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아아아아아앙!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는 줄 알았다. 사관학교 본관 강당의 정중앙, 그 견고하던 공간이 마치 날카로운 메스에 찢겨 나간 종이처럼 쩍 갈라졌다. 붉은색 검붉은 균열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압. 그것은 단순한 마력의 파동이 아니었다. 세계의 물리 법칙 자체가 통째로 짓눌려 찌그러지는 듯한, 기형적이고도 절대적인 소멸의 의지였다.
쩍, 쩌적!
균열의 틈새를 비집고 마침내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부시도록 투명한 백색의 갑주.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이목구비 대신 푸른빛으로 깜빡이는 무수한 해시태그와 에러 코드들이 스크롤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분신 따위와는 격을 달리하는 존재감. 공간을 칼로 찢고 현현한, 강제 정화 시스템의 최정점.
‘진짜 집행관 제로’ 본체였다.
“……미친.”
턱, 하고 호흡이 가로막혔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소름이 뇌수까지 짜릿하게 자극했다. 방금 전까지 상대하던 분신과는 밀도 자체가 달랐다. 놈이 가볍게 발을 내딛는 것만으로도, 연병장의 흙먼지가 중력을 잃고 공중으로 둥둥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스스스스……!
사방을 옭아매고 있던 지독한 시공간의 결빙이 거짓말처럼 탁, 풀렸다.
서버 랙 현상으로 인해 정지해 있던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구원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옥의 문이 열린 것에 가까웠다.
“끄, 끄아아악!” “컥! 우웁, 우웨엑!”
시간이 흐르기 시작함과 동시에, 집행관 제로가 뿜어내는 무색무취의 살기가 연병장 전체를 관통했다.
그 무시무시한 기압을 정면으로 얻어맞은 수백 명의 상급 기사들과 정예 생도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사관학교의 내로라하는 엘리트들이, 대륙의 미래라 불리던 천재들이 단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채 왈칵 피를 토해냈다.
그들의 단단한 마나 보호막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시스템의 직접적인 배제 명령 앞에서는 황실 기사단의 철갑조차 한 장의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으니까.
“이, 이게 무슨…… 대체 저 존재는…….”
바닥을 짚은 채 신음하는 기사단장의 눈동자가 공포로 잘게 흔들렸다.
그 아수라장의 한가운데서, 오직 나만이 똑바로 서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서 있으려고 필사적으로 허벅지에 힘을 주고 있었다.
`[위험: 스트리밍 신호 강도가 8%로 하락합니다.]` `[시청자 접속이 끊어지고 있습니다. 방송 종료 임박!]`
눈앞에 띄워진 시스템 경고창이 붉은빛으로 미친 듯이 점멸했다.
시청자들의 채팅창은 완전히 멈춰 서서 회색빛으로 바래 가고 있었다. 마스터키 역할을 해주던 구리 반지가 소멸한 대가는 뼈아팠다. 시청자들의 밈과 도네이션을 동력원으로 삼는 내 골든핑거, ‘아웃사이더 방송망’이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다. 이대로 방송이 꺼지면? 나는 이 괴물 같은 집행관의 칼날 앞에 단 1초도 버티지 못하고 데이터 조각으로 분해될 것이다.
그때였다.
“이시우 생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내 앞을 가로막아서는 그림자가 있었다.
백금발을 흩날리며, 검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엘리시아였다. 그녀의 뒤편에서는 강태현이 입가에 묻은 피를 거칠게 훔치며 거대한 도끼를 고쳐 쥐고 있었다.
“어이, 시우 형씨. 저 허연 깡통 녀석은 또 뭐야? 기동력이 장난이 아닌데…… 그래도 이 몸이 고기방패 정도는 해줄 수 있다고!” “비켜라, 강태현. 내가 앞을 막을 테니…… 이시우 생도, 당신은 어서 피하십시오. 이 존재는 사관학교 전체의 무력으로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당신만큼은…… 절대로 여기서 사라져선 안 됩니다.”
엘리시아의 푸른 눈동자에는 굳건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참 나, 어이가 없어서 실실 웃음이 나왔다.
니들 피통과 마력 방어력으로 저 본체의 소멸 판정을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그냥 0.1초 만에 캐릭터 데이터 자체가 영구 삭제야. 부활 주문서고 나발이고 안 통한다고.
