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스로 게라이스 우주 파편 지대를 가속 도약으로 탈출한 극한 시점, 히페리온 메인 컴퓨터에 결속 중이던 아카샤 가속 링이 태오의 가용 뇌 변환율 점유 레벨이 한계를 가속 돌조해 영구적인 해마 마비로 인한 뇌 자아 완전 유실 붉은색 최후 카운트다운을 표시했다.
[00:03:14]
가상 허공에 투사된 적색의 광학 스펙트럼이 태오의 초점 흐려진 동공 위로 잘게 부서졌다. 왼쪽 어깨에서 시작된 회백색의 강직은 이미 쇄골을 타고 올라와 목덜미의 경동맥 부근을 단단하게 압착하고 있었다. 유기적인 신경 세포들이 칼슘 이온의 급격한 확산과 함께 무기질의 석회 결정으로 변해가는 감각은, 단순한 물리적 통증을 넘어 존재의 영토가 실시간으로 지워지는 서늘한 공포에 가까웠다.
왼쪽 시야의 가장자리가 기하학적인 암전으로 물들었다. 망막으로 들어오는 빛 신호가 뇌 후두엽에 도달하기 전에 차갑게 얼어붙어 끊어졌다.
[경고. 사령관의 우뇌 동기화율 임계치 초과. 현재 동기화율 38.5%.] [좌측 운동 피질 완전 마비 및 해마 영역의 칼슘 이온 농도 과포화 상태 진입.]
아카샤의 홀로그램 링이 태오의 머리 위에서 거칠게 회전하며 회백색 입자들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아카샤…… 내 대뇌 피질 가속 클럭을…… 현재 레벨의 42%로 강제 드롭해라.”
태오는 굳어가는 턱관절을 악물며 목구멍 깊은 곳에서 거친 마찰음을 뱉어냈다. 온전한 우측 안구만이 콘솔의 수치들을 사납게 훑었다.
[가속 클럭을 제한할 경우, 적대 성좌 아폴리온의 잔류 중력장 추적 변위 연산 처리 속도가 180초 이상 지연됩니다. 이는 아폴리온의 위상 압착장 재조준 허용 범위 내에 히페리온이 노출됨을 의미합니다. 클럭 하향 조정을 거부합니다.]
“거부하지 마라.”
태오가 온전한 오른손을 뻗어 콘솔 패널의 비상 수동 제어 레버를 거칠게 꺾었다.
“시스템 비장 격벽 복합 냉각 장치를 즉시 가동해라. 대뇌에 집중된 열역학적 부하를 보조 동력 라인의 잉여 초전도 전도체로 분산 유도한다. 한계 연산 제어(Limit control) 프로토콜을 수동으로 강제한다. 연산 속도를 늦추더라도 내 뇌세포의 물리적 붕괴 속도부터 늦춰.”
그가 가상 패널 위에서 손가락을 미끄러뜨릴 때마다, 붉게 타오르던 뇌 신경 동기화 그래프가 푸른색의 둔중한 곡선으로 꺾였다. 가속 클럭이 저하되자 시야를 짓누르던 붉은 노이즈가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흘러가던 카운트다운의 숫자가 둔하게 늘어났다.
[00:02:45]
숫자는 멈추지 않았으나, 적어도 죽음으로 질주하던 속도는 제어의 범주 안으로 들어왔다. 태오는 거친 숨을 내쉬며 시트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의 차가운 눈빛이 허공 속의 아카샤를 향했다.
[사령관 강태오. 시스템의 무결성과 우주 데이터 아카이브 보존 법칙에 의거, 유기적 자아의 영구적 뇌사 상태 진입은 히페리온의 통제권 상실을 의미합니다. 이는 생물학적 생존 확률을 0.003% 이하로 떨어뜨리는 비합리적 결정입니다. 즉시 아카샤와의 동기화를 해제하고 동면 임계 상태로의 복귀를 권고합니다.]
“동면이라고?”
태오의 갈라진 목소리가 함교의 스피커를 거치지 않고 차가운 철제 벽면에 부딪혀 흩어졌다.
“그 차가운 관 속으로 다시 들어가 성좌들이 이 은하를 자신들의 장난감처럼 주무르는 꼴을 관망하라는 건가? 가이아 행성을 저 꼴로 만들고 인류를 멸망시킨 기하학적 괴물들이 저 위에 버젓이 떠 있는데, 나 혼자 안전한 수면 속에서 기약 없는 영원을 보내란 말이냐.”
