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눈을 멀게 할 것 같은 백색의 상향등 불빛이 사방에서 쏟아지며 제1부두 폐창고의 먼지 낀 공기를 일직선으로 찢어발겼다.

빗물에 젖은 가죽 냄새와 낡은 철판의 비린내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거칠게 내려앉은 셔터 너머의 빗소리가 아득한 이명처럼 고막을 두드렸다. 완전한 밀폐였다. 빠져나갈 구멍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사각의 거대한 강철 무덤.

"씨발, 쥐새끼들이 떼거지로 기어 나왔네."

내 휠체어 뒤에 버티고 선 임철주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다. 그의 거친 손가락이 코트 주머니 속에 감춘 권총 손잡이를 꽉 움켜쥐는 소리가 가죽의 마찰음을 타고 내 귓가에 닿았다. 그의 호흡수가 분당 92회로 치솟아 있었다. 베테랑 형사조차 압도당할 만큼, 사방을 포위한 검은 우비들의 살기는 농익어 있었다.

"하태신."

맨 앞줄에 서서 우비 모자를 벗어 던진 거구의 사내가 나를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그의 오른쪽 뺨에서 턱밑까지 기괴하게 일그러진 격자형(Grid) 흉터 자국이 전조등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가죽을 인위적으로 지져 만든 듯한 징그러운 벌집 모양의 낙인. 그것은 아내의 피가 사방으로 튀었던 그날 밤, 내 소실된 기억의 끄트머리에 흐릿하게 남아 있던 진범의 표식이었다.

"제 발로 무덤을 찾아왔군. 휠체어 신세로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사방에서 철컥거리는 차가운 금속음이 창고 내부를 가득 채웠다. 사내들의 손에 들린 군용 대검과 요인 저격용 소음 권총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조준되었다.

나는 휠체어 팔걸이를 짚은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하반신의 감각은 여전히 얼어붙은 얼음장 같았지만, 전두엽만큼은 차갑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가 아닌, 눈앞에 나타난 사냥감을 향한 지독한 갈증이 심장을 두드렸다.

"임 형사님."

내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자, 임철주가 상체를 비스듬히 숙였다.

"말해, 하 프로."

"저들의 무기 배치, 그리고 전조등의 고저 차를 보십시오. 우리를 즉사시킬 목적이 아닙니다. 생포해서 고문하거나, 혹은 완벽하게 자살로 위장할 수 있는 각도를 재고 있어요. 백야 재단이 원하는 건 여전히 '장부'와 '물증'이니까요."

나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묵직한 유리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투명한 인슐린 병. 하지만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은 당뇨 환자용 약물이 아니었다. 푸르스름한 안개가 서린 듯한 미세한 유기 화합물 액체.

격자형 흉터의 사내가 그 병을 발견하는 순간, 그의 좁은 미간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동공의 직경이 순간적으로 1.2밀리미터 축소되었다. 경계와 당혹의 신호였다.

"그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군."

사내의 목소리에 서늘한 가시가 돋아났다.

"한연희가 목숨과 맞바꾸어 빼돌린 물건이지."

내가 유리병을 전조등 불빛을 향해 치켜들자, 푸른 액체가 백색광을 받아 기괴한 스펙트럼을 그리며 반짝였다.

"백야 재단이 고위층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파멸시키기 위해 비밀리에 개발한 신종 향정신성 약물 '화이트 아웃(White Out)'. 극소량만으로도 전두엽의 기억 재생 체계를 망가뜨려 영구적인 인지 장애를 유도하는 독극물. 연희는 정신과 의사로서 이 약물의 임상 시험 결과를 분석하다가 재단의 실체를 알게 됐고, 이 마지막 샘플을 인슐린 병에 숨겨 내게 남겼지."

나는 사내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날 밤, 당신들이 내 머리에 주입한 것도 바로 이 약물의 초기 프로토타입이었어. 내 기억을 지워 나를 아내를 죽인 살인범으로 만들기 위해. 하지만 실패했지. 내 과잉기억 증후군을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했으니까."

