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시스템 강제 명령: ‘인과 파괴율 99% 확정’ 프로토콜이 가동됩니다.]` `[세션 데이터 강제 포맷까지 남은 시간: 7초……]` `[6초……]`

하늘이 바둑판 모양으로 정교하게 쪼개지며 내려앉는 광경은 그야말로 종말의 예술이었다. 백색의 소멸 입자가 공기 중으로 흩날릴 때마다, 연병장의 단단한 화강암 바닥이 마치 지우개로 슥슥 지워지듯 허공으로 사라졌다.

“말도 안 돼…… 저 압도적인 법칙의 권능을, 홀로 몸으로 받아내며 지워지지 않고 있다니…….”

바닥에 쓰러진 기사단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가 보기에 나는 대지에 뿌리를 박은 거대한 거인처럼 굳건히 버티고 서 있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하지만 내 속마음은 전혀 세상을 구하는 영웅의 그것이 아니었다.

‘아니, 미친 시스템 새끼야! 랙을 걸 거면 곱게 걸 것이지 왜 맵 전체를 포맷하려고 지랄인데!’

머릿속에서는 이미 탈모가 올 정도로 정교한 계산기가 두들겨지고 있었다. 내 신분은 겨우 명예 준남작에 ‘아카데미의 수호자’라는 번지르르한 타이틀을 달았을 뿐, 본질은 인게임 스탯이 쥐꼬리만 한 보조 학도병이자 아싸 스트리머였다. 저 백색의 소멸 검기에 단 한 대라도 스치는 순간, 내 캐릭터 데이터는 메인 서버의 쓰레기통으로 다이렉트 송출될 터였다.

하지만 내 눈앞에 둥둥 떠 있는 아웃사이더 방송망의 실시간 채팅창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실시간 시청자 수: 104,209명]`

- **인방수호자**: 와ㅋㅋㅋㅋ 썸네일 맛집 보소ㅋㅋㅋㅋ 하늘 바둑판 실화냐? - **둠칫둠칫**: 님들 이거 서버 터지기 직전의 갓겜 연출임? - **고인물은썩어야제맛**: 야, 시우야! 너 저번에 11화에서 공역의 미세한 ‘랙(Lag) 현상’ 제보받았던 거 기억하냐? - **트수대왕**: 아, 그 집행관 움직일 때마다 특정 좌표에서 프레임 드랍 일어나던 거?

‘그렇지. 바로 그거야.’

내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이 지독한 아싸 기질과 관종 본능이 결합하자, 뇌세포들이 도파민을 뿜어내며 초전도체처럼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집행관 제로. 놈은 완벽무결한 시스템의 청소기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시스템 자체의 연산 한계’라는 절대적인 물리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금 이 세계는 내 방송의 누적 시청자가 10만 명을 돌파하면서 보안 경고도가 92%를 찍은 초과부하 상태다.

쉽게 말해, 서버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뜻이다.

“태현아.” “예, 형님! 이 몸뚱아리, 언제든 방패로 던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쇼!”

강태현이 우직한 얼굴로 도끼자루를 꽉 쥐며 소리쳤다. 저 멍청하지만 든든한 마초맨의 눈빛에는 광신에 가까운 신뢰가 서려 있었다.

“방패는 필요 없고, 딱 3초만 버텨라.” “3초 말씀이십니까!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내겠습니다!” “아니, 목숨은 걸지 마. 너 죽으면 내 방송 텐션 떨어져.”

나는 퉁명스럽게 뱉고는 품 안에서 둔탁한 구리 반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엘리시아가 가문의 가보라며 내게 넘겨주었던, 가운데가 쩍 갈라진 볼품없는 반지. 하지만 이 반지의 진짜 정체는 원작 게임의 숨겨진 최고 기밀 중 하나였다.

`[아이템: 로젠가르트의 깨진 고리 (봉인 해제)]` `[등급: EX (오버라이드)]` `[상태: 시스템 오프라인 바이패스 키 (System Offline Bypass Key)]`

“엘리시아.” “네, 넷! 이시우 님!”

엘리시아가 고결한 눈망울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이 모든 종말의 위기를 미리 예견하고, 자신의 반지를 받아 안배를 완성하려 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네 반지가 가진 진짜 힘을 보여줄 때다.” “제 반지가……? 설마, 그 보잘것없는 구리 반지에 그런 힘이…….” “이건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야. 시스템의 감시망을 우회해 마나를 강제로 전송하는 ‘비상구’지. 지금부터 내 마력을 전부 너한테 우회시킬 거다. 그리고 넌 그걸로 가문의 전 방벽 마법을 전개해.”

