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비상등이 제3취조실의 회색 벽면을 기괴하게 물들였다. 환풍구가 차단되며 공기는 순식간에 탁해졌고, 쇠붙이가 타들어 가는 듯한 매캐한 냄새가 좁은 밀실을 채웠다. 일방향 거울 너머에서 들리던 미세한 기계음이 뚝 끊기더니, 이윽고 거울 측면의 철제 문이 거칠게 열렸다.
스피커폰을 켠 채 대기하던 백야 재단의 대리인, 강민우 검사가 비틀거리며 취조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의 잘 닦인 구두 굽이 붉은 불빛에 젖은 바닥을 밟으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늘 정갈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 위로 흘러내려 있었고, 빳빳하게 풀이 죽은 와이셔츠 깃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이게…… 무슨 미친 짓거리야!"
강민우가 목을 긁는 듯한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그의 시선은 하태신을 향해 있지 않았다. 하태신의 맞은편, 화상 흉터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작고 투명한 유리병을 들고 있는 괴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괴한의 손가락 끝에 새겨진 격자형 흉터가 비상등의 붉은 파동을 받아 마치 살아 움직이는 붉은 벌레처럼 움틀거렸다.
하태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동공은 차갑게 가라앉은 채, 강민우의 불규칙한 호흡과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을 정밀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호흡 주기 1.2초. 평소보다 두 배 이상 가파르다. 우측 관자놀이의 미세혈관이 초당 3회 주기로 박동 중. 극도의 공포와 당혹감이 자아낸 전형적인 자율신경계의 오작동이다.
머릿속에서 '기억 장부(Memory Ledger)'가 무겁게 구동되기 시작했다. 전두엽 깊은 곳에서부터 벼락이 치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뻗어 나왔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뜨거운 감각은 뇌세포가 연소하고 있다는 명확한 신호였다.
그와 동시에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 나갔다. 아내 한연희와 함께 거닐었던 어느 가을날의 기억, 손가락 사이로 스쳐 지나가던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촉감과 낙엽 타는 냄새가 머릿속에서 하얗게 탈색되어 사라졌다. 지워진 기억의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과 수치화된 데이터뿐이었다.
태신은 고통을 내색하지 않은 채, 피가 배어 나오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강민우를 응시했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강 검사님."
태신의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평온했다. 공기가 희박해져 가는 밀실 안에서 그의 음성은 오히려 서늘한 냉기를 뿜어냈다.
"당신이 놀란 이유는 이 방이 폐쇄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 남자의 손에 들린 유리병,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진짜 성분'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 당신들이 쌓아 올린 견고한 성벽이 무너질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겠지요."
강민우는 비틀거리며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그의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닥쳐, 하태신. 저 미친놈이 들고 있는 건 그냥 정체불명의 화학 물질일 뿐이야. 네놈이 아무리 소설을 써봤자, 네 아내를 죽인 범인은 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대검찰청 과학수사부에서 정식으로 감정한 알리바이 파괴 물증이 여기 있어!"
강민우가 떨리는 손으로 품 안에서 가죽 서류철을 꺼내 책상 위로 팽개치듯 던졌다. 서류철이 붉은 조명 아래에서 둔탁한 소리를 내며 슬라이딩했다.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몇 장의 출력물이었다.
"사건 당일 밤 11시 20분. 네놈의 차량 이동 경로가 고스란히 기록된 GPS 로그와 외곽 순환도로 톨게이트 CCTV 캡처본이다. 네놈은 그 시간에 병원에 있었다고 주장했지? 하지만 네 차는 정확히 한연희의 사저로 향하는 진입로에 있었다. 이 움직일 수 없는 물증 앞에서 네놈의 허술한 도망극도 끝이다."
임철주 형사가 구석에서 이를 갈며 태신을 노려보았다. 그는 이미 강민우의 기세에 눌린 듯하면서도, 태신을 향한 적개심만큼은 꺾지 않은 상태였다.