게다가 내 눈에는 다 보였다. 엘리시아의 다리가 낙엽처럼 떨리고 있는 것이. 강태현의 우람한 팔근육이 저 무시무시한 살기에 짓눌려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멍청이들은 나를 지키겠다고 무기를 치켜들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방송 조회수 빨아먹으려고 부린 기행과 트롤링들을 대체 어떻게 해석했길래 저 눈빛이 저렇게 절절한 건지 원.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잔혹한 운명을 홀로 삭여내는 고결한 천재’라니, 착각도 이 정도면 병이다 병.
하지만.
“야.”
나는 퉁명스럽게 뱉으며 두 사람의 어깨를 턱 잡았다. 그리고 힘을 주어 내 뒤편으로 거칠게 잡아끌었다.
“누가 마음대로 고기방패 하래? 그리고 엘리시아, 네가 왜 내 앞을 막아서냐? 엑스트라들은 얌전히 뒤에서 구경이나 해.” “이, 이시우 생도! 고집 부릴 때가 아닙니다! 저 존재는—” “시끄러워. 내 등이나 딱 닦고 있어라.”
나는 강태현의 도끼 자루를 툭 치며 말을 이었다.
“어그로는 내가 끈다. 뒤질 거면 나 혼자 뒤지지, 니들까지 세트로 묶여서 내 방송 정지 먹는 꼴은 눈에 흙이 들어와도 못 본다. 알았냐?”
내 목소리는 차갑고 냉정했다.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은 질색이다. 하지만 내 눈앞에서 내 시청자이자 내 팬(이라고 착각하는 현지인)들이 지워지는 꼴을 보는 것은 더더욱 질색이었다. 무엇보다, 이 아싸 썩은물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내 단호한 태도에 엘리시아의 눈시울이 왈칵 붉어졌다.
‘아아…… 이 사람은 또다시…… 모든 오명과 위험을 혼자 짊어지려는구나.’
그녀의 머릿속에서 돌고 있을 숭고한 오해의 회로가 훤히 보였지만, 지금은 그걸 정정해 줄 여유가 없었다.
집행관 제로가 들고 있는 백색의 검이 천천히 위로 들려 올려지고 있었으니까. 놈의 몸 주변으로 차가운 시스템 인과율의 에너지가 무자비하게 응집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내 시야 구석에서 기적 같은 경고음이 울렸다.
띠링!
`[돌발 상황: 대상 ‘엘리시아 폰 로젠가르트’의 품 안에서 강력한 시스템 간섭 파동이 감지됩니다!]` `[좌표 우회 경로가 재탐색되는 중…….]`
“……어?”
나는 본능적으로 엘리시아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덜미 부근, 옷자락 사이로 은은한 구릿빛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깐만. 저건?
“이시우 생도? 왜 제 목걸이를…….” “엘리시아, 너 그거 당장 꺼내 봐. 목에 걸고 있는 거!”
내 외침에 엘리시아가 주춤하며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그 끝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주 낡고 볼품없는, 반으로 쪼개진 구리 반지였다.
그동안 나는 14화에서 그녀가 내게 빌려주었던 반지가 가문의 비기이자 우회 키인 줄 알았고, 방금 전 그것이 가루가 되어 소멸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가 가루로 만든 것은 마나 우회용으로 임시 동조되어 있던 간이 매개체였을 뿐, 진짜 오리지널 본체는 바로 엘리시아가 목에 걸고 있던 이 ‘깨진 고리 반지’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0.1% 대에서 간당간당하던 방송 송출 신호가 극적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꺼져 가던 채팅창에 불꽃이 튀더니, 시청자들의 실시간 피드백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 [어??? 어어어??? 야!!! 방송 안 꺼졌다!!!] - [미친 방장 아직 살아있네?! 끈질긴 놈ㅋㅋㅋㅋㅋ] - [근데 저거 뭐야? 엘리시아 목에 걸린 저 반지 빛나는 거 보임?] - [와 잠시만;; 나 이거 원작 설정집에서 본 기억 남. 로젠가르트 가문 비기 중에 '깨진 고리'라는 게 있는데, 이게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고대 시스템 설계자가 남겨둔 백도어 키임!!!] - [대박ㅋㅋㅋㅋㅋ 진짜네? '시스템 오프라인 바이패스 키'잖아 저거!!!] - [헐, 그럼 저거 있으면 메인 서버 통제 가로채서 우회 접속 가능한 거 아님?] - [방장 뇌지컬 소름 돋네;; 일부러 저 반지 공명시키려고 시간 끌면서 어그로 끈 거였음? ㄷㄷㄷㄷㄷ]
시청자들의 집단지성이 폭발하며 숨겨진 설정이 완벽하게 전역에 폭로되었다.