"말이 길구나, 하태신."

사내가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사격 개시 신호였다.

"그 병과 함께 여기서 재가 되어라."

"아니."

나는 건조하게 대꾸하며 머릿속의 제어 장치를 완전히 풀어헤쳤다.

"재가 되는 건 당신들이다."

전두엽 내부의 미세혈관들이 일제히 팽창하는 감각이 밀려왔다. 관자놀이가 찢어질 듯한 고통과 함께, 눈앞의 세상이 극도로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초당 24프레임의 현실이 만 분의 일 초 단위로 쪼개져 뇌세포 속으로 입력되었다.

'기억 장부(Memory Ledger) 가동.'

평소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는 강제 부하 작전. 뇌세포의 사멸을 각오한 출력 300%의 폭주였다. 뜨거운 마그마가 뇌척수액을 타고 흘러내리는 듯한 극통이 전신을 엄습했다.

[경고: 전두엽 연산 장치 과부하. 뇌세포 연소율 급증.] [강제 등가교환 개시.]

그 고통의 이면에서, 내 소중한 기억의 파편 하나가 차가운 재로 변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 태신 씨, 나랑 결혼해 줄래요?

빗소리가 가득하던 어느 여름날 밤, 작은 아파트 발코니에서 나를 보며 수줍게 웃던 연희의 목소리. 나를 향해 내밀었던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그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청혼 반지의 색상.

그것이 무엇이었지? 은색이었나, 아니면 노을빛을 닮은 금색이었나. 그녀가 어떤 목소리로 웃으며 내 품에 안겼었지?

생각해 내려 할수록 머릿속의 은빛 필름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며 재가 되어 날아갔다. 아내의 웃음소리가, 프러포즈 반지 고유의 빛깔이 내 세계에서 영원히 소실되었다. 가슴을 후벼 파는 상실감이 밀려왔지만, 나는 눈을 부릅떴다. 슬퍼할 시간조차 등가교환의 톱니바퀴 속에서는 사치였다.

대신 내 눈앞에는 완벽한 물리적 수치들이 장부처럼 정렬되기 시작했다.

적들의 총구 방향: 12시 방향 4명, 2시 방향 3명, 10시 방향 난간 위 2명. 탄환의 예상 궤적: 총구의 미세한 떨림과 검지손가락의 압력 상태 분석 완료. 풍속: 초속 1.2미터 동풍. 습도: 94%.

"임 형사님, 내 지시에 따라 움직이십시오!"

내가 외침과 동시에, 사방에서 불꽃이 튀었다.

타당-! 타앙-!

소음기를 통과한 탄환들이 공기를 찢으며 날아들었다. 극도로 느려진 세계 속에서, 구리색 탄환들이 회전하며 다가오는 궤적이 붉은 선으로 펼쳐졌다.

"우측으로 15도, 휠체어를 뒤로 30센티미터 급회전!"

임철주가 내 고함에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바퀴가 바닥의 물기를 쓸며 가파르게 미끄러졌다.

쉬익-!

탄환 세 발이 내 뺨을 간발의 차로 스쳐 지나가며 뒤쪽의 철제 사물함에 박혔다. 불꽃이 튀는 찰나의 순간, 나는 다음 연산을 끝마쳤다.

"그대로 정면으로 돌진! 저 거구의 사내 발밑을 향해!"

"미쳤어?!"

임철주가 비명을 지르면서도 온 힘을 다해 휠체어를 밀었다.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탄환 수십 발이 사방의 바닥과 철판을 두들기며 불꽃의 장막을 형성했다. 하지만 그 어떤 탄환도 우리의 육체를 꿰뚫지 못했다. 소수점 넷째 자리까지 계산된 탄도학적 궤적의 틈새를, 우리는 마치 미리 짜인 안무처럼 유려하게 파고들고 있었다.

"어떻게 이딴 게 가능해?!"