태신은 슬며시 고개를 숙여 책상 위의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기억 장부의 연산 장치가 서류 위의 텍스트와 이미지를 잘게 쪼개어 분석했다.
[물증 분석: 외곽 순환도로 CCTV 캡처본] - 해상도: 1080p 변환본. - 노이즈 패턴: 가우시안 블러(Gaussian Blur)가 인위적으로 적용됨. 차량 번호판 주변의 픽셀 밀도가 주변 인접 구역보다 12% 낮음. - 광원 분석: 가로등의 조사 각도와 차량 보닛에 반사된 하이라이트의 각도 불일치. 반사각 42도, 실제 가로등 위치 기준 계산각 35도. 오차 범위 초과. - 결론: 이미지 합성 및 데이터 조작률 94.2%.
태신의 입꼬리가 기괴할 정도로 매끄럽게 올라갔다. 감정이 거제된 얼굴에 피어오른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강 검사님, 대검 과학수사부의 이름을 더럽히는 짓은 그만두시는 게 좋습니다."
"뭐라고?"
"이 CCTV 사진의 보닛 부분을 보십시오. 차량에 반사된 가로등 불빛의 각도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사건 당일 밤에는 이슬비가 내려 도로가 젖어 있었고, 그로 인해 빛의 산란이 발생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사진 속의 도로는 완전히 건조한 상태군요. 게다가……."
태신이 서류 한 장을 손가락 끝으로 튕겼다.
"이 GPS 기록의 해시값을 분석해 볼까요? 당신들이 제출한 이 데이터의 생성 일자는 어제 오후 4시로 되어 있군요. 사건 발생일로부터 사흘이나 지난 시점에, 경찰청 메인 서버가 아닌 외부 사설 IP를 통해 수정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서은하 씨."
태신이 귀에 꽂힌 미세 수신기를 향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 "오케이, 대기 중이었어. 오빠."
취조실 벽면에 매립된 소형 스피커에서 치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서은하의 까칠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민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너, 이게 무슨……! 내부 보안망을 해킹한 건가?"
"해킹이 아니라 정당한 권한의 회수입니다."
서은하의 타자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 "서부경찰서 기록 보관소 서버에 접속 완료. 강민우 검사님이 방금 제시한 가짜 GPS 로그의 원본 데이터 패킷을 찾았어요. 원본에서는 하태신 씨의 차량이 당일 밤 11시 20분에 병원 지하 주차장에 그대로 주차되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네요. 누군가 중간에 패킷을 가로채서 좌표값을 조작하고, 그걸 정식 수사 기록으로 둔갑시킨 거예요. 조작을 실행한 계정의 IP 주소는…… 어라?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 검사실이네?"
"이, 이년이 감히……! 당장 추적해! 이 해커 년 당장 체포하라고!"
강민우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지만, 취조실 문은 굳게 닫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붉은 비상등 아래에서 그의 고함은 고립된 밀실의 벽에 부딪혀 무력하게 되돌아올 뿐이었다.
태신은 차가운 시선으로 강민우가 무너지는 과정을 관조했다. 그의 기억 장부는 이미 한 단계 더 깊은 진실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제 화학적 모순을 짚어볼 차례입니다."
태신이 괴한의 손에 들린 유리병을 가리켰다.
"제 아내 한연희의 사인은 인슐린 과다 투여로 인한 저혈당 쇼크사였습니다. 경찰의 공식 발표였죠. 그리고 당신들은 현장에서 발견된 주사기에서 아내의 지문과 인슐린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점을 들어 자살 혹은 제가 강제로 투여한 타살로 몰아갔습니다."
태신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서은하 씨가 현장 채증 사진을 포렌식 분석한 결과, 주사기 바늘 끝에 남은 미량의 잔여물 성분은 인슐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메톡세타민'과 고농도의 '티오펜탈 나트륨'의 혼합물이었습니다. 마취 및 기억 상실을 유도하는 백야 재단의 특허 약물이죠."
강민우의 호흡이 완전히 무너졌다. 그는 뒷걸음질 치다 의자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그게 무슨 상관이야! 부검의가 서명한 공식 부검 감정서가 있어! 사인은 분명히……."
