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과과광!
쿠르릉거리는 굉음과 함께 발밑의 대지가 미친 듯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베르트가 서 있던 연무장 바닥에서 솟구쳐 오른 것은 단순한 흙먼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검붉은 빛을 내뿜는 거대한 결정체, 사관학교의 악명 높은 전장 제어 장치인 ‘혈석(血石)’의 장벽이었다.
"꺄악!"
엘리시아가 비명을 삼키며 뒤로 급히 물러섰다. 그녀의 고결한 은빛 머리칼이 진동 여파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순식간에 사방을 에워싼 십여 미터 높이의 붉은 장벽은, 마치 거대한 괴수의 이빨처럼 아가리를 다물며 연무장의 하늘을 가로막았다.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던 아치형 철문은 이미 거대한 돌무더기 아래에 완전히 깔려 형체도 없이 으스러진 상태였다.
"이시우 님! 이것은……!"
엘리시아가 황급히 검자루를 쥐어 잡으며 이시우의 옆으로 바싹 붙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경악과 함께 본능적인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이시우의 눈에 들어온 것은 눈앞의 붉은 장벽보다 더 붉게 타오르는 시스템 경고창이었다.
[! 긴급 공지 !] [사관학교 전역에 가동되는 대형 미궁인 '제1차 실전 관문'의 강제의식 및 문호가 개방됩니다!] [대상 구역 내의 모든 생존자는 즉시 평가 시험에 강제 참여 조치됩니다.]
‘와, 타이밍 한번 진짜 예술이네. 엑스트라 양아치 하나 보냈더니 이번엔 아예 맵 전체가 나를 죽이려고 대가리를 들이미는구나.’
이시우는 겉으로는 세상 모든 풍파를 초탈한 허무맹랑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개발자들의 가문 안부를 뼈저리게 묻고 있었다.
이 '제1차 실전 관문'은 원작 게임에서도 악랄하기로 소문난 초반부의 통곡의 벽이었다. 말이 좋아 실전 테스트지, 실상은 낙제생들을 걸러내어 강제 퇴학시키거나 마수의 먹이로 던져주는 합법적인 도살장이나 다름없었다.
이시우는 침착하게 턱을 괴고 짱구를 굴리기 시작했다.
‘원작 기믹대로라면 이 장벽을 우회해서 벽 타기 버그로 혼자 탈출하는 루트가 있었지. 좋아, 엘리시아고 뭐고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
그가 은글슬쩍 장벽의 틈새 중 연산 오류가 자주 일어나는 모서리 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띠링!
[시스템 제한 경고!] [본 관문은 '3인 협동 멀티플레이' 규격으로 강제 락온되었습니다.] [현재 파티 인원: 2/3 (이시우, 엘리시아 폰 로젠가르트)] [최소 참가 인원(3명)을 충족하지 못한 채 관문 구역을 이탈할 시, '부정행위자'로 판정되어 즉사급 광역 소멸 마법 '인과율의 심판'이 발동합니다.] [제한 시간: 01분 42초]
"……아니, 씨발?"
이시우의 입에서 본능적인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즉사? 소멸 마법?
혼자 꿀 빨며 탈출하려던 이시우의 원대한 계획이 시스템의 억까 한 방에 산산조각이 났다.
아무리 그가 온갖 버그를 부리는 고인물이라지만, 스탯 자체가 쪼렙인 현재 상태에서 시스템이 직접 내리는 즉사 판정을 정면으로 맞으면 그대로 캐릭터 삭제였다.
무조건 한 명이 더 필요했다. 그것도 단 1분 40초 안에.
이시우의 고개가 팽이처럼 빠르게 돌아갔다.
무너져 내리는 천장 수로와 굳게 닫힌 혈석 벽 사이,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구석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거대한 덩치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 나 여기서 죽는 건가…… 기사 가문의 수치로 이렇게 개죽음을……."
우람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감싸 쥔 채 울먹이고 있는 사내.
바로 기사 가문 출신이면서도 체내 마나 통로가 완전히 막혀 ‘마불통’, ‘똥떵어리’라 불리며 동기들에게 멸시받던 낙제생 탱커, 강태현이었다.
"거기 너."
이시우가 번개처럼 달려가 강태현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힉?! 괴, 괴물?!"
강태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양 볼에는 땟구멍과 눈물이 뒤섞여 기괴한 얼룩이 져 있었다.
"괴물은 무슨 괴물이야. 살고 싶으면 당장 파티 맺어."
"예, 예? 파티요? 하지만 전 마나도 제대로 못 쓰고, 방패만 들 줄 아는 고기방패인데…… 저 같은 쓰레기가 들어가면 파티 전체가 전멸할 겁니다! 그냥 저를 버리고 가십시오!"