그들의 밈과 확신이 아웃사이더 방송망의 구동 법칙과 맞물리는 순간, 내 머릿속에 엄청난 쾌감과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뇌리를 강타했다!
`[시청자들의 설정 발굴이 완료되었습니다!]` `[숨겨진 이스터에그: ‘로젠가르트의 깨진 고리’의 진짜 제어가 활성화됩니다.]` `[속성: 시스템 오프라인 바이패스 키 (System Offline Bypass Key)]`
**[경고를 무시하고 강제 접속을 시도합니다.]** **[‘아웃사이더 방송망’의 대역폭이 500%로 초강제 증폭됩니다!!!]**
콰르릉!
내 전신을 휘감고 있던 마나의 탈수 증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히려 막힌 둑이 터진 것처럼, 차원을 넘어온 시청자들의 도파민 에너지가 내 마나 회로를 터질 듯이 채워 넣기 시작했다!
`[마나 보정 수치: 120 -> 980 (임시 돌파)]` `[액티브 버프: ‘룰 브레이커(Rule Breaker)’가 충전됩니다.]`
“하하하! 그래, 바로 이 맛이지!”
나는 터져 나오는 광소를 참지 않았다.
손가락을 튕기자, 공중에 떠오른 채팅창이 이전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푸른 홀로그램 장막이 되어 내 주변을 호위하듯 빙글빙글 돌았다. 시청자들의 드립 하나하나가 실체화된 마력의 장벽이 되어 집행관 제로의 살기를 완벽하게 상쇄해 나갔다.
기존의 전설적인 영웅들도 기사단장도 막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무너졌던 그 절대적인 재난의 영역.
그 한가운데서, 오직 나라는 최하층 보조 학도병이자 아싸 스트리머만이 든든하게 대지를 디딘 채 버텨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저 압도적인 법칙의 권능을, 홀로 몸으로 받아내며 지워지지 않고 있다니…….”
바닥에 쓰러진 기사단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엘리시아와 강태현의 눈빛은 이미 신앙을 넘어선 무언가로 변해 있었다.
“역시…… 이시우 생도. 당신은 처음부터 이 모든 파멸의 규격을 예측하고 계셨던 거군요. 가문의 반지가 가진 진정한 힘마저도…….”
엘리시아가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꼭 쥐며 눈물을 흘렸다.
아니, 난 그냥 썸네일 각 잡으려고 버틴 건데…… 뭐, 좋게 생각하자. 니들이 그렇게 믿어주면 방송 지표는 더 떡상하니까!
하지만 감탄하고 있을 시간은 길지 않았다.
세계의 법칙 안정도를 확보하기 위해 파견된 청소기, 집행관 제로의 연산이 끝난 모양이었다.
놈의 푸른 해시태그 눈동자가 기형적으로 붉게 물들었다. 이시우라는 ‘오류 코드’의 위협 수준이 시스템 방화벽이 허용하는 한계치를 완벽하게 초과했다는 판정이 내려진 것이다.
놈은 나를 척결하는 것과 동시에, 이 비정상적인 버그 에너지가 전염된 사관학교 세션 전체를 흔적도 없이 사후 청소하기로 결정했다.
스으으으으웁—
집행관 제로가 쥐고 있는 백색의 검이 허공을 향해 일직선으로 치켜 올려졌다.
그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의 빛줄기가 하늘 높이 쏘아 올려지더니, 사관학교 전체를 뒤덮고 있던 하늘을 거대한 바둑판 모양의 그리드 라인으로 쪼개기 시작했다.
인과 진멸 검기.
공간과 시간,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탄생 인과 자체를 소멸시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포맷하는 시스템의 종말 프로토콜이었다.
하늘 전체가 하얗게 타들어 가며, 미세한 소멸의 입자들이 눈송이처럼 연병장으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 입자가 닿는 곳마다 석조 건물이, 단단한 철문이 흔적도 없이 ‘삭제’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내 눈앞에, 최악의 시스템 메인 경고가 들이닥쳤다.
`[시스템 강제 명령: ‘인과 파괴율 99% 확정’ 프로토콜이 가동됩니다.]` `[세션 데이터 강제 포맷까지 남은 시간: 10초]` `[9초……]` `[8초……]`
하늘에서 쏟아지는 소멸의 검기들이 거대한 비의 장막이 되어 우리를 향해 낙하하기 시작했다.
진짜 멸망이 코앞으로 다가온 극한의 패색 짙은 국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