사실 내 마력은 보조 학도병 수준이라 쥐꼬리만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10만 명의 시청자라는 무한 동력원이 있었다.

`[후원 도네이션 수신: ‘김트수’ 님이 5,000코인을 후원하셨습니다!]` `[메시지: “시우야 렉 걸어서 서버 터트려보자ㅋㅋㅋ 가즈아!!!”]`

**[시스템: 아웃사이더 방송망의 특수 권능 ‘버그 실체화’가 발동합니다!]** **[변환 대상: 시청자 밈 및 도네이션 에너지]** **[실체화 효과: 정밀 데이터 지체 구역(Lag Zone) 강제 소환]**

“자, 드가자.”

내가 반지를 가볍게 튕기며 소리쳤다.

동시에, 내 발밑에서부터 푸른색의 미세한 노이즈 선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공기가 찌르르 떨리며 아카데미 연병장 전체의 화면이 뚝, 뚝 끊기기 시작했다. 컴퓨터 사양이 딸릴 때 발생하는 전형적인 프레임 드랍 현상이었다.

`[세션 데이터 강제 포맷까지 남은 시간: 2초……]` `[1초……]`

집행관 제로의 백색 검기가 마침내 임계점에 도달해 우리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하늘 전체가 하얗게 물들며,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인과의 비가 낙하하는 순간—

서버의 랙 현상이 정확히 놈의 궤적을 덮쳤다.

*콰과과과과광!*

웅장한 파괴음이 울려 퍼져야 할 전장에 기괴한 기계음이 섞여 들었다.

*치지직, 칙, 치직—!*

“……어?”

쓰러져 있던 기사단장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수천 개의 백색 검기들이, 지상 10미터 상공에서 마치 투명한 젤리에 박힌 것처럼 뚝 멈춰 서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위아래로 미세하게 부르르 떨리는 검기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인터넷 연결이 끊겨 굳어버린 게임 화면의 그것이었다.

- **인방수호자**: 엌ㅋㅋㅋㅋㅋ 진짜 렉 걸렸어ㅋㅋㅋㅋㅋ - **썩은물전문가**: 와, 좌표 정밀 타격 미쳤네. 11화 랙 포인트랑 정확히 일치함. 저 새끼 지리적인 랙 유도 구역을 아예 외우고 있었던 거임? - **뇌절장인**: 집행관 제로 렉 걸려서 탭댄스 추는 중ㅋㅋㅋㅋㅋ 개꿀잼ㅋㅋㅋㅋ

하지만 진짜 기적은 지금부터였다.

`[시스템 경고: 인과율 연산 오류 발생!]` `[경고: 물리적 궤적의 연산 속도가 지체됨에 따라, 투사체의 충돌 판정이 발사 지점으로 역류합니다.]`

“에러(Error)…… 에러…… 인과 산출 불가…….”

집행관 제로의 붉은 해시태그 눈동자가 기형적으로 깜빡였다.

놈의 인과 소멸 검기는 ‘무조건 명중하여 지운다’는 절대적인 룰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랙 구역에 갇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자, 시스템은 ‘이미 발사된 공격이 명중하지 않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강제로 궤적을 재연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재연산의 결과는 끔찍했다.

*파자작!*

공간을 뚫고 역류한 백색의 검기 한 줄기가, 집행관 제로 자신의 가슴팍을 정통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콰아아앙!*

“……!!”

집행관 제로의 상체가 뒤로 크게 젖혀졌다.

놈의 가슴 한가운데 박혀 있던, 시스템의 핵심 연산 장치이자 푸른빛을 내뿜던 ‘심장 판정 기어블록’에 선명하고 깊은 균열이 새겨졌다. 그 틈새로 붉은색 오류 코드 자막들이 피처럼 뿜어져 나왔다.

단 한 번도 상처 입은 적 없던 세계의 절대적인 사신이, 자신이 쏘아 올린 공격에 스스로 상처를 입은 것이다.

“하, 하하…….”

기사단장은 완전히 넋이 나간 채 웃음을 터뜨렸다.

“집행관에게…… 상처를 입혔다. 신의 대리자에게, 필멸자가 상처를…….”

그 시각, 엘리시아의 눈동자는 격정적인 감동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에서 나는 이미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숭고한 존재였다.

‘이시우 님은……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어.’

그녀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저 집행관의 공격을 막기 위해, 이시우가 얼마나 정교하게 인과율을 비틀고 자신의 영혼을 깎아내며 연산을 유도했겠는가. 홀로 아카데미의 모든 파멸을 짊어지고, 손가락질받는 ‘아싸’로 살아가면서도 끝내 세상을 구하려는 그 고결한 뒷모습.

그녀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가문의 이름으로 명한다……!”

