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직. 지지직.
귓가를 찌르는 불쾌한 노이즈가 고막을 타고 뇌수까지 흘러내렸다.
방금 전까지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가득했던 연병장이었다. 나를 칭송하고, 나에게 경외를 표하던 수천 명의 생도와 황실 기사단원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목소리는 마치 테이프가 늘어진 구형 녹음기처럼 기괴하게 뚝 끊겨 있었다.
“……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내 어깨를 부서져라 두드리던 강태현의 손바닥이었다.
녀석의 거친 손은 내 어깨 위 단 1센티미터 상공에서 완전히 멈춰 있었다. 녀석의 눈가에 맺혀 있던 뜨거운 감격의 눈물방울은 떨어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공중에 투명한 보석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중력마저 잊은 것처럼.
엘리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를 향해 손을 모으고 눈시울을 붉히던 그녀의 가녀린 속눈썹은 단 한 터럭의 미동도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불어오던 미풍조차 멈췄다. 떨어지던 나뭇잎 하나가 허공에 박제된 채 정지해 있었다.
시간이 멈췄다.
아니, 이 세계를 구동하는 메인 연산 장치가 강제적으로 ‘일시정지(Pause)’ 버튼을 누른 것이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이 지독한 인과율의 틈새에서 아웃사이더로 존재하는 나, 이시우뿐이었다.
스으으으으…….
연병장 한가운데, 텅 빈 허공이 세로로 쩍 갈라졌다.
마치 날카로운 메스로 차원의 가죽을 도려낸 듯한 형상이었다. 그 틈새에서 피어오른 것은 마력이 아니었다. 검은 연기도, 신성한 빛도 아니었다. 오직 차갑고 소름 끼치도록 정교한 붉은색 방화벽 결계의 파편들이었다.
정방형의 픽셀 무늬들이 소용돌이치며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리고 그 결계 너머, 붉은 장막의 틈새에서 기하학적이고 투명한 형태의 형체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릿발 같은 푸른 눈동자 하나가 오직 나만을 똑바로 겨누고 있었다.
[시청자_에러감지: 미친;; 이거 진짜로 떴다;;] [게임마스터_대기중: 와 하늘 픽셀 깨지는 거 보소 ㅋㅋㅋ 버그 너무 많이 써서 안티치트 프로그램 가동됐네] [공포게임매니아: 저거 11화에서 제보됐던 그 ‘랙 현상’의 주범이잖아! 보이지 않는 집행관의 그림자가 드디어 본체 꺼냈네!] [아카데미단골손님: 와 방장 ㅈ됐다 ㅋㅋㅋㅋ 이번엔 진짜 대기업 은퇴 방송이냐?]
화면 너머 시청자들의 채팅창은 여전히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눈앞에 나타난 존재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그 몸체는 투명한 크리스털이나 다면체 유리 조각을 이어 붙인 것처럼 기하학적이었다. 얼굴에는 이목구비 대신 푸른색 해시태그와 알 수 없는 연산 기호들이 어지럽게 명멸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빛을 반사하지 않는 불투명한 칠흑의 검이 들려 있었다.
집행관 제로의 분신 분대.
시스템이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고, 나 같은 불법 오염 코드를 영구 삭제하기 위해 파견하는 최상위의 백신 프로그램들이었다.
머릿속에서 고막을 찢을 듯한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띠링!
`[System Security Alert: 보안 경고도 92.4% 돌파!]` `[비정상적인 인과율 왜곡 및 시스템 데이터 변조가 감지되었습니다.]` `[시스템 정화 프로토콜 단계를 최고 등급으로 격상합니다.]`
차가운 반투명 경고창이 허공을 메웠다. 그 붉은 글씨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나만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대상 검색: 이시우 (ID: Error_0404)]` `[상태 분석: 아웃사이더 방송망의 권능을 이용한 인과율 무단 변조 및 지형 판정 악용.]` `[위험 등급: 세계 구조적 암(Cancer) 발달 오염원]` `[처리 지침: 대상의 영구 소거 및 해당 구역의 인과율 리셋.]`
“구조적 암? 야,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나는 헛웃음을 깨물었다.
가슴속에서 차가운 긴장감이 솟구쳤지만, 입꼬리는 본능적으로 비틀려 올라갔다. 어차피 평탄하게 갈 수 없는 인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대기업 스트리머가 되기 위한 길은 언제나 억까와 버그, 그리고 운영자와의 영혼의 맞다이로 점철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억까는 평소보다 조금 더 매운맛이었다.
스릉.
