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5:02]
"사인해. 길게 끌어서 너한테 좋을 거 하나도 없으니까."
두꺼운 마호가니 책상 너머로 서류 뭉치가 미끄러져 왔다. 명인대학교 병원 기획조정실장, 임준필의 손끝이 서류 상단을 툭툭 쳤다. 권위적인 손짓이었다.
한이준은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징계 해고 동의서 및 사직서]
사유란에는 붉은 글씨로 '마약성 진통제(Fentanyl) 무단 절취 및 오남용'이라 적혀 있었다. 이준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이준아."
임준필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혀를 찼다. 그의 안경테 너머로 비열한 아집이 번들거렸다.
"원내 약제실 전산망에 네 ID로 접속해서 펜타닐 50앰플을 반출한 기록이 명백히 남았어. CCTV에는 네 가운을 입은 인물이 약제 보관함을 서성이는 실루엣까지 찍혔고. 네가 아니면 누구겠냐?"
"기조실장님 자리에서 그 전산망 로그를 조작했거나, 제 가운을 훔쳐 입은 누군가가 벌인 짓이겠지요. '서클 9'의 지시를 받아서 말입니다."
임준필의 눈썹이 움츠러들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서클 9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그의 목젖이 크게 출렁였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가장한 비웃음이 그의 안면을 덮었다.
"소설 쓰지 마라. 전공의 3년 차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음모론이 아니다. 순순히 물러나면 면허는 살려주마. 하지만 버틴다면? 횡령 및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형사 고발이야. 의사 면허는 물론이고 네 인생 자체가 종치는 거라고."
이준의 주먹이 조용히 쥐어졌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통증을 자아냈다.
억울함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지만, 그는 감정을 밖으로 흘리지 않았다. 철저히 냉소적인 이성이 뇌리를 지배했다.
과거, 이 병원의 천재 외과의였던 백강혁이 어떻게 죽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서클 9의 VIP 임상시험 조작을 폭로하려다 의문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선배. 그리고 지금, 그들의 추악한 비밀이 담긴 차트를 우연히 조회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준 역시 사냥감으로 전락했다.
"사인 안 합니다."
이준은 서류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법정에서 보죠. 전산 로그의 IP 추적과 CCTV 정밀 감정을 신청하면, 누가 진짜 범인인지 밝혀질 테니까요."
"이 건방진 새끼가……! 나가! 당장 내 병원에서 꺼져!"
임준필의 고함 소리를 뒤로한 채 이준은 기조실장실의 육중한 문을 열고 나왔다. 복도를 걷는 그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가슴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열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영혼의 심연에서부터 무언가 들끓어 오르는 기괴한 감각이었다.
[14:28:40]
로비로 내려서자마자 고막을 찢는 듯한 사이렌 소리가 병원 유리창을 흔들었다.
"비켜주세요! 응급 환자 들어갑니다!"
자동문이 열리며 피투성이가 된 이동식 침대들이 연이어 들이닥쳤다. 로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매캐한 탄내와 비린 피비린내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영종대교 인근에서 발생한 15중 추돌 사고의 여파였다.
"이준아! 한이준!"
혼란스러운 인파 속에서 누군가 이준의 팔을 거칠게 낚아챘다. 흉부외과(CS) 펠로우, 서재희였다. 그녀의 하얀 가운은 이미 정체 모를 환자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선생님, 저 이제 이 병원 소속이—"
"그딴 소리 할 시간 없어! 12수술실 비었으니까 당장 가운 입고 들어와!"
서재희가 이준의 손에 거칠게 구겨진 차트 한 장을 쥐여주었다.
"주대동맥 파열(Aortic Rupture) 환자야. 당장 수술 안 하면 테이블 데스야. 당직 교수들 전부 연락 두절에, 서클 9 라인 늙은이들은 책임지기 싫다고 수술방 안 잡겠단다. 이대로 환자 죽일 거야?"
이준은 차트를 내려다보았다. 환자는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 혈압은 60에 30mmHg로 곤두박질치고 있었고, 흉부 CT 이미지에는 종격동(Mediastinum)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모습이 선명했다.
"제가 집도하면 불법 시술이 됩니다. 해고 통보를 받은 상태입니다."
"그깟 정직 처분, 내가 책임져! 법적 책임이든 뭐든 내 이름으로 다 안고 간다고! 그러니까…… 제발 사람부터 살리자, 이준아."