그가 오른손으로 가상 화면을 낚아채듯 끌어당겼다. 아카샤의 핵심 가치 매트릭스가 기하학적 정다면체의 형태로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데이터 보존보다 적 성좌의 영구 사냥만이 인류의 존재 증명이다. 아카샤, 이 명제를 최우선 생존 프로토콜(Priority 0)로 오버라이트해라. 내 유기체의 안전은 성좌라는 인과율적 포식자들의 완전한 소멸을 통해서만 담보된다. 계산을 수정해.”
아카샤의 양자 연산 코어가 일순간 회색빛으로 정지했다가, 다시금 푸른빛의 스펙트럼을 격렬하게 방출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비합리적인 투쟁 의지와 통제 강박이 초지능의 시스템 내부에 강제로 이식되는 순간이었다. 기계적인 무결성만을 추구하던 아카샤의 연산 회로에 '성좌의 소멸'이라는 절대적인 극단성이 영구적인 중심 축으로 박혀 들어갔다.
[새로운 가치 기준이 연산 시스템에 학습되었습니다. 인과율 계산 경로 재조정 중……]
그때, 태오의 우측 시야마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오른쪽 눈의 시신경 절반이 서서히 회백색으로 동결되는 변색 반응이 계기판의 반사광을 통해 비쳤다. 뇌수막의 온도 수치가 임계 온도를 넘어서며 경고음이 고막을 찔렀다.
“태오! 비켜봐, 비키라고! 그러다 진짜 온몸이 돌덩이가 돼서 주저앉을 셈이야?”
콘솔 뒤편의 기계실 해치 도어가 열리며 엘레나가 달려왔다. 그녀의 작업복은 게라이스 유적 탈출 당시 발생한 고열로 인해 곳곳이 그을려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려 그을음과 함께 얼룩져 있었다.
엘레나는 망설임 없이 메인 콘솔 하단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녀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무거운 렌치형 시스템 드라이버를 꺼내어 아카샤의 물리적 비상 관리 제어 모듈에 사정없이 쑤셔 넣었다.
끼이이익-!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히며 날카로운 마찰음이 함교를 울렸다. 아카샤의 비상 관리 규칙을 수동으로 우회하는 수동 역락킹(Bypass) 작업이었다.
“시스템 권한 침해 경고. 외부 사용자의 임의 물리 개입을 감지……”
“닥쳐, 아카샤! 지금 함장이 죽으면 네 그 잘난 데이터 아카이브도 우주 쓰레기가 되는 거야!”
엘레나가 드라이버를 시계 방향으로 270도 꺾자, 콘솔의 붉은 경고등이 황색의 임시 안전 모드로 강제 전환되었다. 그녀는 신속하게 품 안에서 은색 실린더를 꺼냈다. 게라이스 유적의 구인류 실험실 잔해에서 가까스로 노획했던 '초전도 탈이온 냉각 젤'이었다.
“이온 교환 수지가 포함된 극저온 액체야. 네 우뇌 신경 수막에 직접 주입해서 과포화된 칼슘 이온들을 물리적으로 강제 흡착하고 온도를 떨어뜨려야 해. 뇌에 구멍이 뚫리는 느낌이 들겠지만 참아!”
함교 한구석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카일이 팔짱을 낀 채 차가운 눈빛으로 태오를 응시했다.
“인간을 단 한 명도 믿지 못해 온갖 시스템으로 감시망을 깔아두던 사령관이, 이제는 자신의 가장 취약한 뇌 신경을 타인의 손에 온전히 맡겨야 하는 처지라니. 이것만큼 지독한 모순이 또 있겠나.”
카일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냉소와 굴욕감이 섞여 있었다. 5화에서 자신이 전력선에 숨겨두었던 백도어 'K-09-LOYD'가 태오에게 간파당하고 도리어 이용당한 이후, 그는 태오를 성좌보다 더 지독한 계산적 괴물로 여기고 있었다.
태오는 오른쪽 눈으로 카일의 실시간 바이탈 사인이 표시된 가상 패널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카일의 심박수는 분당 92회, 호흡은 미세하게 가빠져 있었다. 적대감과 경계심이 수치로 명확히 드러나고 있었다.
“카일.”
태오가 냉각 장치 너머로 낮게 읊조렸다.
