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강민우의 상체가 기괴하게 꺾이며 앞으로 쏟아졌다. 그의 목표는 명확했다. 나를 엄호하듯 비껴 서 있던 임철주 형사의 오른쪽 허리춤. 가죽 홀스터의 잠금장치가 풀려 있는 틈을 타, 38구경 리볼버의 은빛 손잡이를 움켜쥐려는 단발마의 발악이었다.

찰나의 순간, 취조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임철주의 동공이 경악으로 확장되고, 그의 오른손이 본능적으로 허리춤을 향해 내려앉으려 했다. 하지만 25년 차 형사의 동물적인 감각조차 미처 닿지 못할 만큼,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검사의 독기는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강민우의 손가락 끝이 리볼버의 격발기 후면을 스치기 직전이었다.

‘기억 장부(Memory Ledger) 구동.’

전두엽 깊은 곳에서 차가운 불꽃이 일었다. 내 시야 속의 세계가 일순간 회색빛 모노톤으로 내려앉으며, 모든 움직임이 초당 수천 프레임의 초고속 카메라처럼 쪼개지기 시작했다.

[대상: 강민우. 근육 수축도 94%. 무게 중심의 편향: 좌측 하단 12도. 호흡 주기: 0.12초 간격의 불규칙한 단속음. 예상 궤적: 권총 탈취를 가장한 신체 충돌 및 난투극 유도. 성공 확률: 87.4%.]

머릿속의 연산 장부가 붉은색 수치들을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렸다.

검사 출신의 엘리트가 이 밀실에서 형사의 총을 빼앗아 무엇을 하겠는가. 나를 쏘아 죽이고 정당방위를 주장할 생각인가? 아니다. 강민우의 진짜 목적은 총기를 격발하는 것이 아니다. 총을 빼앗으려는 과정에서 극적인 ‘육탄전’을 유발하는 것.

취조실 내부에서 총기 탈취를 시도하는 흉악범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의의 사고. 혹은 그 난장판을 틈타 대기 중이던 백야 재단 측의 무장 대원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와 나를 ‘사살’할 명분을 만들어주려는 얄팍한 역공 설계였다.

그가 바닥에 발을 디디는 압력 분포와 어깨의 각도를 보니, 내 목덜미를 휘감아 쥐려는 궤적이 뚜렷하게 보였다.

나는 단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왼발을 축으로 삼아 몸을 15도 가량 비스듬히 틀었다. 차가운 철제 테이블의 모서리가 내 골반 스치듯 비껴갔다. 강민우가 기획한 궤적의 중심축이 허공에서 붕괴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나는 오른손을 뻗어 임철주의 가죽 홀스터 플랩을 아래로 강하게 눌러 잠갔다.

*철컥.*

무거운 금속성 마찰음과 함께 리볼버의 손잡이가 단단히 고정되었다. 강민우의 손가락은 권총 손잡이가 아닌, 굳게 닫힌 가죽 덮개의 표면을 헛되이 긁고 지나갔다.

"임 형사님, 왼쪽 삼단봉입니다."

내 목소리는 취조실의 어두운 구석을 떠도는 서늘한 냉기처럼 고요했다.

내 조언이 임철주의 고막에 닿은 것은 강민우의 손끝이 허공을 가른 직후였다. 베테랑 형사의 몸은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임철주는 허리를 뒤틀며 왼쪽 허벅지에 장착된 두꺼운 특수강 삼단봉을 그대로 뽑아 올렸다.

*깡-!*

강민우의 손목뼈와 두꺼운 철제 봉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아아악!"

강민우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꺾인 손목을 움켜쥔 채, 그가 차가운 리놀륨 바닥 위에서 고통으로 몸을 웅크렸다. 그의 하얀 셔츠 깃이 땀과 먼지로 얼룩져 엉망이 되었다. 조금 전까지 법무부 진입을 자신하던 엘리트 검사의 오만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신경통이 번개처럼 작렬했다.

*치이이익.*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환청처럼 귓전을 때렸다. 차갑고 단단한 얼음송곳이 관자놀이를 뚫고 들어오는 듯한 극통. 눈앞이 순간적으로 암전되었다가 서서히 명도를 되찾았다.

기억 장부를 가동한 대가. 가혹한 물질대사의 등가교환이 시작된 것이다.

내 뇌리의 가장 깊은 방, 연희와 관련된 기억의 보관소에서 또 하나의 서랍이 통째로 불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번엔 무엇이지?’

나는 사라져가는 기억의 끝자락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기억을 멈출 방법은 없었다.