"그 부검의의 계좌로 이틀 전 백야 재단 산하의 문화재단에서 3억 원의 후원금이 송금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태신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사망 시간 역시 조작되었습니다. 당신들은 제가 아내를 구하려다 약물에 취해 쓰러져 있던 그 4시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아내의 사망 시간을 인위적으로 뒤로 미루었습니다. 시반과 시강의 진행 상태를 기록한 온도 센서 데이터를 조작해서 말입니다."
"증거 있어? 그딴 건 다 심증일 뿐이야!"
강민우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증거요?"
태신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서부경찰서 내부 시스템에 등록된 수사 보고서의 타임라인 누수를 이미 언론사 제보망에 업로드해 두었습니다. 당신들이 위조한 알리바이 타임라인과, 실제 교통 관제 시스템에 기록된 도로 통제 시간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물리적 증거와 함께 말입니다. 이 취조실 문이 열리는 순간, 대한민국 모든 언론사에 '검찰의 살인 사건 증거 조작'이라는 타이틀로 속보가 송출될 겁니다."
강민우의 무릎이 꺾였다. 그는 더 이상 엘리트 검사의 오만한 기세를 유지하지 못했다. 붉은 비상등 불빛 아래에서, 그의 얼굴은 마치 피를 흘리는 것처럼 붉게 물든 채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하태신…… 네놈이 정녕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강민우가 이빨을 갈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벼랑 끝에 몰린 짐승의 악독함이 묻어났다.
취조실 안의 온도는 어느새 30도를 웃돌고 있었다. 숨이 막힐 듯한 더위 속에서 태신의 이마에서도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뇌가 타들어 가는 고통이 다시 한번 온몸을 엄습했다.
또 하나의 기억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결혼기념일에 연희가 수줍게 건네던 손편지의 내용이, 그녀의 필체가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져 흰 종이로 변해버렸다.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상실감이 몰려왔지만, 태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영혼마저도 기꺼이 불태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끝났습니다, 강 검사님. 당신들의 정교한 함정은 오히려 스스로를 묶는 올가미가 되었습니다."
태신이 한 걸음 다가서며 강민우를 내려다보았다. 그 압도적인 위압감에 강민우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정적이 취조실을 지배했다. 붉은 표시등만이 규칙적으로 깜빡이며 파멸의 카운트다운을 알리는 듯했다.
그때였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강민우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흐…… 흐흐흐…… 하하하하!"
강민우는 광기에 찬 눈빛으로 태신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오른손이 천천히 바지 안주머니로 향했다.
"과연 그럴까, 하태신? 네놈이 아무리 영리하게 굴어도, 결국은 인간일 뿐이야. 네놈이 결코 지울 수 없는 '진짜 물리적 증거'가 아직 남아 있거든."
강민우가 주머니에서 소형 암호화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빠르게 화면을 탭하자, 이윽고 한 장의 고해상도 사진이 화면에 떠올랐다.
그것은 아내 한연희의 시신 옆에 떨어져 있던, 피로 물든 수술용 메스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메스의 손잡이 부분에는 붉은 혈흔 위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찍힌 지문의 확대 컷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 메스에 묻은 피는 네 아내의 것이고, 메스 손잡이에 남은 지문은…… 100% 네놈의 것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원본 데이터베이스에 직접 등록된, 그 어떤 조작도 불가능한 물리적 실체지."
강민우가 조소를 머금은 채 태신의 코앞으로 태블릿 화면을 들이밀었다.
"이건 네가 쓰러지기 직전, 네 손으로 직접 아내의 목을 그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자, 네 그 잘난 '기억 장부'로 이것도 연산해 보시지. 과연 네가 정말로 아내를 죽이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네 잃어버린 4시간의 기억 속에 진실이 숨겨져 있다면 말이야."
태신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화면 속의 지문은 의심할 여지 없이 자신의 것이었다. 머릿속의 전두엽이 극심한 거부 반응을 일으키며 뜨겁게 요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