투명한 기하학적 집행인들이 일제히 칠흑의 검을 비스듬히 치켜들었다. 그들이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멈춰 있던 연병장의 흙먼지가 붉은 픽셀 조각으로 변하며 소멸해 갔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이 세계의 버그 오염원인 나를 지우는 것이다.
그런데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웅아아앙-!
갑자기 정지해 있던 강태현과 엘리시아의 머리 위에 이상한 게이지 바가 나타났다. 녹색이어야 할 그들의 생명력 표시줄(HP Bar)이, 집행인들이 내뿜는 붉은색 방사형 오염 물질에 닿자마자 기괴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System Warning: 관리자 권한의 강제 정화 작용이 시작됩니다.]` `[강제 소거 영역 내에 존재하는 일반 객체의 데이터가 휘발되고 있습니다.]` `[강태현 HP: 98% -> 95% -> 91% (휘발 속도 증가 중)]` `[엘리시아 HP: 97% -> 94% -> 89% (휘발 속도 증가 중)]`
“이런 미친 개사기 게임을 봤나.”
육두문자가 목구멍을 뚫고 튀어나왔다.
나만 노리는 게 아니었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존재들을 데이터째로 지워버릴 작정인 것이다. 집행관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 공간에 서 있는 생도들과 동료들의 생명 에너지가 서서히 휘발되어 가고 있었다.
[남은 시간: 02:59]
머리 위에 뜬 붉은색 타이머가 잔인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저 숫자가 0이 되는 순간, 강태현도 엘리시아도,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수천 명의 사람들도 존재 자체가 아카데미 역사에서 지워진다. 나를 돕거나 나와 연관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시스템의 자동 청소기에 쓸려 나가는 먼지 처지가 되는 것이다.
내 소중한 동료들이, 아니, 내 방송의 훌륭한 리액션 요원이자 완벽한 고기방패들이 이렇게 허망하게 지워지게 둘 수는 없었다.
“대가리 굴려라, 이시우. 분명히 틈이 있어.”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저 투명한 백신 덩어리들을 이길 수 없다. 놈들은 무력으로 패 잡는 몬스터가 아니라, 시스템의 룰 그 자체를 두르고 나오는 관리자들이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저들이 가지고 나온 ‘룰’의 허점을 찌르는 것. 시스템의 보안망이 나를 감지하지 못하도록 오프라인 상태로 위장하거나, 흐르는 데이터를 우회시키는 우회로(Bypass)를 개척해야 한다.
그때, 내 아웃사이더 방송망의 채팅창에 익숙한 닉네임 하나가 노란색 볼드체로 번쩍였다.
[고인물분석가: 야, 방장아! 기억 안 나냐? 7화에서 엘리시아가 줬던 그 반지가 단순한 구리 반지가 아니라고 했잖아!] [인방러12: 오 맞다! 13화에서 베르너 결계 마나 우회할 때 썼던 거!] [게임마스터_대기중: 로젠가르트 가문의 깨진 고리 반지! 그거 설정집 찾아보니까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시스템 오프라인 바이패스 키'였음 ㄷㄷㄷ]
뇌리를 스치는 강력한 스파크.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멈춰 서 있는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하얗고 고운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볼품없는 구리 반지.
원작의 숨겨진 설정 속에서, 로젠가르트 가문이 대대로 보관해 온 그 깨진 고리 반지는 단순한 마력 증폭기가 아니었다. 시스템의 감시망을 피해 마나의 흐름을 강제로 우회시키는, 일종의 ‘오프라인 바이패스 키’였다.
13화에서 베르너의 결계를 파괴할 때 썼던 그 신비스러운 바이패스 능력이, 지금 이 순간 가장 완벽한 해답이 될 수 있었다.
“채팅창 형들, 훈수 아주 나이스야.”
나는 주저 없이 엘리시아에게 다가갔다. 정지해 있는 그녀의 손가락에서 구리 반지를 조심스럽게 빼냈다. 손가락끝에 닿는 그녀의 피부는 차가운 대리석 같았지만, 반지는 묘하게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내 손바닥 위에 올려진 깨진 구리 반지.
나는 아웃사이더 방송망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10만 대기업 스트리머의 위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시청자들의 도파민과 후원 에너지가 내 손끝으로 집중되었다.
[시청자_에러감지님이 5,000골드를 후원했습니다!] - [백신 프로그램 돌아갈 때 인터넷 선 뽑아버리면 멈추는 거 국룰 아님? ㅋㅋㅋ 방장아, 랜선 뽑자!]
