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색 관인이 찍힌 백색 용지가 철제 테이블 위로 가볍게 미끄러졌다.

갓 출력한 레이저 프린터 특유의 퀴퀴한 오존 냄새와 뜨거운 토너 향이 취조실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종이 표면에 선명하게 박힌 [피의자 하태신에 대한 즉각 기소 및 이송 명령서]라는 글자가 창백한 형광등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거기까지 하시지, 임 형사."

법무부 기획조정실 소속 비서관, 김요한의 목소리는 건조하게 갈라진 모래막이 같았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백발 아래로 비치는 그의 눈동자에는 피의자를 향한 일말의 온기도, 경계심도 없었다. 오직 거추장스러운 쓰레기를 치우러 온 청소부의 무감한 시선뿐이었다.

그의 등장은 얼어붙어 있던 강민우 검사의 얼굴에 즉각적인 생기를 불어넣었다. 강민우는 헐떡이던 숨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흐트러진 넥타이를 바로잡았다. 뭉개졌던 자존심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 것이 그의 팽창하는 콧구멍과 치켜 올라간 입꼬리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말했지, 하태신."

강민우가 내 면전에 대고 침을 튀기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목소리에는 승리감에 도취한 자의 비열한 떨림이 묻어났다.

"네가 아무리 취조실에서 잔머리를 굴려봐야 이 판의 주인은 따로 있어. 이 기소장에 법무부 차장님의 직인이 찍힌 순간, 네놈이 갈 곳은 법정이 아니라 차갑게 식은 독방 안이다. 거기선 아무도 네 목소리를 듣지 못해."

임철주 형사의 손이 허리춤의 수갑 집 위에서 굳어 버렸다. 평생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굴러먹은 베테랑 형사에게 법무부 차장의 친필 서명이 담긴 이송 명령서는 거역할 수 없는 신의 계율과 같았다. 임철주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 나와 공조를 결심했던 그의 단단한 어깨가 사법 권력의 거대한 벽 앞에서 미세하게 위축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테이블 위에 놓인 붉은 인장과 서류의 질감을 가만히 응시했다.

시야가 좁아지며, 머릿속에서 거대한 연산 회로가 구동되기 시작했다.

'기억 장부(Memory Ledger).'

전두엽의 신경망들이 일제히 요동치며 취조실 내부의 모든 물리적 단서들을 숫자로 치환해 나갔다. 형광등의 미세한 깜빡임 주기 60Hz. 김 비서관의 왼쪽 눈꺼풀이 떨리는 주파수 4.2Hz. 그리고 내 눈앞에 놓인 위조의 증거들.

[연산 가동: 이송 명령서 표면 분석] - 종이 재질: 80g 일반 모조지 (법무부 공식 기안용지는 100g 백색 국산 용지 사용) - 인쇄 방식: 고해상도 컬러 토너 전사 방식. - 서명 잉크: 잉크의 종이 섬유 침투 깊이 0.02mm 이하. 만년필의 모세관 현상에 의한 번짐이 전혀 없음. 즉, 스캔된 서명 이미지의 컬러 인쇄본. - 관인의 마이크로 입자: 인장 외곽선의 불규칙한 망점 분포 확인. 캐논 imageRUNNER 시리즈 특유의 황색 도트 패턴 잠재됨.

정교하게 짜인 가짜였다.

그리고 이 진실을 도출해 낸 대가로, 내 뇌의 가장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지독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관통했다. 뇌세포가 영구적으로 연소하며 발생하는 열기가 두개골 내부를 가득 채웠다. 아내 연희와 함께했던 기억의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이 통째로 불길 속으로 던져지는 감각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아 안 돼.'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등가교환의 법칙은 무자비했다.

이번에 타버린 것은 비가 내리던 어느 가을날의 기억이었다. 커다란 노란색 우산 하나를 둘이서 나눠 쓰고 걷던 길. 빗물이 신발 끝을 적실 때마다 연희는 아이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차가운 빗소리, 그녀의 어깨에서 풍기던 은은한 라벤더 향기, "태신 씨, 우리 오늘 저녁은 따뜻한 수제비 먹을까요?" 하고 내 팔짱을 끼며 올려다보던 그 눈빛.