적들의 사격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쏜 탄환이 허공을 가르고, 표적이 살아 움직이는 기적적인 광경 앞에 그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때, 내 귀에 꽂힌 무선 이어폰 너머로 차가운 기계음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은하였다.

- 선배, 지붕 위 환기구 확보했어요. 기폭 설비 위치 타겟팅 완료.

"은하야, 창고 북동쪽 2층 난간 아래를 봐라."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연산을 이어갔다. 전두엽에서 피 냄새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거기에 백야 재단이 창고 청소를 위해 설치해 둔 산업용 알코올 탱크와 고압 가스 배관이 연동되어 있어. 제어 밸브의 압력 수치는 이미 한계치다. 배관 연결부의 나사산을 저격해."

- 3, 2, 1. 쏠게요.

창고 천장의 깨진 유리창 너머로 날카로운 총성이 단 한 발 울려 퍼졌다. 소총탄이 어둠을 뚫고 정확히 북동쪽 배관의 이음새를 타격했다.

팅-!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가스 배관에서 뿜어져 나온 고압 가스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임 형사님, 휠체어를 눕히고 바닥으로!"

내가 소리치며 몸을 숙였다. 임철주가 나를 덮치며 바닥으로 굴렀다.

동시에, 전조등의 뜨거운 열기와 공기 중의 가스가 결합했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창고 내부가 오렌지색 화염으로 뒤덮였다. 기폭제 설비가 연쇄적으로 격발되며 발생한 충격파가 창고 기동 조들을 사정없이 휩쓸어 버렸다. 2층 난간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고, 드럼통들이 사방으로 날아가며 폭발을 더했다.

"으아악!"

"불이야! 대피해!"

비명과 폭발음이 뒤섞인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사선에서 우리를 사냥하려던 악의 전사들이 시커먼 불길과 무너진 철골 더미 속에 깔려 비참하게 짓눌렸다.

자욱한 매연과 열기 속에서, 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코와 입에서 단내가 풀풀 풍겼다. 연희와의 기억을 또 한 조각 잃어버린 대가는 뼈아팠지만, 눈앞의 적들을 완벽하게 궤멸시킨 반격의 쾌감이 온몸의 세포를 짜릿하게 각성시켰다.

임철주가 기침을 해대며 권총을 쥔 채 사방을 경계했다. 포위망은 완전히 붕괴해 있었다. 쓰러진 사내들이 신음하며 바닥을 기어 다녔고, 격자형 흉터의 사내 역시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에 다리가 깔린 채 피를 토하고 있었다.

"하, 하 프로…… 너 진짜 정체가 뭐냐?"

임철주가 괴물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대답 대신 휠체어를 똑바로 세우고 그 위에 다시 몸을 실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나는 창고의 가장 깊숙한 곳, 짙은 연기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린 어둠 속을 응시했다.

그곳에서 뚜벅, 뚜벅 하는 가볍고 일정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에는 어떤 흔들림도, 당혹감도 없었다. 마치 이 모든 참상을 예상했다는 듯이 여유롭고 오만한 박자였다.

철컥.

어둠 속에서 회색 수트를 입은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구경 .38 권총이 들려 있었다. 그가 정교하게 권총의 실린더를 돌려 장전하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강민우 검사였다.

그의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위로 붉은 비상등 불빛이 번져나갔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광기와 주도밀착한 살의가 가득 차 있었다.

"대단해, 하태신."

강민우가 조용히 미소 지으며 권총을 내 이마를 향해 겨누었다.

"이 정도의 덫마저 부수고 나올 줄은 몰랐어. 하지만 여기까지다. 네 장난감 같은 기억 놀이도, 이 지옥 같은 창고 안에서 나와 함께 끝나는 거야."

사방의 불길이 우리 둘만을 비추는 기괴한 조명이 되었다. 소음과 비명이 걷힌 밀실의 중심에서, 나는 권총을 든 진범과 완전히 일대일로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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