강태현은 제 주제를 안다는 듯 절망적인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가문에서도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으며 자라온 탓에, 그의 자존감은 이미 바닥을 뚫고 내핵까지 추락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시우에게는 그의 자존감 따위를 케어해 줄 시간적 여유가 단 1초도 없었다. 남은 시간은 이제 50초 남짓이었다.
"야."
이시우가 강태현의 어깨를 강하게 흔들며, 짐짓 세상에서 가장 깊고 장엄한 목소리를 지어냈다.
눈은 최대한 먼 산을 바라보며, 목소리 톤은 반 옥타브 낮춰서.
"쓸모없는 존재란 없다. 네 가치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내가 쓸모 있다고 판단했으면, 넌 쓸모 있는 거다. 그러니까 군소리 말고 내 손 잡아."
사실 이시우의 머릿속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이 새끼 덩치 보니까 피통 하나는 오지게 많겠네. 보스 방에서 어그로 끌어줄 고기방패로 딱이다!'
하지만 그 오만한 외침은, 평생을 무시와 괄시 속에서 살아온 강태현의 심장에 마치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내 가치를…… 이시우 님이……?"
강태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는 숨을 헐떡이는 이시우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베르트와의 숨 막히는 기싸움과 시스템 압박 속에서 마력을 극도로 소모한 탓인지(사실은 그냥 갑자기 뛰어서 숨이 찬 것뿐이었다), 이시우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거기에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까지.
강태현의 머릿속에서 엄청난 왜곡 필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아…… 이시우 님은 이미 방금 전의 전투로 마력이 바닥난 상태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지치셨어. 그런데도…… 오직 낙제생인 나 하나를 구하기 위해, 이 위험한 관문 속으로 나를 억지로 끌어들여 생존 기회를 주시려는 거구나. 나 같은 쓰레기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울컥, 강태현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올랐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타인의 순수한 신뢰와 구원의 손길.
강태현은 콧물을 훌쩍이며 이시우의 거친 손을 두 손으로 꽉 맞잡았다.
"이시우 님……! 이 무지하고 나약한 강태현, 오늘부터 제 목숨은 이시우 님의 것입니다! 비록 마나는 쓸 줄 모르나, 제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당신의 방패가 되겠습니다!"
[강태현(F급 수호자)이 파티에 참여했습니다.] [파티 인원 충족: 3/3] [제1차 실전 관문, '피의 미궁'이 정식 가동됩니다!]
"어, 어…… 그래. 많이 막아라. 뼈는 부러지지 말고."
이시우는 강태현의 필요 이상으로 뜨거운 눈빛에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슬그머니 손을 빼냈다.
그 옆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엘리시아 역시, 눈시울을 붉히며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역시 이시우 님…… 베르트의 음모로 가득 찬 이 시험장 속에서도, 소외받고 버림받은 약자들을 먼저 챙기시는군요. 스스로를 극한의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타인을 구원하는 그 숭고한 정신…… 정말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아니, 저기요 누나들, 형씨들. 제발 소설 좀 그만 쓰세요. 난 그냥 즉사 마법 피하려고 머릿수 채운 거고, 보스 방에서 대신 맞아줄 탱커가 필요했을 뿐이라니까?’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구태여 진실을 밝혀서 이 든든한 고기방패의 사기를 꺾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지금 이시우의 눈앞에는 현실보다 더 중요한 ‘진짜 세상’이 열려 있었다.
스스스스……
허공에 오직 이시우의 눈에만 보이는 반투명한 푸른빛의 스크린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웃사이더 방송망 Live!] [방제: 사관학교 1등급 아싸의 꼼수 미궁 돌파 방송 (feat. 고기방패 확보 완료)] [현재 시청자 수: 1,842명]
채팅창은 이미 폭발하기 일보 직직이었다.
- ㅋㅋㅋ 와 시우형 입 터는 거 보소 ㅋㅋㅋ '내가 쓸모 있다고 판단했으면 넌 쓸모 있는 거다' 오글거려 뒤지는 줄 ㅋㅋㅋ - 탱커 새끼 눈빛 봐라 ㅋㅋㅋ 완전히 종교 입덕한 신도 표정임 ㅋㅋㅋ - 그 와중에 엘리시아 눈물 훔치는 거 실화냐? ㅋㅋㅋ 이 정도면 어그로 가스라이팅 자격증 1급 줘야 함 - 근데 방장아, 저 뒤에 붉은 안개 끼는 거 심상치 않은데? 몹 젠되는 거 아님?
시청자들의 지적이 정확했다.
그들이 발을 딛고 있는 미궁의 통로 사방에서 기괴한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늑대의 형상을 한 몬스터인 '혈랑(血狼)' 수십 마리가 붉은 안개 속에서 눈을 번뜩이며 기어 나왔다.
크르르르르……!