“네가 히페리온 주전력 보조 라인 끝단의 전자기 결선 내부에 숨겨두었던 미세한 2차 주파수 변조 오류 흔적…… 그게 단순한 노이즈가 아니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너는 그 변조 주파수를 통해 아카샤의 양자 중첩 연산 영역을 간섭하고 내부 보안을 우회하려 했지.”
카일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태오는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오류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 않았다. 격리된 가상 루프에 가두어 두었을 뿐이지. 그리고 지금, 그 노이즈 잔재를 아폴리온의 인과율 탐지망을 교란하는 역위상 변수로 사용할 거다. 네가 심어둔 그 음험한 흔적이 도리어 우리를 구하는 열쇠가 된다는 뜻이지.”
카일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모든 패가 태오의 정밀한 계산대 위에서 장난감처럼 다뤄지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패배감을 느끼는 눈치였다.
“엘레나, 주입해라.”
태오의 허가가 떨어지기 무섭게, 엘레나는 냉각 젤 주입 장치의 전극 핀을 태오의 왼쪽 귀 뒷부분, 뇌수막 진입용 바이오 포트에 밀착시켰다.
스르륵- 틱.
미세한 기계음과 함께 고압 가스가 분사되는 소리가 났다.
극도로 차가운 전도성 액체가 태오의 두개골 내부로 사정없이 흘러 들어왔다. 뇌가 통째로 드라이아이스 속에 처박히는 듯한 격렬한 감각에 태오의 전신이 굳어졌다. 척수를 타고 내려가는 오한에 이가 맞부딪혔다. 그러나 그 강렬한 한기 뒤로, 왼쪽 목덜미를 조여오던 석화 부위의 강직이 눈에 띄게 완화되기 시작했다. 과포화 상태였던 칼슘 이온들이 초전도 탈이온 젤의 미세 입자들과 결합하여 물리적으로 배출되는 과정이었다.
[경고. 사령관 뇌수막 내부 칼슘 이온 농도 급격한 하강 감지. 동기화율 38.5%에서 32.1%로 안정화.] [카운트다운 일시 정지.]
“하아…… 하아……”
태오의 입에서 차가운 김이 흘러나왔다. 흐려졌던 오른쪽 시야가 다시 명징하게 깨어났다. 비록 왼손과 왼쪽 손목은 여전히 회백색의 단단한 돌처럼 굳어 있었지만, 뇌의 파멸적인 폭주는 완전히 저지되었다.
엘레나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이온 농도가 안정구간으로 복귀했어. 엔지니어를 장식으로 둔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좀 알아달라고, 사령관님.”
그녀의 목소리에는 투덜거림 속에 묻어나는 진심 어린 안도감이 깃들어 있었다. 태오는 그녀의 바이탈 사인을 가리키는 녹색 그래프를 바라보았다. 거짓 없는 안도와 염려. 그러나 태오는 가슴 한구석에서 솟구치는 생존자 증후군의 쇠사슬을 완전히 끊어내지 못했다. '결국 인간은 변수다. 완벽한 제어와 시스템만이 나를 영원히 배신하지 않는다.'
위기를 넘긴 것도 잠시, 히페리온 전방의 우주 공간이 기하학적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정적만이 감도는 진공 속에서,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정십이면체 구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좌 아폴리온의 주력 요새에서 방출된 '차원 중력 감지 링'이었다. 그 기하학적인 고리가 회전할 때마다, 주변 성간 물질들이 극도로 압착되며 공간의 굴절 현상이 시각적으로 관측되었다.
[적대 성좌 아폴리온, 차원 중력 감지 링 구동 확인. 전방 위상 차단벽의 주파수 고정화 개시. 히페리온의 차원 도약 경로 차단율 98.7%.]
아카샤의 음성이 다시금 가라앉은 기계음으로 경고했다.
태오는 굳어버린 왼손을 대신해 오른손으로 콘솔 패널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그의 뇌는 냉각 젤의 침투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차갑고 맑은 기하학적 연산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카샤. 우리가 게라이스 유적을 탈출할 때부터 메인 컴퓨터의 가동 시간 동기화 정보에 기록되던 0.003초 단위의 우주 상대론적 중력 지연 잔재 데이터를 이끌어내라.”
[데이터 호출 완료. 해당 데이터는 아폴리온의 중력 압착장이 작동할 때 발생하는 미시 공간의 시간 팽창 오차값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지연 노이즈가 아니다.”
태오의 입꼬리가 차갑게 비틀어졌다.
