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적의 검끝이 스치는 찰나의 공기가 이시우의 뺨을 서늘하게 식혔다. 그러나 이시우의 머릿속은 지극히 차분했다.

'지금이다.'

그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기사의 육중한 발목 아래를 정확히 겨냥했다. 힘으로 기사를 쓰러뜨릴 필요는 없었다. 그저 물리 법칙의 사소한 구멍을 쿡 찌르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이시우가 발을 뻗어 기사의 뒷꿈치를 가볍게 툭 겠다.

정확히는 기사가 디디려던 바닥의 흙덩이를 걷어차 시야를 흐리고, 마찰력 연산 오류를 유도한 것이다.

*휘청-!*

"어……?"

기사의 거구 중심이 급격하게 무너졌다. 지면에 박힌 대검의 반동과 억지로 휘두른 회전력이 한데 꼬여 버렸다.

스스로의 힘을 이기지 못한 기사는 허공을 허우적거리다, 자신이 파놓은 깊은 흙구덩이 속으로 머리부터 사정없이 처박혔다.

*쿵-!*

그 가공할 무게감에 훈련장 전체가 들썩였다.

[시스템 에러: 대상의 물리 연산 한계 초과.] [변종 집행 기사의 내구도가 강제로 0으로 고정됩니다.]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눈앞에 찬란하고 거대한 황금빛 시스템 메시지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 모의 전투 시험 클리어! ★]** [클리어 시간: 01분 42초] **[★ 사관학교 개교 이래 최단 시간 기록 갱신! ★]** [기존 기록: 03분 15초 (달성자: 베르너)]

**[전투력 수치 격상!]** **[전투력: 10 ▷ 65]**

[특별 정산 보상!] **[보상: 마력 +2 (현재 마력: 6)]** **[스킬: '아무튼 안 맞음(F급)'을 획득했습니다!]** [효과: 적의 공격을 프레임 단위로 회피할 시, 다음 1회 공격의 치명타 확률이 100% 증가합니다.]

"크어억! 도파민 터진다!"

이시우는 솟구치는 마력의 온기에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전투력 수치가 무려 6배 이상 뻥튀기되었다. 게다가 최단 시간 기록 갱신이라니. 이보다 더 완벽한 방송 각이 어디

있으랴!

이시우의 입꼬리가 귀걸이에 걸릴 듯 비틀려 올라갔다. 심장이 갈비뼈를 사정없이 두들겨 대는 대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전투력 10짜리 참피가 단 1분 42초 만에 전투력 65의 규격 외 괴물이 되었다. 이 정도 성장 속도라면 대기업 스트리머는커녕, 은퇴 후 강남에 빌딩 빌딩을 세우고 건물주로 떵떵거리는 미래도 머지않았다.

허공에 떠오른 파란색 방송창이 미친 듯이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했다.

========================================= [실시간 시청자 반응 (현재 시청자: 1,402명)]

- 댕댕이마스터: 와 ㅋㅋㅋㅋㅋ 방금 구른 거 실화냐? 무슨 개구리 뒷다리 뻗는 줄 알았네 ㅋㅋㅋㅋㅋ - 뇌절차단기: 굴러서 피하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프레임 캔슬 점프 섞는 거 보소; 저 새끼 인간 맞냐? 손가락에 모터 달았음? - 킹갓아웃사이더: ㅋㅋㅋㅋㅋㅋ 마수 기사 쉑 땅바닥에 대가리 박고 무 뽑히듯이 박힌 거 개웃기네 ㅋㅋㅋㅋㅋ 갓겜 물리 엔진 수준 ㅋㅋㅋㅋㅋ - 맵분석가: 야, 근데 저기 구석탱이 좌표 (124, 75) 쪽에 깨진 물리 벽돌 하나 둥둥 떠 있는 거 나만 보임? 텍스처 겹쳐서 판정 꼬인 거 같은데 저거 밟으면 맵 뚫리겠는데? =========================================

'엉?'

이시우의 날카로운 고인물 레이더가 '맵분석가'의 채팅을 포착했다.

