나야 정상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지문은 어떻습니까?"
임철주 형사가 침을 꿀꺽 삼키며 화면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태신의 말대로였다. 지문은 마치 평평한 종이 위에 지장을 찍은 것처럼 너무나도 균일하고 정교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이건 살인 행위 중에 찍힌 지문이 아닙니다."
태신의 목소리가 취조실의 차가운 철제 테이블 위를 굴러다녔다.
"내가 약물이나 타격에 의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을 때, 누군가 내 손가락을 강제로 쥐어 메스 손잡이에 '찍은' 겁니다. 그 증거가 바로 지문의 압력 분포도입니다. 지문의 중심부 압력은 1.1킬로그램중에 불과합니다. 의식을 잃은 사람의 손을 가져다 댈 때 발생하는 전형적인 접촉압이죠."
"헛소리!"
강민우가 태블릿을 거칠게 회수하며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건 네 놈의 자의적인 해석일 뿐이야! 법정에서는 아무런 효력도 없는 망상에 불과하다고!"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강 검사님."
태신이 상체를 조금 더 앞으로 숙였다. 그의 서늘한 눈빛이 강민우의 목덜미를 조여왔다.
"더 결정적인 오류는 메스 날의 반대편 측면에 있습니다. 확대된 화면의 1시 방향, 메스 볼스터 바로 아래를 보십시오. 폭 0.2밀리미터, 길이 1.5밀리미터의 미세한 백색 섬유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까?"
강민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한 꺼풀 벗겨졌다.
"그 흔적은 방진 장갑의 특수 직조 패턴입니다. 특수 클린룸이나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폴리에스테르 연속 필라멘트 섬유지요. 누군가 방진 장갑을 낀 손으로 이 메스를 다루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만약 내가 맨손으로 이 메스를 쥐고 아내를 죽였다면, 왜 흉기 표면에 방진 장갑의 섬유가 묻어 있습니까?"
"그, 그건 현장 감식 과정에서 묻은 것일 수도……."
임철주 형사가 말을 흐렸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25년 차 베테랑 형사의 직관이 속삭이고 있었다. 하태신의 말이 맞다. 이것은 조작된 증거였다.
"아니요, 감식반의 장갑은 라텍스 재질입니다. 저 섬유 패턴과는 전혀 달라요."
태신이 강민우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놓치지 않고 쏘아붙였다.
"그리고 그 방진 장갑에서 떨어진 미세한 라텍스 파우더 성분…… 그날 밤, 연희의 서재에 직접 들어갔던 침입자의 흔적입니다. 강 검사님, 당신이 직접 현장을 훼손하고 이 가짜 흉기를 심어두는 과정에서 발생한 설계 오류라는 뜻입니다."
"하태신!"
강민우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요란한 쇠소리를 냈다. 그의 호흡은 분당 30회 이상으로 가빠져 있었고, 이마에는 핏대가 서 있었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시나리오가, 자신이 준비한 가장 강력한 카드가 오히려 자신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네놈이 감히 검사를 모독해? 이따위 억지 논리로 기소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넌 살인마야! 네 아내를 죽인 미친 사이코패스라고!"
강민우의 가학적인 여유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폭로당한 범죄자의 단말마처럼 찢어져 있었다.
태신은 가만히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분노도, 슬픔도 없었다. 오로지 먹잇감을 한계까지 몰아붙인 포식자의 서늘한 응시만이 있을 뿐이었다.
"흔들리는 군요, 강 검사님. 맥박수가 분당 110회까지 올라갔습니다. 거짓말을 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신체 반응입니다."
취조실 안의 공기는 완전히 역전되어 있었다.
철저하게 갇혀 있던 피의자가, 자신을 기소하려던 엘리트 검사의 오만한 설계를 수수께끼 풀듯 붕괴시키고 있었다. 취조실이라는 밀실 기하학은 이제 하태신의 지배 하에 놓여 있었다.
임철주 형사는 멍하니 강민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경악과 함께 깊은 의구심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강 검사……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저 섬유 흔적, 정말로 보고서에 빠져 있던 건가? 나한테는 이런 얘기 없었잖아!"
"시끄러워, 임 형사!"
강민우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그의 이성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비명이었다.
"이 취조는 무효다. 피의자의 궤변과 음모론에 휘둘릴 시간 없어. 하태신, 네놈의 그 잘난 주장은 법정에서 판사 앞에서나 지껄여라."
강민우는 떨리는 손으로 태블릿의 전원을 꺼버렸다. 그리고 벽면에 설치된 외부 송출용 모니터와 전광판의 스위치를 강제로 내렸다.
스르륵, 하며 취조실을 밝히던 전광판의 하얀 불빛이 꺼지고, 오직 붉은색 비상등만이 두 사람의 얼굴을 어둡게 비추었다. 명도가 급격히 낮아진 밀실은 마치 피로 물든 어둠의 심연처럼 변했다.
"오늘 조사는 여기까지입니다. 임 형사, 피의자를 유치장으로 이송해."
강민우가 차가운 얼굴로 자켓을 챙겨 입으며 취조실 문으로 걸어갔다. 일방적인 퇴장이었다. 자신의 치부가 더 드러나기 전에 전장을 탈출하려는 비겁한 패주의 뒷모습이었다.
태신은 그 뒷모습을 응시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피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강 검사님. 당신들이 숨기려 하는 백야 재단의 실체는 이미 내 장부에 기록되기 시작했으니까."
강민우의 발걸음이 문틀 앞에서 굳어졌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태신은 어둠 속에서도 똑똑히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