“랜선을 뽑는다라…….”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주 훌륭한 비유였다.
“그럼 어디, 이 세계의 인터넷 선을 잠시 끊어 볼까?”
나는 반지를 꽉 쥐고 마나를 주입했다. 단순한 마나가 아니었다. 시청자들의 억까 드립과 밈이 실체화된, 인과율을 비트는 변조 데이터였다.
우우우웅-!
그 순간, 내 손안의 구리 반지가 눈이 멀 것 같은 황금빛을 내뿜으며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볼품없던 구리 재질이 투명하고 영롱한 백금빛으로 변해가며, 반지의 깨진 틈새가 푸른색 연산 회로의 빛으로 메워졌다.
`[아이템 분석 및 해킹 성공!]` `[로젠가르트의 깨진 고리] -> **[시스템 오프라인 바이패스 키 (Grade: EX)]**로 강제 변조 및 정체 각성!`
**[시스템 오프라인 바이패스 키 (Grade: EX)]** - **효과**: 장착자와 그 주변 동맹들의 시스템 연결 정보를 강제로 ‘오프라인(Offline)’ 상태로 전환합니다. 메인 시스템의 추적 및 소거 프로토콜에서 완전히 제외되며, 외부의 강제 소거 대미지를 100% 무효화합니다.
“이게 고인물의 장비 세팅이다, 이 자식들아.”
나는 반지를 내 손가락에 갈아 끼웠다.
화르륵!
반지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색 연산 회로의 장막이 나와 강태현, 엘리시아, 그리고 연병장 전체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 순간, 머리 위에서 사정없이 휘발되던 강태현과 엘리시아의 HP 바가 즉각 정지했다. 뚝뚝 떨어지던 생명 에너지가 자물쇠 모양의 투명한 아이콘과 함께 고정되어 버린 것이다.
`[System Error: 대상들의 연결 상태가 '오프라인(Offline)'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소거 프로토콜 진행 불가. 대상을 탐색할 수 없습니다.]` `[지직…… 지지직…….]`
투명한 집행인들의 몸체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들의 푸른 해시태그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공을 헤맸다. 바로 눈앞에 서 있는 나를 보면서도, 시스템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오프라인 객체’로 인식되는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게임마스터_대기중: 와 진짜로 랜선 뽑기 버그 성공했네 ㅋㅋㅋㅋ] [공포게임매니아: 집행관 제로 벙찐 거 보소 ㅋㅋㅋ 백신 돌리는데 컴퓨터 전원 내려버림] [아카데미단골손님: 이게 바로 황실 공인 아카데미의 수호자의 지성 플레이지! 갓시우 찬양해!]
“어때? 백신 프로그램 성능이 아주 눈물이 나지?”
나는 칠흑의 검을 들고 멍하니 서 있는 집행인들을 향해 손가락 욕을 날려 주었다.
시스템의 강제 정화 룰을 역이용해, 아군들의 데이터를 안전하게 격리하고 적들의 연산 장치에 치명적인 모순 버그를 주입한 것이다. 이로써 강제 소거의 타임 어택 위기는 완벽하게 모면했다.
하지만 집행관 제로는 그리 허술한 존재가 아니었다.
오프라인 상태로 인식되어 타겟을 잃어버리자, 놈들의 행동 로직이 순식간에 변경되었다.
`[System Command: 오프라인 에러 대응 프로토콜 가동.]` `[로컬 물리 삭제 모드로 전환합니다.]` `[타겟 식별 불필요. 해당 좌표 구역의 모든 물리적 질량을 강제 소거합니다.]`
차갑고 기계적인 음성이 멈춘 세계의 허공에 울려 퍼졌다.
“……어?”
내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타겟팅이 안 되니까, 그냥 내가 서 있는 이 공간의 좌표 전체를 통째로 지워버리겠다는 무지막지한 로직이었다. 역시 자비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시스템의 청소기다웠다.
스르릉!
투명한 기하학적 검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굽히며 자세를 낮췄다. 그들의 칠흑빛 검 끝에, 차원을 가르는 극도로 예리한 붉은색 광선들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소리조차 나지 않는 속도였다.
슈우우우웅-!
빛보다 빠른 속도로, 수십 개의 극도로 예리한 초차원 선들이 내 목덜미와 심장을 조준하여 일제히 쏘아져 들어왔다. 피할 수 있는 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인과율적 즉사 판정의 일격이었다.
붉은 광선이 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강렬한 섬광과 함께, 내 목덜미를 스치는 서늘한 감각이 뇌리를 찌르는 바로 그 찰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