슬쩍 고개를 돌려 훈련장 가장자리, 어두컴컴한 돌벽 구석을 훔쳐보았다. 과연 그랬다. 얼핏 보면 평범한 그림자 같았지만, 자세히 보니 공중에 연회색 벽돌 한 장이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달린 것처럼 어정쩡하게 둥둥 떠 있었다.

시스템의 텍스처 렌더링 오류로 인해 발생한, 개발자조차 모르는 '판정 왜곡 지형'이었다.

'오호라. 저걸 밟고 도약하면 공중 판정이 무한으로 갱신되겠는데?'

이시우는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침을 꿀꺽 삼키며, 그 투명 벽돌의 위치를 뇌리 깊숙한 곳에 박아 넣었다. 언젠가 시스템을 완전히 엿 먹여야 할 대형 관문이 찾아왔을 때, 저 버그 벽돌은 상상을 초월하는 사기 카드가 될 터였다.

그때였다.

"이, 이게…… 대체 무슨……."

훈련장 구석의 관전석에서 멍하니 서 있던 한 소녀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백금발의 머리칼을 단정하게 땋아 내린 차석 입학생, 엘리시아 폰 로젠가르트였다. 그녀의 새하얀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보석 같은 청색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흙구덩이에 처박혀 버둥거리는 변종 기사에게서, 이내 이시우의 허름한 훈련복으로 옮겨갔다.

"방금 그 움직임……."

엘리시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강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 이시우가 보여준 괴상망측한 '구르기 캔슬 점프'가 초 단위로 쪼개져 재생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꼴사나운 발길질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야.'

엘리시아는 소름이 돋아나는 팔을 쓸어내렸다.

'적의 살기가 가장 극에 달한 순간, 마력의 흐름을 완벽히 읽고 최소한의 회피 궤적을 그렸다. 구르는 척하면서 공중에서 신체를 비틀어 가속도를 지우고, 단 1인치의 오차도 없이 적의 등 뒤로 미끄러져 들어갔어. 그리고 마지막 발길질…….'

그것은 단순한 트롤링이 아니었다.

거대한 마수 기사의 무게중심과 지면의 연찰력을 역이용해, 단 한 번의 터치로 적을 자멸하게 만든 '극의(極意)의 전술'. 마력을 거의 소모하지 않고 오직 순수한 물리적 역학계산만으로 최상위 등급의 적을 무력화한 것이다.

'이시우…… 당신은 대체 정체가 뭐지?'

엘리시아는 눈시울이 시큼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학원의 비열한 기득권 세력과 엄격한 규율에 짓눌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밑바닥 아싸로 위장한 채 홀로 이토록 처절하고 완벽한 무리를 연마해 온 천재. 남들의 비웃음을 사면서도 묵묵히 제 갈 길을 걸어온 고독한 강자.

"정말…… 잔인할 정도로 고결한 사람이었군요."

엘리시아가 조용히 읊조린 목소리는 이시우에게 닿지 않았다.

이시우는 그저 속으로 '아, 템깡 마렵다. 꼼수 주머니 언제 열지?' 하며 싱글벙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강철로 된 훈련장 대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열렸다.

엄청난 기세의 마력이 실내를 짓누르며 들이닥쳤다. 공기가 얼어붙듯 차가워졌고, 이시우의 피부 위로 삐죽 소름이 돋았다.

그 기운의 진원지에서 걸어 나오는 사내. 사관학교의 수석 보좌관이자, 이시우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베르너 교수의 심복, 독선 강사 '베르트'였다.

베르트는 흙구덩이에 처박힌 마수 기사를 힐끗 보더니, 이내 가래침을 바닥에 퉤 뱉었다.

"천박한 야바위꾼 새끼가."

베르트의 뱀처럼 가늘어진 눈매가 이시우를 쏘아붙였다. 그의 손에는 붉은색 직인이 찍힌 두꺼운 서류 뭉치가 들려 있었다.

"이시우. 신성한 시험에서 부정한 꼼수와 비정상적인 마력 조작을 부린 죄를 물어, 학칙 제14조에 의거해 즉각 퇴학 처분을 집행한다."

베르트가 차가운 비웃음을 머금은 채, 퇴학 서류를 이시우의 코앞에 사정없이 내던졌다.

바닥으로 허무하게 추락하는 종이 쪼가리들을 내려다보며, 이시우는 콧방귀를 꼈다.