그것은 비가 세차게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의 기억이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피해 허름한 편의점 파라솔 아래에 단둘이 쪼그려 앉아 있던 순간. 온몸이 젖어 떨고 있던 내게 연희가 건네주었던, 얇은 알루미늄 캔에 담긴 따뜻한 꿀음료의 온기. 그 캔을 감싸 쥐었던 그녀의 곱고 여린 손가락끝의 감촉. 그날 그녀가 입고 있던 빛바랜 노란색 카디건의 따스한 색감…….

그 모든 감각과 명도가 순식간에 탈색되어 완벽한 무(無)로 돌아갔다.

나는 이제 연희가 비 오는 날 어떤 옷을 입었는지, 그녀의 손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가슴 속에서 차가운 구멍이 하나 더 넓어졌지만, 내 얼굴 근육은 단 1밀리미터도 움직이지 않았다. 슬퍼할 시간조차 사치였다. 이 지옥 같은 취조실에서 살아남아 진범의 목을 꺾기 전까지는, 감정 따위는 거제된 기계가 되어야만 했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강민우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상황 타개를 위한 난투극 유도치고는 너무 조잡했습니다, 강 검사님. 당신의 움직임은 이미 3초 전에 수치화되어 제 장부에 기록되어 있었으니까요."

강민우는 깨진 손목을 가슴에 품은 채,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하태신... 미친 사이코패스 자식... 네가 여기서 나간다고 해도 백야 재단이 널 살려둘 것 같아? 넌 이미 끝났어. 네 아내년처럼 사지가 찢겨서 쓰레기통에 처박힐 운명이라고!"

"내 아내의 이름을 그 더러운 입에 올리지 마십시오."

내 어조는 한층 더 가라앉았다. 명도가 완전히 배제된, 깊은 심연의 목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휠체어를 밀어 철제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소형 유리병과 서은하가 전송해 준 비자금 지출 영수증 사본을 꺼내 나란히 내려놓았다.

유리병 안에는 정체불명의 투명한 액체가 아주 미량 남아 있었다.

강민우의 시선이 그 유리병에 닿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게... 무엇인지 잘 아시겠지요."

나는 유리병을 손가락 끝으로 톡 쳤다.

"연희가 살해당하던 날 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인슐린 병입니다. 소아당뇨 환자였던 연희가 매일같이 투약하던 약병이죠. 하지만 국과수조차 단순한 당뇨 치료제로 분류하고 넘어갔던 이 병의 잔여물 속에서, 우리는 아주 특이한 성분을 검출해 냈습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인쇄된 화학 구조식 분석표를 펼쳐 보였다.

"백야 재단의 극비 연구소에서 제조되어, 대한민국 최상류층에게만 은밀히 공급되던 합성 마취제 '백야-7'의 전구 물질. 정신과 전문의였던 연희는 자신의 환자들 중 일부가 이 약물에 중독되어 파멸해 가는 과정을 프로파일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 백야 재단의 불법 임상 시험과 유통망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 직전이었죠."

임철주 형사가 침을 꿀꺽 삼키며 분석표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도 서서히 경악이 번졌다.

"태신아, 그럼 이게... 한 의사가 죽은 진짜 이유라는 거냐?"

"네. 그리고 이 약물의 비호 아래, 재단의 장학생이라는 명목으로 법무부 라인을 장악하려던 사냥개가 바로 여기 있는 강민우 검사입니다."

나는 바닥에 엎드린 강민우의 얼굴 앞으로 비자금 지출 영수증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여기 기록된 수십억 원 상당의 무기명 채권과 현금 흐름. 강 검사님, 당신의 차명 계좌로 흘러 들어간 내역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영수증들은 아까 은하가 목숨을 걸고 내 자택의 숨겨진 이중 패널에서 확보해 낸 진짜 장부의 일부입니다."

"이딴... 조작된 종이 조각 따위로 나를 옭아맬 수 있을 것 같아? 법정에서는 아무런 증거 능력도 없어!"

강민우가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법정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소형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 화면 위에는 이미 실시간 스트리밍 송출 앱이 구동되고 있었다. 붉은색 'REC' 표시가 깜빡이며, 시청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숫자가 보였다.

"지금 이 순간, 이 취조실 내부의 오디오와 당신이 저지른 증거 조작 정황, 그리고 백야-7의 성분 분석표는 조회수 100만 명이 넘는 독립 언론사 라이브 채널에 실시간으로 다이렉트 송출되고 있습니다."

"뭐... 라고?"

