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비상등이 깨진 콘크리트 바닥 위로 피처럼 고였다.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찔렀고, 무너진 철골 더미 사이로 찌르르하는 고압 전선의 스파크 소리가 간헐적으로 고막을 긁었다. 사선의 중심, 그곳에 회색 수트를 입은 강민우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구경 .38 권총의 은빛 총구가 내 미마를 정확히 겨누었다.
"대단해, 하태신."
강민우의 목소리는 비정상적으로 차분했다. 살의가 가득 찬 그의 눈동자는 붉은 조명을 받아 기괴하게 번들거렸다.
"이 정도의 덫마저 부수고 나올 줄은 몰랐어. 하지만 여기까지다. 네 장난감 같은 기억 놀이도, 이 지옥 같은 창고 안에서 나와 함께 끝나는 거야."
나는 휠체어의 가죽 시트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차가운 감촉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심박수가 분당 98회로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뇌는 오히려 극도로 투명해졌다. 시선은 강민우의 얼굴을 지나, 그의 오른쪽 손목으로 향했다.
그의 회색 수트 소매는 아비규환의 폭발 속에서 찢겨 나가 있었다. 미세하게 드러난 흰 와이셔츠 자락 아래, 단단하게 긴장한 전완근 피부가 보였다. 그 피부 위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흔적.
유리에 긁혀 살점이 뜯겨 나갔다가 엉성하게 아문, 격자형의 흉터 자국이었다.
머릿속에서 9화의 기억 장부가 강제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아내 한연희가 차디찬 바닥에 누워 있던 우리 집 안방. 깨진 테라스 유리문. 바닥에 흩뿌려진 강화유리 파편의 비산 각도는 바깥에서 안쪽으로 가해진 물리적 충격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유리 파편의 궤적을 뚫고 들어온 범인의 신체 부위.
"그 오른팔."
갈라진 목소리가 매연 사이로 흘러나왔다. 강민우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그의 검지가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의 압력인 1.8킬로그램 수준에서 멈춰 섰다.
"아주 정교한 격자무늬더군. 강화유리가 프레임째 깨질 때, 파편을 피하지 못하고 오른쪽 팔뚝을 통째로 긁힌 흔적이야. 그렇지?"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죽기 전에 유언이라도 연습하나?"
강민우가 조롱하듯 콧방귀를 꼈지만, 그의 오른쪽 전완근의 미세 근육들이 초당 4회 속도로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거짓을 마주했을 때 나타나는 자율신경계의 배신이다.
"연희를 쏠 때, 너는 오른손잡이임에도 불구하고 왼손으로 권총을 지탱했어. 아니, 지탱할 수밖에 없었겠지. 오른팔은 깨진 유리에 깊숙이 찢겨 근육이 파열된 상태였으니까."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휠체어 바퀴를 천천히 굴려 그에게 다가갔다. 사선이 좁혀질수록 물리적 위험은 커지지만, 심리적 압박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날 밤, 네가 연희의 심장을 쏘기 위해 격발 신호를 보냈던 그 순간. 감염을 막기 위해 급하게 바른 항생제 연고 냄새가 현장에 미세하게 남았지. 그리고 지금, 네 찢어진 소매 사이로 보이는 그 흉터의 형태와 크기는 연희의 시신 옆에서 수거된 유리 파편에 묻어 있던 피부 조직의 DNA와 정확히 일치할 거다. 국과수에 보관된 무연고 데이터로 분류되어 있던 그 혈흔 말이야."
"태신아, 이 미친 새끼가 진짜……!"
강민우의 목소리에서 여유가 완전히 씻겨 내려갔다. 그의 눈이 핏발로 붉게 물들었다.
옆에 서 있던 임철주 형사가 권총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강민우를 쏘아보았다.
"강 검사. 저 흉터…… 네가 그날 밤 현장에 있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야. 네놈이 직접 연희 씨를 지옥으로 보낸 장본인이었어?"
"시끄러워! 이 쓰레기 같은 형사 놈이 어디서 감히 기어올라!"
강민우가 소리를 지르며 총구를 임철주에게 돌리려 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나는 내 전두엽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기억 장부'를 강제로 개방했다. 머릿속에서 퍼런 불꽃이 튀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발생했다. 뇌세포가 순식간에 재가 되어 타들어 가는 감각 속에서, 취조실의 밀실 기하학이 이 무너진 창고 안으로 입체적으로 투사되었다.
강민우의 동공 진동수: 8Hz. 손가락의 압력 변화: 2.5kg에서 3.2kg로 급증. 총구의 조준선 편각: 왼쪽으로 0.8도, 아래로 1.2도 치우침. 바닥의 콘크리트 낙차: 좌측 3센티미터 경사.
'그가 쏠 위치는 임철주가 아니다. 나다.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가장 위협적인 대상을 먼저 제거하려는 가학적 본능.'
"철주 씨, 숙여!"
내가 외침과 동시에 강민우의 검지가 방아쇠를 완전히 인장했다.
탕-!
고막을 찢는 격발음이 창고 안을 울렸다. 하지만 총탄은 내가 있는 공간을 아슬아슬하게 비켜 가며 뒤편의 무너진 철골을 때렸다. 나는 이미 휠체어의 오른쪽 바퀴를 강하게 제동하며 몸을 왼쪽으로 30도 기울인 상태였다. 장부가 계산해 낸 최적의 회피 궤적이었다.
"이 새끼가!"
강민우가 당황하며 연거푸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타앙-!
두 발의 총탄이 연달아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두 번째 총탄은 내 왼쪽 어깨 깃을 찢었고, 세 번째 총탄은 휠체어의 철제 등받이를 관통해 불꽃을 튕겼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나는 이미 바닥의 경사면을 이용해 휠체어에서 스스로 몸을 던진 상태였다. 바닥을 구르는 거친 감각 속에서도 내 시선은 강민우의 손가락에 고정되어 있었다.