그 모든 구체적인 감각이 순식간에 회색 재로 변해 허공으로 날아갔다. 노랗던 우산의 색깔이 검은색으로 탈색되더니, 마침내 '우산'이라는 건조한 단어만 남긴 채 그녀의 얼굴도, 목소리도 내 기억 속에서 영원히 소멸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시린 상실감이 갈라진 심장 틈새로 스며들었지만, 나는 겉으로 단 한 번의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감정이 거제된 프로파일러의 얼굴 위에 서늘한 미소만을 띠었을 뿐이다.

"수고하셨습니다, 김 비서관님."

내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취조실 안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내 목소리는 물속에서 건져 올린 돌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출력한 지 20분이 채 되지 않은 서류를 들고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군요. 서부경찰서 지하 주차장에 세워둔 청와대 의전 차량 안에서 급하게 휴대용 프린터로 뽑아내신 모양입니다."

김 비서관의 눈썹이 움찔했다. 떨림 주파수가 4.2Hz에서 8.7Hz로 급격히 상승했다.

"무슨 실없는 소릴."

"종이 재질이 80g 일반 복사지더군요. 법무부 기획조정실에서 사용하는 공식 기안용지는 정부 상징 마크가 워터마크로 삽입된 100g 전용지입니다. 무엇보다 이 서명의 잉크."

나는 검지손가락으로 법무부 차장의 친필 서명이 있는 부분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만년필로 직접 서명했을 때 발생하는 특유의 종이 눌림 자국, 즉 압흔이 전혀 없습니다. 빛에 비춰보면 표면이 완전히 평평하죠. 스캔된 서명 이미지를 고해상도 컬러 레이저로 덧씌운 겁니다. 캐논 프린터 특유의 미세한 황색 마이크로 도트가 서명 주변부에서 검출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태신!"

강민우가 책상을 쾅 치며 소리쳤다.

"이자가 이제는 법무부 공식 문서까지 위조라고 우기는군! 임 형사, 뭐 하고 있어? 당장 이 자를 압송해!"

"압송할 수 없을 겁니다."

내가 강민우의 말을 단칼에 자르며 김 비서관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내 시선에 담긴 살기에 김 비서관이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차장님이 직접 이 서류에 결재할 수 없는 상태이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취조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직 구석에 위치한 환풍기만이 덜덜거리며 차가운 바람을 뱉어내고 있었다.

"차장님은 지금 의식 불명 상태이거나, 혹은 극심한 인지 장애 상태에 빠져 계실 겁니다. 백야 재단이 제공하던 '그 약'이 끊겼기 때문이지요."

나는 턱을 가볍게 치켜들며 말을 이어갔다.

"제 아내 한연희가 살해당하던 날 밤, 그녀의 소지품에서 발견된 인슐린 병. 임 형사님, 그 병 안에 든 백색 액체의 성분 분석 결과표를 강 검사가 고의로 누락시켰던 것 기억하십니까?"

임철주가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거친 눈매에 서서히 분노의 불꽃이 다시 피어올랐다.

"어, 기억하지. 국과수 분석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검찰에서 압수해 갔어."

"그 병 속에 든 것은 인슐린이 아니었습니다. 백야 바이오랩이 불법적으로 제조한 특수 신경 연명 약물, 일명 '데스메틸-A3(Desmethyl-A3)'입니다. 고령의 정재계 인사들이 뇌신경 퇴행을 일시적으로 막고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주고 밀거래하던 무허가 약물이지요."

김 비서관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그의 굳게 다문 입술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내 아내는 정신과 전문의로서 백야 재단의 VIP 고객들의 심리 치료를 담당하던 중, 이 불법 약물 투약 명단과 제조법이 담긴 비밀 장부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명단의 가장 맨 위에는... 오늘 아침 기소 명령서에 이름을 올리신 법무부 차장님의 성함이 적혀 있었죠."

나는 테이블 위로 상체를 천천히 기울였다. 내 그림자가 김 비서관과 강민우를 어둡게 덮었다.

