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네가 이 창고에서 나를 죽여봤자, 네 아내가 목숨과 바꾼 그 장부는 이미 백야 재단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연소해 사라졌다는 뜻이야."

강민우는 깨진 이빨 사이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견갑골이 으스러진 고통 속에서도 그의 눈빛은 뱀처럼 축축하고 집요했다.

"서은하 그년도…… 지금쯤 차가운 시체가 되어 어딘가 쓰레기 더미에 처박혀 있겠지. 넌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어, 하태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뚝, 뚝, 내 손에 쥔 철제 파이프 끝바닥에서 강민우의 피가 떨어져 내렸다. 사방을 집어삼키는 화염의 열기 속에서도 내 손가락 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머릿속의 이명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렸지만, 전두엽 한구석에 깊게 각인된 기억 장부는 오히려 차분하게 연산을 시작하고 있었다.

강민우의 얼굴 위로 일렁이는 붉은 불빛. 그의 일그러진 표정,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왼손.

그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둔탁한 백금 반지로 시선이 수렴했다. 백야 재단의 핵심 인물들만 공유한다는 특유의 문양. 그 반지 테두리에 미세하게 깎여 나간 단면과, 그 안에 정교하게 음각된 격자형 격막 패턴이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동시에 뇌리의 장부가 미친 듯이 페이지를 넘기며 하나의 이미지를 허공에 띄웠다.

아내가 살해당했던 그날 밤, 우리 집 안방 테라스의 깨진 유리창 파편.

그 유리의 단면에 아주 미세하게 긁혀 있던, 간격 0.3밀리미터의 정교한 격자형 흉터 자국. 국과수조차 단순한 유리 제조 공정상의 결함으로 치부하고 넘겼던 그 흔적이, 지금 강민우의 백금 반지 측면에 새겨진 마찰 흔적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알리바이가 확실하다고 주장했었지."

나는 파이프를 내리눌렀다. 쇠붙이가 강민우의 턱뼈를 짓누르자, 그의 웃음소리가 컥 하는 비명으로 바뀌었다.

"그날 밤, 넌 검찰청 고위 간부들과의 만찬 자리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연희의 숨통을 끊기 위해 테라스 유리를 떼어낼 때, 네놈의 그 오만한 반지가 유리에 깊은 자국을 남겼어. 격자형 마찰흔. 이 반지의 다이아몬드 커팅 면과 분자 단위까지 일치하는 유일한 증거다."

강민우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자신의 알리바이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하나로 인해 완전히 해체되는 순간을 직면한 자의 공포였다.

"이건…… 이건 법적 증거 능력이……!"

"아니, 충분해."

뒤에서 굳건히 버티고 서 있던 임철주 형사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이미 녹음 기능이 켜진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임철주는 강민우를 내려다보며 침을 뱉었다.

"강민우, 네놈이 숨기려던 국과수 방진 장갑 섬유 누락 메일부터 시작해서, 이 반지 흔적까지 합치면 영장은 10분 만에 발부된다. 넌 끝났어."

그때였다. 내 바지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두절되었던 주파수. 서은하의 개인 회선이었다. 나는 즉시 수신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 너머로 거친 파도 소리와 함께 숨 가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아저씨! 나 안 죽었어! 그 새끼들이 내 아지트를 덮쳤는데, 미리 깔아둔 가스 트랩으로 겨우 따돌렸다고!

"장부는 어떻게 됐지?"

- 진짜 장부 파일, 이미 내 하드 드라이브에 이중 암호화해서 백업해 뒀어. 최병찬 회장 늙은이가 가져간 건 내가 심어둔 가짜 미끼 파일이야. 열어보는 순간 시스템 전체가 랜섬웨어로 잠기게 설계해 놨다고!

은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특유의 까칠함은 여전했다.

- 근데 문제가 생겼어. 최병찬이 지금 인천 남항에 대기시켜 둔 지들 개인 크루저선을 타고 해외로 밀항하려고 배를 띄웠어. 장부가 가짜라는 걸 눈치채기 전에 잡아야 해!

나는 강민우를 내려다보았다. 승리감으로 일그러졌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회백색으로 흘러내렸다. 자신들이 설계한 덫이 도리어 목을 조여오는 감각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표정이었다.

"임 형사님, 이 새끼를 연행하십시오."

나는 파이프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쇠파이프가 시멘트 바닥을 구르는 맑은 소리가 창고의 소음을 갈랐다.

"난 최병찬을 잡으러 갑니다."

"태신아! 혼자서는 무리야!"