서재희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타협을 모르는 실력파인 그녀가 이토록 절박하게 매달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준의 시선이 차트 위의 환자 이름에 머물렀다.
'환자의 생명이 최우선이다.'
이성적인 뇌는 도망치라 경고했지만, 그의 육체는 이미 응급 수술실로 향하는 엘리트 의사의 본능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가시죠."
이준의 목소리는 서늘하리만치 차분했다.
[14:40:12]
본관 12수술실.
푸르스름한 LED 무영등 아래, 환자의 흉곽이 이미 절개되어 있었다.
"흡인기(Suction) 더 세게 걸어! 시야가 전혀 안 확보되잖아!"
서재희가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수술 시야는 뿜어져 나오는 암적색 혈액으로 순식간에 채워졌다. 상행 대동맥의 기시부 근처가 찢어진 것이 분명했다.
"혈압 더 떨어집니다! 45/20! 어레스트 오기 직전입니다!"
마취과 레지던트의 다급한 비명이 수술실을 때렸다.
이준은 멸균 장갑을 낀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단순한 긴장감이 아니었다. 뇌세포 하나하나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고통과 함께, 머릿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리석은 놈들. 그 위치를 건드리면 혈관이 완전히 찢어진다.'
백강혁.
죽은 천재 외과의의 기억과 영혼이 이준의 신경계와 완전히 결합하는 순간이었다.
머릿속이 번쩍하는 섬광으로 가득 찼다. 이준의 의식이 확장되며, 시야가 기이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의신의 안안(眼)을 동기화합니다.]
귓가에 환청 같은 기계음이 스쳤다.
이준의 눈공막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안구 표면의 미세 혈관들이 급격히 팽창하며 그의 시야를 완전히 재구성했다.
수술실 벽면에 설치된 전산 허가기 보드 모니터가 이준의 눈에 들어왔다. 그 찰나의 순간, 그의 시야에 모니터 우측 하단의 시스템 로그 타임스탬프가 비정상적으로 깜빡이는 것이 포착되었다.
[14:10:15 - 약제 보관함 전산망 강제 접속 허가 수정 (ID: 한이준 / 접속 IP: 기조실장실 102.168.0.4)]
'임준필, 이 개자식이…….'
정교하게 조작된 누명의 증거가 이준의 망막에 완벽하게 박제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준의 시선이 다시 환자의 열려 있는 흉강으로 향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뿜어져 나오는 피의 홍수 속에서, 복잡하게 뒤엉킨 대동맥의 3차원 혈관 지도가 청색 그래픽처럼 선명하게 도해되어 나타났다. 미세한 모세혈관의 흐름, 신경의 손상도, 그리고 괴사 한계선이 나노 단위의 수치로 시야에 둥둥 떠올랐다.
동시에, 우측에 위치한 산소포화도 모니터 접합부의 미세한 틈새와 기기 오작동 상태까지 실시간으로 스캔 되었다.
"메스."
이준의 손이 내밀어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전공의 한이준에게선 찾아볼 수 없던 압도적인 지배력이 깃들어 있었다.
간호사는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이 메스를 그의 손바닥에 쥐여주었다.
"한이준? 너 지금 뭐 하려는—"
"서재희 선생, 흡인기 잡고 대동맥 하부 3센티미터 지점 확보해 주세요. 지금부터 120초 이내에 크램핑(Clamping)[1] 끝냅니다."
"뭐? 거긴 혈종(Hematoma) 때문에 박리가 불가능해! 보이지도 않는데 장님 가위질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제 눈에는 보입니다."
이준은 지체 없이 손을 움직였다.
[14:48:05]
수술실 내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이준의 손놀림에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피가 솟구쳐 시야가 완전히 가려진 상태였지만, 그의 '의신의 안안'은 혈막 너머의 주대동맥 분지점을 정확히 조준하고 있었다.
서재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준이 핀셋과 가위를 움직이는 궤적은 현대 의학 교과서의 매뉴얼을 완전히 초월해 있었다. 보이지 않는 혈관의 경계를 마치 투시라도 하듯, 나노 단위의 정밀함으로 헤집고 들어갔다.
"허공에 대고 크램프를 치겠다고……?"
퍼퓨셔니스트(인공심폐기 조작사)가 침을 삼켰다.