'퇴학? 야, 이 대머리 독수리 부하 놈아. 내가 방금 세운 신기록 안 보이냐?'

물론 이 대사는 마음속으로만 삼켰다. 나름대로 품위 있는 아싸 스트리머로서의 이미지를 지켜야 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지금은 더 시급한 일이 있었다.

이시우는 신속하게 인벤토리를 열었다. 아까 얻은 따끈따끈한 '아웃사이더의 꼼수 주머니(F급)'가 앙증맞게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이 바로 가챠 타이밍이지!'

[아이템을 개방합니다.] **[★ 획득 아이템: '강제 합의용 막도장' (등급: F, 소모성) ★]** [효과: 일방적인 계약서나 부당한 통지서에 이 도장을 찍는 순간, 시스템 연산 오류를 유발하여 조항의 내용을 제안자에게 가장 불리한 방향으로 180도 뒤틀어 버립니다. (1회용)]

"오호라?"

이시우의 입꼬리가 자비 없이 비틀려 올라갔다. 이거 완전히 템빨로 법을 후려치는 사기 템 아닌가.

그가 품속에서 도장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엘리시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고결한 눈빛에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서슬 퍼런 분노가 서려 있었다.

"베르트 보좌관님! 이시우 학도병은 시스템이 보증하는 정당한 시험을 거쳐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신기록을 경신한 인재를 단지 개인의 편견으로 퇴학시키려 하시다니요! 로젠가르트 가문이 이 부정을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엘리시아의 가녀린 어깨가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눈에는 이시우가 '아카데미의 썩어빠진 기득권에 맞서 홀로 외롭게 사투를 벌이는 비운의 천재'로 보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베르트는 콧방귀를 뀌며 그녀를 밀쳐냈다.

"로젠가르트 영애, 끼어들 자리가 아닙니다. 마력 수치 6짜리 벌레가 이런 변종 기사를 쓰러뜨렸다는 것 자체가 명백한 부정행위의 증거입니다. 어서 서명해라, 이시우. 아니면 강제로 뼈를 부러뜨려 끌어내 주랴?"

베르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묵직한 마력이 파도처럼 실내를 압박했다. 훈련장 바닥의 먼지들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시우는 짐짓 쫄아버린 척 덜덜 떨며 바닥에 떨어진 퇴학 서류를 주워 들었다.

========================================= [실시간 시청자 반응 (현재 시청자: 1,511명)]

- 댕라딘: 아저씨 영정 먹이려고 꼰대 강사 등판했네 ㅋㅋㅋ - 프로불편러: 와, 저 새끼 눈빛 봐라. 진짜 줘패고 싶다. - 꿀팁방출러: 시우야 아까 얻은 꼼수 도장 찍어라! 지금이 타이밍임! =========================================

"서명하면 되는 거죠?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

이시우가 주머니에서 낡은 나무 도장—남들의 눈에는 지극히 평범한 목도장으로 보이는 그것—을 꺼내 서류의 서명란에 쾅 찍었다.

*콰직!*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서류 위에서 미세한 붉은색 스파크가 튀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기에 베르트는 눈치채지 못했다.

[시스템 연산 오류 발생!] [서류의 성격이 강제로 재규정됩니다.] [퇴학 통지서 ▷ '상호 합의하에 진행되는 인스트럭터 권한 임시 양도 및 위로금 청구서']

"흥, 이제야 분수를 아는군. 쓰레기는 쓰레기통으로 돌아가야지."

베르트가 비열하게 웃으며 이시우가 내민 서류를 낚아챘다. 그러나 그가 서류를 품에 넣기도 전에, 그의 눈앞에 시뻘건 시스템 경고창이 떠올랐다.

[경고: 계약 합의에 따라 인스트럭터 '베르트'의 권한 일부가 학도병 '이시우'에게 임시 양도됩니다.] [경고: 계약 이행 조항에 의거, 베르트의 개인 자산에서 5,000골드가 차압되어 이시우의 계좌로 즉시 송금됩니다.]

"……어?"

베르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가슴팍에 있던 아카데미 인장 카드가 제멋대로 빛을 발하며 마나가 빠져나갔다.