임철주가 소리쳤지만, 나는 이미 불타는 창고의 출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내 등 뒤로 무너져 내리는 철골 구조물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

두 시간 뒤, 인천남항 외곽의 비밀 선착장.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고, 차가운 바닷바람이 뺨을 사정없이 때려 누볐다.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며 수면을 검게 물들였다.

저 멀리, 칠흑 같은 바다 위에 거대한 성채처럼 떠 있는 초호화 크루저선 '더 화이트 앨버트'가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요란한 엔진 소리가 고막을 진동시켰다. 배는 이미 정박용 밧줄을 모두 풀고 항구를 벗어나는 중이었다.

"아저씨! 빨리 타!"

선착장 모퉁이에서 요란한 모터 음과 함께 소형 고속 보트 한 대가 물살을 가르며 미끄러져 들어왔다. 운전석에는 가죽 재킷을 푹 눌러쓴 서은하가 타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급습의 흔적인 듯 붉은 찰과상이 선명했다.

내가 보트에 올라타자마자 은하는 가속 레버를 끝까지 밀어붙였다.

"최병찬 그 영감탱이, 지가 이 나라 법 위에 서 있는 줄 알아. 오늘 아주 아주 배 침몰시켜 버릴 거야!"

보트가 파도를 넘을 때마다 엄청난 충격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차가운 바닷물이 사방으로 튀어 시야를 가렸지만, 내 눈은 오직 크루저선의 선미 데크만을 조준하고 있었다.

크루저와의 거리가 10미터, 5미터로 좁혀졌다.

"은하야, 속도 유지해."

"미쳤어? 이 속도에서 뛰겠다고?!"

"유지해."

나는 보트의 뱃머리로 걸어 나갔다. 거센 바람이 머리칼을 흩날렸다. 크루저의 선미 램프가 바로 눈앞에 다가온 순간, 나는 온 힘을 다해 도약했다.

공중에 뜬 짧은 찰나, 중력이 사라진 듯한 감각 속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태신 씨, 조심해요.'* 그 환청을 붙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내 몸은 크루저선의 차가운 철제 난간에 거칠게 부딪혔다.

우지끈하는 통증과 함께 왼팔 갈비뼈 부근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나는 고통을 느낄 여유도 없이 난간 안쪽으로 몸을 굴렸다. 차가운 갑판 바닥의 감촉.

성공적인 은밀 침투였다.

보트의 은하는 내 성공을 확인하자마자 즉시 침로를 틀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이 배 위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내 뇌 속에 들어찬 장부만이 유일한 무기였다.

갑판 위는 기묘할 정도로 고요했다. 하지만 그것이 덫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위우우웅-*

갑자기 고주파의 미세한 진동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단순한 기계 소음이 아니었다. 관자놀이가 터질 듯한 압박감과 함께 극심한 이명이 일며 중심을 잡기가 힘들어졌다.

방향 감각이 상실되는 증상.

"지향성 음향 병기(LRAD)인가."

나는 난간 밑에 몸을 웅크렸다. 백야 재단의 정예 근위대들이 침입자를 대비해 깔아놓은 고강도 물리 음향 함정이었다. 이 진동 주파수에 노출되면 뇌신경이 교란되어 스스로 주저앉게 된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10초도 버티지 못하고 구토하며 기절할 터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기억 장부, 강제 개방.'

*스스스슥-*

머릿속에서 신경 세포가 타들어 가는 자극적인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차가운 명도와 어두운 온도가 뇌리를 지배하며, 눈앞의 공간이 수치화된 기하학적 그리드로 재편성되기 시작했다.

[음파 진동 주파수: 17.4kHz] [발원지: 상부 데크 좌우측에 배치된 소형 이미터 2기] [반사각 및 중첩 감쇄 지대: 우현 1.5미터 아래의 환기구 음영 구역]

동시에, 내 소중한 기억의 도서관에서 한 장의 페이지가 분해되어 연기처럼 사라져 갔다.

연희와 함께 갔던 동해 안의 어느 조용한 펜션. 밤바다를 바라보며 그녀가 내 손을 꼭 잡고 속삭였던 밤바다의 파도 소리. 그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감각이, 단어의 개념만 남긴 채 완전히 백색 소음으로 지워졌다. 이제 나는 그녀와 바다에 갔었다는 사실만 건조하게 인식할 뿐, 그때의 공기와 그녀의 체온은 영원히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가슴을 찢는 상실감이 밀려왔지만, 나는 이성을 악물고 통제했다. 눈을 뜨자, 음파의 데드존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소리가 닿지 않는 음영 구역을 따라 고양이처럼 신속하게 움직였다. 상부 데크로 통하는 철문에 도달하자마자,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문 옆의 배전반을 뜯어냈다.