보통의 의사라면 혈관을 찢어 먹어 환자를 즉사시킬 무모한 시도였다.
철컥.
이준의 손끝에서 둔탁한 금속음이 울렸다.
대동맥 겸자(Aorta Clamp)가 정확히 혈관을 물었다.
그 순간, 분수처럼 솟구치던 암적색 혈류가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
수술실 안의 모두가 숨을 죽였다.
"혈압 안정화됩니다! 90/60! 산소포화도 다시 올라갑니다!"
마취과 의사의 외침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단 한 번의 시도, 그것도 단 0.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막힌 주대동맥을 잡아낸 것이다.
서재희는 넋을 잃고 이준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단순한 전공의의 실력이 아니었다. 수십 년간 수천 번의 개심 수술을 집도한 대가조차 보여줄 수 없는, 신의 영역에 가까운 집도였다.
"프롤린 4-0(Prolene 4-0)[2]. 바늘 홀더(Needle holder) 주세요."
이준의 목소리는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제부터 찢어진 혈관벽을 봉합합니다. 서 선생, 멍하니 있지 말고 시야 확보나 제대로 하세요."
"어? 어…… 그래."
서재희는 허둥지둥 기구를 잡았다. 평소라면 전공의의 오만한 태도에 불호령을 내렸을 그녀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준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완전히 압도당해 있었다.
이준의 손끝이 허공을 수놓았다. 바늘이 찢어진 대동맥 벽을 통과할 때마다, 완벽한 간격의 봉합선이 정렬되었다.
[의신의 안안 활성화 시간: 3분 45초 경과] [경고: 술자의 심장 과부하 감지. 부정맥 위험 발생.]
눈앞에 붉은색 경고등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바늘로 심장을 콕콕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피어올랐다.
'윽…….'
이준은 턱을 악물었다. 입안에서 비린 피 맛이 났다.
의신의 능력을 쓰는 대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부하가 실시간으로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그의 손끝은 여전히 단 1마이크로미터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매듭(Tie)이 지어졌다.
"타이."
이준이 나지막이 내뱉자, 서재희가 떨리는 손으로 실을 잘랐다.
"수술…… 끝났습니다."
[14:55:22]
"와아아아!"
수술실 내부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도저히 살릴 수 없었던, 아니, 병원의 모든 교수가 포기했던 환자가 단 15분 만에 테이블 위에서 살아난 것이다.
서재희는 마스크 너머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준을 보았다.
"너……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이건 기적이야. 현존하는 어떤 서전도 이런 속도로 박리와 크램핑을 동시에 해낼 수는 없어."
"운이 좋았습니다."
이준은 냉정하게 대답하며 장갑을 벗어 던졌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극심한 흉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심장이 제멋대로 요동치며 호흡이 가빠졌다. 부정맥 발작이었다.
'제길, 능력을 너무 오래 썼어…….'
이준의 무릎이 꺾이려던 바로 그 순간.
쿵-!
수술실의 육중한 자동문이 거칠게 열리며 밀려 들어왔다.
"한이준!"
수술실 입구에 선 인물은 기조실장 임준필이었다. 그의 뒤로는 건장한 체구의 병원 무장 보안요원 4명이 살벌한 기세를 풍기며 버티고 서 있었다.
임준필의 얼굴은 분노와 당혹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네놈이 감히 해고 처분을 받고도 무단으로 수술실을 점거해? 게다가 면허도 없는 전공의 놈이 단독 집도를 해? 이건 명백한 의료법 위반이자 불법 무면허 시술이다!"
임준필이 손가락으로 이준을 가리켰다.
"저 새끼 당장 끌어내! 당장 체포해서 경찰에 넘겨!"
보안요원들이 이준을 향해 험악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준은 가슴을 움켜쥔 채, 핏발 선 눈으로 임준필을 노려보았다. 그의 시야 속에서, 수술실 벽면 모니터에 기록된 임준필의 불법 전산 접속 타임스탬프가 여전히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복수의 서막이, 이제 막 올랐다.
***
[1] 크램핑 (Clamping): 수술 중 혈류를 차단하기 위해 혈관 겸자(Clamp)로 혈관을 일시적으로 집어 막는 행위. [2] 프롤린 4-0 (Prolene 4-0): 혈관 수술에 주로 사용되는 비흡수성 합성 봉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