"차장님은 이미 약물 중독으로 인해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입니다. 백야 재단이 약물 공급을 빌미로 그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해 온 것이지요. 오늘 이 기소 명령서는 차장님의 의지가 아니라, 그의 몰락을 막으려는 백야 재단과 당신들이 공모하여 위조한 범죄의 증거물에 불과합니다."

"증거... 증거가 없어! 네놈의 추악한 상상력일 뿐이야!"

강민우가 이성을 잃고 악을 썼다. 그의 목소리가 취조실 벽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증거라면 여기 있습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소형 무선 수신기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서은하가 습격당하기 직전, 내 개인 클라우드로 전송하는 데 성공했던 백야 재단의 비자금 명장부의 일부 파일이었다. 수신기의 파란색 LED 등이 깜빡일 때마다 취조실 벽면에 설치된 모니터 위로 수많은 숫자와 이름들이 흐르기 시작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의원 송태섭, 김병도. 그리고 현 법무부 요직에 앉아 있는 고위 관료들의 차명 계좌 내역입니다. 매달 15일, 케이맨 제도에 설립된 유령회사 '알바트로스 홀딩스'를 통해 백야 재단의 자금이 흘러 들어갔습니다. 이 계좌들의 최종 소유주가 누구인지, 대검찰청 감찰부와 언론사 연합망에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3초입니다."

김 비서관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흔들렸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비싼 맞춤 정장의 깃을 적셨다.

"이... 이 미친 자가 무슨 짓을..."

"선택하십시오, 김 비서관님."

나는 아주 부드러운, 그래서 더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어조로 속삭였다.

"이 위조된 쓰레기를 들고 나가 법무부 전체를 백야 재단의 공범으로 파멸시키겠습니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꼬리를 자르고 살아남으시겠습니까?"

침묵이 긴장감을 넘어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으로 취조실을 채웠다.

잠시 후, 김 비서관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의 눈에 서린 것은 공포였다. 그는 더 이상 일개 검사나 형사 따위가 통제할 수 있는 판이 아님을 직감한 것이다.

나는 테이블 위의 이송 명령서를 천천히 손에 쥐었다.

그리고 강민우와 김 비서관이 지켜보는 앞에서, 두꺼운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찌지직.*

조용한 취조실 안에 종이가 찢어지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하태신... 너, 무슨 짓을...!"

강민우의 경악 섞인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종이를 다시 사등분으로, 그리고 여덟 등분으로 찢어발겼다. 하얀 종이 가루가 테이블 위로 눈처럼 날렸다.

나는 찢어진 기소 명령서 조각들을 한 줌 쥐어, 테이블 밑에 놓인 녹슨 철제 쓰레기통 안으로 던져 넣었다.

*툭.*

종이 뭉치가 쓰레기통 바닥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이딴 쓰레기 조각으로 법을 모독하지 마십시오. 이 취조실의 지배자는 당신들이 아닙니다."

완벽한 주도권의 장악이었다.

김 비서관은 더 이상 머무를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는 찢겨진 종이 조각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황급히 뒤를 돌아 취조실 철문을 열고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무거운 철문이 닫히는 굉음이 방 안에 울렸다.

이제 남은 것은 강민우뿐이었다.

그의 얼굴은 흙빛을 넘어 푸르게 죽어 있었다.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기획 수사와 법무부 임성이라는 거대한 야망이, 단 한 명의 프로파일러가 던진 진실의 그물에 걸려 완전히 찢겨 나갔음을 깨달은 것이다. 백야 재단은 실패한 사냥개를 절대 살려두지 않는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파멸이라는 두 글자만이 소용돌이치고 있을 터였다.

"아아아악!"

강민우의 입에서 짐승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눈이 뒤집힌 그가 이성을 잃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내가 아니었다.

그의 광기 어린 시선이 닿은 곳은, 내 바로 옆에서 허탈하게 서 있던 임철주 형사의 허리춤이었다. 가죽 권총 집안에 묵직하게 박혀 있는 38구경 리볼버 권총의 은빛 손잡이.

강민우의 손이 임철주의 권총을 향해 화살처럼 뻗어나갔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