엘리시아가 깨진 고리 반지를 치켜들자, 반지가 공명하며 엄청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마나 흐름을 우회시키는 시스템 바이패스 키의 권능이 완전히 활성화된 것이다.

“로젠가르트 전 마법단은 들어라! 수호자의 방패를 전개하라! 그분의 어깨에 지워진 짐을, 이제는 우리가 나누어 짊어질 것이다!”

*웅웅웅웅!*

사관학교 사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로젠가르트 가문의 정예 마법사들이 일제히 마나를 폭발시켰다.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푸른색 극대화 방막 원호가 이시우와 생도들의 머리 위를 견고하게 감싸 안았다.

“오오오오! 형님! 저도 갑니다!”

강태현 역시 기합을 내지르며 도끼를 땅에 박아 넣어 물리적인 충격파 방벽을 더했다.

내 의도와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눈물겨운 동료애’의 현장이었지만, 뭐 어떤가. 방송 화면은 그야말로 웅장함 그 자체였다.

- **트수대왕**: 와 연출 미쳤다ㅋㅋㅋㅋ 이게 진짜 아카데미물이지 - **인방수호자**: 엘리시아 눈물 흘리는 거 봐라 찐사랑이다 진짜ㅠㅠ - **고인물은썩어야제맛**: 보스한테 최초로 유효타 먹인 스트리머 등극ㅋㅋㅋㅋㅋ 념글 티켓 확정이네

`[시스템: 시청자들의 감탄과 경외가 마나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증폭시킵니다!]` `[보안 경고도: 95% (임계점 도달)]`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가슴의 기어블록에 상처를 입은 집행관 제로의 몸에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불길한 붉은 광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류 코드…… 이시우…….”

놈의 목소리가 에코가 걸린 기계음처럼 일그러지며 연병장을 뒤흔들었다.

“세션의 오염도가 임계치를 초과했다. 부분 소멸 프로토콜 폐기. 메인 시스템의 안전을 위해…… 아카데미 세션 자체를 물리적으로 영구 삭제한다.”

놈의 가슴속 깨진 기어블록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주변의 시공간을 안쪽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자폭.

아니, 자폭을 넘어선 ‘메인 프레임 강제 분쇄’였다. 아카데미 자체를 우주 저편으로 날려버리려는 자기 파멸 폭탄 기동이 구동된 것이다.

“……어, 어?”

내 입에서 마침내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 미친 청소기 새끼가 이제는 방을 아예 폭파하려고 하네?

쿠구구구구궁—!

하늘을 수놓았던 그리드 라인이 핏빛으로 물들며 사방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발밑의 흙더미가 중력을 잃고 허공으로 둥둥 떠올랐다.

“이, 미친 통제광 기계 새끼가 결국 판을 엎으시겠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지금 저 집행관 제로가 시도하려는 건 단순한 광역 공격이 아니었다. 게임 엔진 자체를 강제로 크래시 내서, 이 세션에 존재하는 모든 데이터를 휴지통으로 직행시키는 ‘서버 폭파’ 기동이었다.

만약 저게 성공한다면? 내 명예 준남작 작위도, 대기업 스트리머의 꿈도, 내 통장에 꽂힐 수백억의 정산금도 전부 디지털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그 꼴은 죽어도 못 보지!’

눈을 부릅뜨고 붉게 점멸하는 집행관 제로의 가슴팍을 노려보았다. 놈의 깨진 기어블록 틈새로, 시스템의 내부 연산 코드가 홀로그램처럼 어지럽게 나열되어 있었다.

- **코딩노예**: 야 저거 소멸 코드 봐봐! 대상 경로(`Target_Path`)가 `Session_Ludwig_Academy`로 고정되어 있음! - **서버관리자**: 미친, 아카데미 맵 전체를 통째로 포맷하겠다는 소리네ㅋㅋㅋ - **둠칫둠칫**: 시우야 섭종한다 빨리 대가리 박아라ㅋㅋㅋㅋ - **고인물은썩어야제맛**: 잠깐, 아까 그 오프라인 바이패스 반지 있잖아. 그걸 저 기어블록에 박아 넣으면 경로 수정(Redirect) 우회 판정 뜨는 거 아님?

‘이거다.’

뇌리에 번개가 내리쳤다.

로젠가르트의 깨진 고리는 시스템의 눈을 피해 마나를 우회시키는 바이패스 키다. 그렇다면 저 붕괴 폭탄의 ‘삭제 대상’ 경로 역시 강제로 우회시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저 미친 에너지의 구체 한가운데로 직접 기어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태현아!” “예, 형님! 말씀만 하십쇼!”