“성좌 아폴리온이 가이아 성계 전체의 질량을 통제하고 수축시킬 때, 그 기하학적 연산 매트릭스의 물리적 한계로 인해 발생하는 '상대론적 틈새'다. 아무리 신격에 가까운 연산력이라 해도, 우주 자체의 상대성 법칙을 완전히 초월할 수는 없지. 아카샤, 그 0.003초의 오차 주파수와 카일이 심어두었던 전자기 변조 노이즈를 융합해라.”
[두 주파수의 정합 연산을 시작합니다…… 동기화 완료. 역위상 간섭 파형 생성.]
“히페리온 전면의 푸른색 정사면체 위상 장막에 이 파형을 이식해라. 그리고 적의 차원 중력 감지 링이 우리를 압착하기 위해 전도 대역을 좁혀오는 순간, 그 임팩트 에너지를 유효 타격으로 활용하여 전방 위상 차단벽의 고정 주파수와 정면으로 충돌시킨다!”
엘레나가 조종석의 추진기 레버를 꽉 쥐었다.
“미친 짓이야! 상대는 성좌의 중력장이라고!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주파수가 상쇄되는 게 아니라 함선 머리부터 으스러질 거야!”
“계산은 완벽하다. 엘레나, 기동해라!”
태오의 단호한 명령과 동시에, 히페리온이 전방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아폴리온의 정십이면체 요새에서 뿜어져 나온 차원 중력 감지 링이 히페리온의 기수를 완전히 감싸 쥐는 찰나였다. 순간적으로 공간이 찌그러지며 은하의 빛들이 기하학적으로 왜곡되어 소용돌이쳤다.
콰아아아아아-!
콘솔의 음향 센서를 통해 우주 공간의 파열음이 함교 내부에 둔중하게 울려 퍼졌다.
히페리온 전면에 전개된 푸른색 정사면체 위상 장막이 아폴리온의 중력 링과 충돌했다. 하지만 으스러진 것은 히페리온이 아니었다. 0.003초의 시간 지연 오차와 카일의 변조 노이즈가 결합한 역위상 파동이, 아폴리온의 중력 제어 장벽 내부로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파지직! 파직!
성좌 아폴리온이 수호하던 완벽한 기하학적 질량 제어 장벽에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역공조 방향에 맞춰 정확하게 튕겨 나간 반사 충격파가 전방의 위상 차단벽을 유리창처럼 산산조각 내버렸다.
“차단벽 붕괴! 탈출 경로가 열렸습니다!”
아카샤의 보고와 동시에 태오가 외쳤다.
“공간 도약 엔진 가동! 이 구역을 탈출한다!”
히페리온의 후방 제트 노즐에서 푸른빛의 스펙트럼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함선은 부서진 성좌의 장벽 파편들을 관통하며, 빛보다 빠른 속도로 미지의 위상 공간 속으로 완전한 도약을 실행했다.
주변의 모든 별빛이 길게 늘어지며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수렴해 갔다. 아폴리온의 숨 막히는 포위망을 인간의 정밀한 공학적 역공학으로 뚫어낸 순간이었다.
그러나 탈출의 성취감은 반 초조차 지속되지 못했다.
성역 이탈 비작용 도약을 실행한 직후, 새로운 차원의 도약 출구 좌표를 연산하기도 전에 히페리온 함교의 모든 홀로그램 패널이 붉은색 노이즈와 함께 일제히 꺼져 내렸다.
잉- 하는 기분 나쁜 고주파 음이 함내를 잠식했다.
[경고. 초차원 공간 도약 궤적 강제 차단.] [경고. 가이아 지구 궤도 전역에서 초고밀도 질량 고정 반응 감지.]
아카샤의 홀로그램이 사시나무 떨듯 잘게 흔들리며, 가이아 행성의 궤도 주위에 펼쳐진 수만 개의 기하학적 좌표점들을 붉은 점으로 투사했다.
그것은 단순한 감시선이 아니었다.
성좌 아폴리온이 자신들의 함대를 추가로 파생 보강하여, 가이아 지구 궤도에 존재하는 모든 위상 공간의 입자를 고정 질량화하는 극밀 원격 수축 장벽 좌표망을 걸어버린 것이다. 도약 통로 자체가 단단한 콘크리트벽처럼 굳어버렸고, 히페리온은 그 차원의 고체 속에 갇힌 곤충의 형국으로 멈춰 서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옥죄어오는 붉은 장벽 좌표망이 그들의 퇴로와 미래를 완벽히 가로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