강민우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물리적인 압박과 위조된 이송 명령서로 나를 침묵시키려 하셨습니까? 대중의 눈만큼 확실한 방패는 없지요. 이제 백야 재단이 당신을 어떻게 처리할지 기대되는군요. 실패한 사냥개는 그들의 장기판에서 가장 먼저 버려지는 법이니까요."

그때였다.

취조실 밖 복도에서 우당탕하는 소란스러운 발소리와 함께 거친 고함이 들려왔다.

"비켜! 경찰 통제 구역입니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비키세요! 저희는 정당한 보도의 권리를 행사하는 중입니다! 실시간 제보를 받고 왔습니다!"

철제 문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명백히 경찰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쾅!*

취조실의 묵직한 철문이 거칠게 열렸다.

들어선 것은 무장한 형사들이 아니었다. 대형 카메라를 어깨에 멘 촬영 스태프들과 마이크를 쥔 기자들이었다. 그들의 옷깃에는 메이저 방송사 공중파 로비 카드가 선명하게 붙어 있었다. 서은하가 습격을 당하기 직전, 최후의 보루로 가동해 두었던 외부 언론사 기습 취재팀이 마침내 서부경찰서 제3취조실의 빗장을 뚫고 들어온 것이다.

"하태신 프로파일러님! 백야 재단의 비자금 실체와 사법 카르텔의 개입이 사실입니까?"

"바닥에 쓰러져 있는 강민우 검사가 기획 수사를 주도했다는 폭로가 사실입니까!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카메라의 플래시가 사정없이 터지며 어두컴컴한 취조실 내부를 백색의 빛으로 난도질했다. 빛과 어둠의 대비 속에서, 바닥에 엎드린 강민우의 일그러진 얼굴이 전국의 브라운관과 모바일 화면으로 여과 없이 송출되기 시작했다.

강민우는 비명을 지르며 온전한 왼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들이닥친 스태프들의 카메라 렌즈는 그의 비겁한 손가락 사이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이거 치워! 치우라고! 당장 카메라 꺼!"

강민우가 광분하여 소리쳤지만, 기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설계한 진짜 사이다였다. 밀실의 전장을 지배한다는 것은, 단순히 방 안의 적을 굴복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밀실의 벽을 허물어 세상 전체를 우리의 전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백야 재단이 그토록 감추고 싶어 했던 어둠의 카르텔이, 수백만 명의 눈동자 앞으로 끌려 나와 벌거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임철주 형사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삼단봉을 집어넣었다. 이제 경찰 뇌물을 받은 끄나풀 서장조차 이 판을 엎을 방법은 없었다.

나는 쏟아지는 카메라 불빛의 중심에 서서, 휠체어의 바퀴를 천천히 굴려 가장 메인 카메라의 정면으로 향했다.

화면에 잡힌 내 얼굴은 극도로 침착했고, 그래서 오히려 기괴할 정도로 서늘해 보였다.

"시청자 여러분, 그리고 이 방송을 보고 있을 백야 재단의 배후 관계자 여러분."

내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전국으로 흘러갔다.

"제 아내 한연희의 죽음은 단순한 치정이나 사이코패스의 우발적 살인이 아닙니다. 거대 권력이 자신들의 치부를 덮기 위해 기획한 잔혹한 학살이었습니다."

기자가 마이크를 내 입가로 바짝 들이댔다.

"하 프로파일러님! 그렇다면 아내분을 살해한 진범의 직접적인 증거가 아직 남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응시했다. 화면 너머, 저 어둠 속에 숨어 나를 지켜보고 있을 진짜 살인마의 눈동자를 꿰뚫어 보듯이.

"네, 있습니다."

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휠체어 옆 주머니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하나의 물건을 꺼내 들어 카메라 필터 바로 앞으로 들이밀었다.

*스스슥.*

투명한 지퍼백 안에 담긴, 핏자국이 거무스름하게 말라붙은 날카로운 금속 도구.

그것은 일반적인 수술용 메스가 아니었다. 날 끝이 기괴하게 휘어지고 가위의 형상을 한, 아내의 목줄기를 무참히 찢어발겼던 미제(美製)의 위조 가위였다. 그 가위의 날 표면에는 무언가 단단한 유리에 반복적으로 긁힌 듯한, 특유의 미세한 격자형 흉터 자국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카메라가 그 기괴한 가위의 날을 클로즈업하는 순간, 취조실 안의 모든 소음이 일시에 멈췄다.

"이것이 제 아내를 죽인 진짜 범인이 현장에 남겨둔, 오직 단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나는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당신이 대답할 차례입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