동시에 이시우의 인벤토리 창이 요란하게 깜빡였다.

[잔액 추가: +5,000골드]

"어이쿠, 강사님. 퇴학 위로금 치고는 아주 두둑하게 쏘시네요? 잘 쓰겠습니다!"

이시우가 돈주머니를 가볍게 흔들며 넉살 좋게 웃었다.

베르트의 핏대가 이마 위로 무섭게 솟구쳤다. 눈알이 피로 충혈된 그가 검을 반쯤 뽑아 들며 포효했다.

"이 비열한 쥐새끼가…… 감히 나를 기만해?!"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서슬 퍼런 검기가 채찍처럼 이시우의 목덜미를 향해 짓쳐 들었다. 눈으로 쫓기조차 힘든 신속의 일격이었다.

"앗…… 안 돼!"

엘리시아가 비명을 지르며 검을 뽑으려던 그 찰나.

이시우의 몸이 기괴하게 접혔다.

머리를 바닥 쪽으로 90도 꺾으며, 척추를 스프링처럼 휘어 검기를 흘려보낸 것이다. 마치 랙 걸린 캐릭터가 지면을 뚫고 미끄러지듯 한, 지극히 비현실적인 '프레임 회피'였다.

*슝-!*

검기가 허공을 가르고 뒤쪽의 석벽을 반으로 갈랐다.

[스킬 '아무튼 안 맞음(F급)' 작동!] [적의 공격을 프레임 단위로 회피했습니다!] [다음 1회 공격에 100% 치명타 및 관통 판정이 적용됩니다!]

"어, 어라?"

몸을 일으키던 이시우의 손이, 회피의 반동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허공을 휘둘렀다. 그의 손에는 방금 전 사용했던 '강제 합의용 막도장'이 여전히 쥐어져 있었다.

그 도장의 묵직한 끝부분이, 무게중심을 잃고 앞으로 쏠려 있던 베르트의 콧등을 정확히 겨냥했다.

*빡-!!!*

"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코뼈가 완전히 으스러지는 가공할 파열음이 실내를 울렸다.

베르트는 그대로 허공에서 세 바퀴를 돌며 날아가, 무기 보관용 강철 랙에 머리부터 처박혔다. 와장창 무너지는 무기들 사이로 베르트가 코피를 폭포수처럼 쏟으며 사지를 부르르 떨었다.

단 한 방. 그것도 먼지 쌓인 나무 도장 한 자루로 아카데미의 정예 인스트럭터를 날려 버린 것이다.

"……."

훈련장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엘리시아는 칼자루를 잡은 채 굳어 버렸고, 그녀의 동공은 이미 사고 회로를 멈춘 듯 풀려 있었다.

'상대의 신속한 검기를 미리 읽고, 기하학적인 궤적으로 피함과 동시에…… 무방비한 급소를 타격했다. 무기도 아닌, 평범한 나무 도장으로 그 무거운 기갑 강사를 단 일격에 무력화하다니.'

엘리시아의 가슴속에서 경외감을 넘어선 기묘한 전율이 휘몰아쳤다.

'이것이…… 진짜 은둔 고수의 힘인가?'

정작 이시우는 제 발등을 찍을 뻔한 도장을 내려다보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와, 뒤질 뻔했네. 손 미끄러졌으면 대갈통 깨졌을 듯.'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주변의 공기가 기괴할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이익-*

천장의 붉은 조명등이 거칠게 깜빡이며 불꽃을 튀겼다. 공기 중에 지독한 노이즈가 끼어들며, 시야가 마치 깨진 모니터 화면처럼 사정없이 굴절되었다.

[경고!] [규격 외 연산 오류 및 물리 법칙 파괴가 임계치를 초과했습니다.] [시스템 보안 경고도: 5.12% 돌파!] [메인 시스템의 1단계 방화벽이 강제로 해제되며, '집행관'의 예비 추적자가 파견됩니다.]

훈련장 구석,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검은색 액체 같은 폴리곤 덩어리들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검은 웅덩이 속에서, 붉은색 외눈을 번뜩이는 기괴한 형상의 자객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일말의 자비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시스템의 살인 병기들이었다.

이시우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야, 이건 진짜 방송 사고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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