이미터의 전원선이 기억 장부의 연산 레이아웃 위에 붉게 표시되었다. 단번에 전선을 뜯어내자, 고막을 찢던 고주파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침입자다! 3구역!"

그 순간, 통로 저편에서 무장한 근위대원 세 명이 전술 라이트를 비추며 나타났다. 그들의 총구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타타탕-!*

철제 벽면에 불꽃이 튀며 도탄 음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나는 바닥을 굴러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전두엽이 다시 한번 연산을 요구하며 욱신거렸다.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고통이 관자놀이를 바늘로 찌르는 듯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지금 멈추면 연희의 죽음은 한낱 미제 사건으로 묻힌다.

'장부 가동. 적들의 사선(射線) 분석.'

[대원 A: 오른손잡이, 견착 불완전, 다음 사격까지 1.2초] [대원 B: 좌측 이동 중, 무게 중심이 왼발에 쏠림, 반동 제어 취약] [적들의 사격 패턴 역산 완료. 회피 경로 생성.]

나는 벽 뒤에서 튀어나갔다.

두 번째 기억의 연소. 결혼기념일에 연희가 수줍게 건넸던 자필 편지의 필체. 그 따뜻했던 손글씨의 형태가 머릿속에서 완전히 흐려지며 검은 그을음으로 변했다.

그 상실의 분노를 온몸의 근육으로 전환해 질주했다.

*탕-!*

첫 번째 대원의 총탄이 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확히 1.2초의 빈틈. 나는 그의 품안으로 파고들어 턱관절을 강하게 올려쳤다.

*콰직!*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대원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나는 그의 손에서 떨어지는 권총을 공중에서 낚아채며, 좌측으로 이동하던 두 번째 대원의 무릎을 향해 방과쇠를 당겼다.

*탕! 타앙!*

정확한 두 발의 격발. 비명과 함께 두 대원이 바닥으로 뒹굴었다. 마지막 세 번째 대원이 당황하여 총구를 돌리려 했지만, 나는 이미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벽면에 처박은 뒤였다.

쿵-!

단단한 철제 벽에 머리를 부딪힌 대원이 스르륵 주저앉았다.

내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과도한 초인지 연산으로 인해 코끝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려 턱밑으로 떨어졌다.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시야의 가장자리는 이미 검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온몸의 신경망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힘겹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뼈마디가 삐걱거렸다. 하지만 나는 피투성이가 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내를 죽인 자. 내 모든 것을 앗아간 그 악마가 이 배의 가장 높은 곳에 숨어 있다.

"연희야……."

나는 가만히 그녀의 이름을 읊조려 보았다. 머릿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아스라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 형태마저 안개 속으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무서웠다. 복수를 완성하는 순간, 정작 내가 누구를 위해 이 지옥을 건넜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될까 봐.

그러나 그 공포마저도 지금은 복수의 연료일 뿐이었다. 나는 풀린 다리를 억지로 이끌며 계단을 올랐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핏자국이 하얀 대리석 바닥에 선명한 궤적을 그렸다.

귀신과도 같은 형색이었다. 머리칼은 피와 땀으로 젖어 이마에 붙었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오직 전방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주치는 몇 안 되는 경비대원들은 내 몰골을 보고는 총을 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섰다. 그들에게 나는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복수라는 단 하나의 맹목적인 의지만으로 움직이는 움직이는 시체처럼 보였으리라.

침묵만이 흐르는 복도를 지나, 드디어 크루저 최상층의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구역에 도달했다.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두꺼운 티타늄 합금으로 제작된 철갑문이었다. 백야 재단의 회장, 최병찬의 개인 집무실로 통하는 유일한 관문.

문 옆의 디지털 제어판에는 생체 인식과 256비트 양자 암호 체계가 결합한 최첨단 락 시스템이 붉은빛을 내뿜으며 대기하고 있었다. 이 문을 열기 위해서는 내 전두엽의 마지막 남은 보루, 아직 연소하지 않은 가장 깊고 소중한 영역까지 완전히 열어젖혀야만 했다.

그 너머에 무엇이 남아있을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연희의 마지막 미소조차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피 묻은 손을 천천히 제어판 위에 올렸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주변의 소음이 완전히 소거되고, 오직 내 불규칙한 심장 박동 소리만이 정적을 깨웠다.

마지막 장부를 펼치기 직전의, 지독하게 서늘한 침묵이 나를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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