보통의 아카데미 학생들이라면 무리를 지어 전술을 짜고 마법을 난사해야 겨우 잡을 수 있는 정예 마수들이었다.
하지만 고인물 스트리머 이시우의 사전에는 '정상적인 전투'라는 단어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태현아."
"예, 이시우 님! 말씀만 하십시오!"
강태현이 우람한 가슴을 쾅쾅 치며 대답했다.
"저기 벽면 오른쪽에 튀어나온 붉은 벽돌 보이지?"
이시우가 가리킨 곳은 미궁 통로 한구석, 미세하게 틈새가 벌어져 있는 인테리어용 벽돌이었다.
사실 저것은 원작 개발자가 맵을 디자인할 때 텍스처 정렬을 잘못해서 발생한 유명한 ‘판정 왜곡 지형’, 일명 ‘끼임 유도 벽돌’이었다.
- 오? 저거 2화에서 강당 구석에 있던 그 버그 벽돌이랑 같은 판정이냐? - 대가리 깨진 고인물 등장 ㅋㅋㅋ 또 지형지물 억까 들어가죠? - 야 저 틈새에 몹 끼워 넣으면 샌드백 행인데 ㅋㅋㅋ
"태현아, 네가 저 벽돌을 등지고 방패를 올린 채 딱 버텨라. 몹들이 오면 절대 피하지 말고 그냥 그 자리에서 굳건히 서 있기만 해. 알겠지?"
"제 몸을 미끼로 쓰시려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저들의 이빨이 제 가죽을 찢을지언정,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강태현은 비장하게 외치며 이시우가 지시한 '끼임 벽돌' 앞으로 달려가 거대한 철퇴 방패를 바닥에 쾅 찍었다.
크아아앙!
피에 굶주린 혈랑 세 마리가 동시에 강태현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도약했다.
일반적인 물리 법칙이라면 강태현의 거구는 혈랑들의 강력한 충격력에 밀려 뒤로 나동그라져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이시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지금이다. 채팅창 버그 활성화!’
[시청자 '벽돌성애자' 님이 100포인트를 후원하며 드립을 시도합니다!] [후원 내용: "와, 저 덩치에 저기 끼어 있으면 몹들이 와서 박치기하다가 뇌진탕 오겠네 ㅋㅋㅋ 완전 인간 벽돌 그 자체"]
[시스템 동기화 완료!] [시청자의 밈(Meme)이 실제 물리 법칙으로 구현됩니다.] [특수 효과: '인간 벽돌 판정' 발동!] [강태현의 물리적 충돌 크래시 판정이 300% 고정되며, 배후의 벽면 데이터와 일시적으로 '완전 결착' 상태가 됩니다.]
쿵-!!!
혈랑들이 강태현의 방패에 부딪치는 순간, 기괴한 인과율 왜곡이 발생했다.
마치 강철로 만든 성벽에 부딪친 것처럼, 혈랑들은 강태현을 단 1밀리미터도 밀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머리가 강태현의 방패와 뒤쪽의 오정렬된 벽돌 틈새 사이에 기괴하게 ‘끼여’ 버리는 연산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버둥버둥!
"어, 어라……?"
강태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엄청난 충격이 올 것이라 예상하고 질겁했건만, 혈랑들은 그의 방패 틈새에 대가리가 낀 채 허공에서 발만 터무니없이 버둥거리고 있었다. 어떠한 데미지도 그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엘리시아, 샌드백 들어왔다. 쑤셔."
이시우가 나른한 목소리로 신호를 보냈다.
"……아!"
엘리시아는 그 순간 소름 돋는 전율을 느꼈다.
단순히 무식하게 버티는 탱킹이 아니었다. 지형의 미세한 고저 차와 적들의 돌진 경로, 그리고 강태현의 신체 면적까지 완벽하게 계산해 내어 적들을 한곳에 강제로 고정시키는 신의 전술.
"과연…… 이시우 님의 혜안은 상상을 초월하는군요. 알겠습니다!"
쉬익! 팟!
엘리시아의 고결한 검끝이 푸른 마력의 궤적을 그리며 움직였다.
강태현의 방패 사이에 끼어 꼼짝도 못 하던 혈랑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목덜미를 관통당해 붉은 마력의 가루가 되어 부스러져 내렸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 이거 진짜 날로 먹네 ㅋㅋㅋ - 몹들 대가리 끼어서 버둥거리는 거 개웃김 ㅋㅋㅋ - 이게 사관학교 수석 엘리트와 F급 낙제생의 완벽한 콜라보레이션? 가슴이 웅장해진다 ㅋㅋㅋ - 방장 뷰어십 개떡상 중 ㅋㅋㅋ 벌써 2천 명 돌파함!