네 번째 격발의 순간, 총구의 각도가 흔들렸다. 그의 호흡이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이다.
찰칵. 찰칵.
탄창이 비어버린 쇠붙이 마찰음이 정적 속에서 차갑게 울렸다.
"끝났어, 강민우."
내가 바닥에 엎드린 채 차갑게 속삭였다.
그와 동시에, 내 머릿속에서 가장 소중한 방 한 칸이 통째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가혹한 등가교환의 법칙이 전두엽을정밀하게 난도질했다.
아내 연희와의 기억이었다.
대학 교정의 흐드러진 벚꽃 아래서,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내 손을 처음 잡았던 그 봄날의 기억. 어스름한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나지막하게 "태신 씨를 사랑해요"라고 속삭이던 그녀의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파수와 맑은 음색이, 마치 물에 젖은 수채화처럼 빠르게 번지며 형태를 잃어갔다.
'안 돼…… 그것만큼은 안 된다.'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연희의 얼굴 윤곽선은 거친 모자이크 처리가 된 것처럼 뿌옇게 흐려졌다. 그녀의 눈동자 색이 무엇이었는지, 나를 보며 지어주던 미소가 얼마나 따뜻했는지 기억해 내려 할수록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고통만이 온몸을 엄습했다. 가슴을 찌르는 상실감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나는 슬퍼할 시간조차 사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상실의 고통을, 나는 놈을 향한 잔혹한 분노로 치환했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내 오른손에 묵직하고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폭발로 인해 2층 난간에서 떨어져 나온, 지름 5센티미터짜리 아연도금 철제 비계 파이프였다.
나는 이빨을 악물었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흘러내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일어서지 못하는 다리 대신, 상체의 모든 근육을 쥐어짜 내며 파이프를 움켜쥐었다.
"하, 하태신……!"
강민우가 빈 권총을 내던지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의 구두 굽이 콘크리트 조각에 걸려 비틀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휠체어에서 튕겨 나가듯 바닥을 밀치며, 온 힘을 실어 철제 파이프를 가로로 휘둘렀다.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강민우의 오른쪽 발목 관절에 파이프가 정확히 내리꽂혔다.
"아아악-!"
비명소리가 창고 천장을 때렸다. 강민우는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사정없이 고꾸라졌다. 발목뼈가 거칠게 으스러지는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 이 괴물 같은 새끼가……!"
그가 바닥을 기며 도망치려 했지만, 나는 이미 그의 등 뒤로 올라탄 상태였다. 하반신이 마비된 내 몸의 무게를 고스란히 이용해 그의 척추를 눌러 찍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다시 철제 파이프를 치켜들었다.
"이 팔이었지."
내 목소리는 스스로가 듣기에도 소름 끼칠 정도로 건조하고 차가웠다.
"연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던 팔. 그리고 그 증거를 감추기 위해 방진 장갑을 끼고 메스를 쥐여주며 나에게 누명을 씌웠던 그 비열한 오른팔."
"태신아! 살려줘, 내가, 내가 한 게 아니야! 배후가……!"
"닥쳐."
콰직-!
철제 파이프가 강민우의 오른쪽 어깨 관절을 무자비하게 내리쳤다. 견갑골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연기와 불길로 가득 찬 창고 안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악! 내 팔! 내 팔이-!"
법률과 조작된 물증 뒤에 숨어 피의자들의 삶을 유희처럼 난도질하던 엘리트 검사의 오만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비참하게 진흙 바닥을 구르는 짐승의 단말마만이 있을 뿐이었다.
"태신 씨, 그만해! 죽어! 이러다 정말 살인자가 된다고!"
뒤늦게 달려온 임철주가 내 어깨를 붙잡았지만, 나는 그 손길을 무섭게 뿌리쳤다. 내 눈은 오직 강민우의 부서진 어깨와 그 위로 흘러내리는 붉은 피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내의 기억을 잃어버린 대가다. 이 고통의 가치는 네놈의 뼈와 살이 바스러지는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나는 파이프 끝을 강민우의 턱밑에 대고 바닥으로 강하게 짓눌렀다. 그의 목구멍에서 컥컥거리는 신음과 함께 핏물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말해. 백야 재단의 최병찬 회장, 그 노인네가 너에게 무슨 명령을 내렸지? 연희가 찾아낸 비자금 장부의 진짜 쓰임새가 뭐야."
강민우는 깨진 이빨 사이로 피를 흘리며 미친 사람처럼 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광기는 패배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귀어진을 노리는 자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하…… 하태신……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미 늦었어."
그가 피가 섞인 가래침을 뱉어내며 조소했다.
"네가 그 기집애를 시켜서 찾은 진짜 밀실 장부…… 그 파일의 백업본은…… 이미 재단 직속 회장 최병찬에게 실시간으로 전송되었어. 네가 이 창고에서 나를 죽여봤자, 네 아내가 목숨과 바꾼 그 장부는 이미 백야 재단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연소해 사라졌다는 뜻이야."
강민우의 짓이겨진 얼굴 위로 비열한 승리감이 번져나갔다.
"서은하 그년도…… 지금쯤 차가운 시체가 되어 어딘가 쓰레기 더미에 처박혀 있겠지. 넌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어, 하태신. 넌 결국 아내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껍데기 살인마로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될 거다!"
뇌 속에서 다시 한번 강한 이명이 울렸다. 서은하와의 통신이 두절되던 순간의 비명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정말 장부는 넘어간 것인가. 서은하는 정말로 그들의 손에 죽은 것인가.
차가운 침묵이 흐르는 화염 속에서, 강민우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