강태현이 눈물을 훔치며 단단한 어깨를 들썩였다.

“나를 던져라.” “……예?”

강태현의 턱관절이 딱 굳었다.

“저 새끼 가슴팍에 정확히 골인시켜. 내 악력으로는 저 폭풍을 뚫고 갈 수가 없다. 네 풀파워 투척이 필요해.” “형님…… 설마 저 소멸의 중심부로 직접 몸을 던지시겠다는 겁니까? 자신을 희생해서 우리를……!” “아니, 희생이 아니라 꼼수 치러 가는 거라니까? 시간 없으니까 빨리 던져, 이 무식한 놈아!”

“시우 님! 안 됩니다!”

저 멀리서 방벽을 유지하던 엘리시아가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절규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저곳은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무(無)의 영역입니다!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겁니다! 제발……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지려 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내가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소멸의 구렁텅이로 걸어 들어간다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아니, 난 그냥 은퇴 자금을 지키고 싶을 뿐인데!

“태현아, 안 던지면 오늘부로 너랑 절교다.” “……윽! 형님! 부디 살아서 돌아오셔야 합니다아아아!”

강태현이 이빨을 사리물며 내 허리와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놈의 이두박근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슈우우우욱—!*

공기를 가르는 파열음과 함께, 내 몸이 대포알처럼 허공으로 쏘아 올려졌다.

“으아아아악! 살살 던지라고 했잖아, 미친놈아!”

비명이 바람에 찢겨 나갔다. 눈앞으로 붉은색 소멸 입자들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살가죽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 꽉 깨물고 버텼다.

집행관 제로의 붉은 해시태그 눈동자가 나를 향해 꺾였다.

“오류 코드…… 접근 거부…….”

“꺼져, 이 고철 덩어리야!”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품 안에서 꺼낸 로젠가르트의 깨진 고리를 놈의 가슴팍, 균열이 간 기어블록 틈새로 사정없이 쑤셔 박았다.

*콰지직!*

**[시스템: ‘로젠가르트의 깨진 고리(Bypass Key)’가 시스템 코어에 삽입되었습니다.]** **[경고: 관리자 권한 우회 프로토콜이 강제로 활성화됩니다.]**

내 눈앞에 푸른색의 텍스트 입력창이 떠올랐다. 소멸 대상 경로를 수정하라는 깜빡임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허공에 손을 휘둘러 대상을 재지정했다.

`[Target_Path: Session_Ludwig_Academy]` `→ [Target_Path: Warden_Zero (Self)]`

“너 혼자 잘 가라, 새끼야.”

집행관 제로의 전신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멈추어 섰다.

“경로…… 모순 발생…… 삭제 대상이…… 본체로 지정…… 연산 오류…… 오류…….”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 에너지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아카데미를 집어삼키려던 소멸의 폭풍이 놈의 가슴속 기어블록으로 급격하게 빨려 들어갔다.

*치지직! 치직!*

놈의 백색 갑주에 금이 가며 붉은 노이즈가 사방으로 튀었다. 자폭 기동의 청소 대상이 자기 자신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 **인방수호자**: 와 미친ㅋㅋㅋㅋㅋ 자기 삭제 프로토콜ㅋㅋㅋㅋㅋ - **고인물은썩어야제맛**: 경로 우회 리다이렉트 실화냐? 진짜 뇌지컬 미쳤다ㅋㅋㅋㅋㅋ - **둠칫둠칫**: 제로 새끼 지가 지를 지우는 중ㅋㅋㅋㅋㅋ 웅장하다ㅋㅋㅋ

“해냈다…….”

바닥에 착지한 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미소를 지으려던 찰나였다.

`[시스템 보안 경고: 99.9%]` `[위험: 시스템의 본질적 인과율이 심각하게 훼손되었습니다.]` `[경고: 메인 프레임 방화벽 ‘강제 격리(Quarantine)’ 프로토콜이 발동합니다.]`

하늘 전체가 피가 고인 것처럼 검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집행관 제로가 자멸하는 틈새로, 차원이 찢어지는 듯한 거대한 파열음이 울렸다. 그리고 그 찢어진 차원의 틈새 너머에서, 인간의 인지 능력을 초월한 거대하고 기괴한 ‘붉은색 거인의 손’이 슬그머니 뻗어 나왔다.

그 손끝이 향한 곳은 단 한 군데.

바로 시스템을 해킹한 주범인, 나였다.

“……어?”

그 거대한 손이 내 몸을 향해 무섭게 낙하하기 시작했다. 공간 자체가 압축되며 내 몸이 꼼짝달싹할 수 없게 묶여버렸다.

진짜 메인 시스템의 직접적인 배제 조치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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