[실시간 뷰어십 급상승으로 인해 '아웃사이더 방송망'의 마력 동기화 효율이 증가합니다.] [이시우의 임시 스탯이 상승합니다: 민첩 +3, 감각 +5]
수치상으로는 분명 개이득이었지만, 이시우의 등 뒤에 서늘한 식은땀이 흘렀다.
화면 우측 하단에 조용히 껌빡거리는 붉은 게이지가 보였기 때문이다.
[경고! 시스템 보안 경고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보안 경고도: 12.05%] [시스템 방화벽이 외부 불법 인과율 변조(방송 동기화)를 감지하기 시작합니다.] [미궁 내부의 난이도 조절 장치가 비합리적으로 난폭해집니다.]
‘아, 씨발. 시청자 늘어나는 건 좋은데 보안 경고도 올라가는 속도가 제정신이 아니네.’
실제로 미궁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통로 벽면의 붉은 혈석들이 기괴하게 회전하며 날카로운 칼날처럼 변하기 시작했고, 저 멀리 심층부에서 들려오는 마수들의 포효 소리도 눈에 띄게 포악해졌다.
시스템이 이시우라는 '버그 오염원'을 제거하기 위해 맵 전체의 난이도를 억지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시우 님, 공기가 변했습니다. 미궁의 마력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치솟고 있어요."
엘리시아가 검을 고쳐 잡으며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크흠, 걱정할 거 없어. 원래 시험이란 게 뒤로 갈수록 매운맛이 되는 법이니까."
이시우는 태연한 척 어깨를 으쓱였다.
실상은 속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 상태로 보안 경고도가 더 올라가서 '집행관 제로'의 분신이라도 난입하는 날에는 진짜 게임 오버였다.
최대한 빨리 이 관문을 깨부수고 안전 구역으로 도망쳐야 했다.
"태현아, 기분 어때?"
이시우가 슬그머니 강태현에게 다가갔다.
"이시우 님…… 저, 제가 정말로 저 괴물 같은 혈랑들의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낸 겁니까? 제 몸이 마치 대지와 하나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강태현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며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했다.
평생 쓸모없는 고기방패라는 소리만 듣던 그였다. 그런 자신이 사관학교 최고의 천재인 엘리시아와 이시우의 파티에서 당당히 일인분, 아니 그 이상의 역할을 수행해 낸 것이다.
"당연하지. 넌 원래 훌륭한 탱커야. 내가 보는 눈이 좀 있거든."
이시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강태현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 임마. 넌 아주 훌륭한 샌드백이야. 앞으로도 내 기행과 트롤링을 온몸으로 받아내 줄 아주 단단하고 미련한 방패지. 그런 고기방패를 내가 어디서 또 구하겠냐?'
이 속보이는 검은 속내를 알 리 없는 강태현은, 이시우의 따뜻한(?) 격려에 완전히 눈이 뒤집혔다.
그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었다.
"이시우 님…… 저,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목숨 다 바쳐서 보필하겠습니다!"
"오냐, 오냐. 울지 말고 앞장서라."
이시우는 대충 강태현의 등을 떠밀며 미궁의 심층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청자들은 이 기괴한 주종 관계의 탄생에 배를 잡고 구르며 후원금을 쏟아내고 있었다.
- ㅋㅋㅋ 강태현 저 새끼 완전 가스라이팅 완료됐네 ㅋㅋㅋ - 시우의 '고기방패 가스라이팅' 강좌, 단돈 100포인트! - 근데 진짜 시우는 아싸라면서 조련 실력은 웬만한 대기업 스트리머 뺨치네 ㅋㅋㅋ - 엘리시아도 옆에서 감동받아서 눈빛 아련해진 거 보소 ㅋㅋㅋ
그들의 발걸음은 미궁의 가장 깊은 곳, 첫 번째 실전 관문의 출구이자 클리어 판정석이 존재하는 ‘심판의 광장’에 다다랐다.
저 멀리 하얗게 빛나는 복귀용 포탈이 눈에 들어왔다.
"휴, 드디어 끝났네."
이시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포탈을 향해 걸어가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구구구궁-!!!
갑자기 포탈 바로 앞의 대지가 거대하게 솟구쳐 오르며, 그들의 귀환로를 완전히 부수어 버렸다.
엄청난 질량의 흙과 바위가 뒤섞여 거대한 거인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사관학교의 통제자이자 이시우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베르너 교수가 기만전술로 조작해 놓은, 난이도 조절 실패의 산물.
규격 외의 최상급 마수, '대지 골렘(Earth Golem)'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쿵-!!!
골렘이 거대한 바위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자, 그 파편들이 이시우 일행의 등 뒤로 쏟아져 내리며 퇴로를 완전히 봉쇄해 버렸다.
"……퇴로가 끊겼습니다!"
엘리시아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미궁 전체가 무너지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크기의 거석 괴물이 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천천히 붉은 안광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