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연기는 좋으나, 횡령으로 세어 나간 제작비 10억 원의 영수증이 당장 증명되지 않으면... 이 영화는 오늘부로 올스톱이다. 그리고 저 아가씨도 단순한 배우가 아니라 공범으로 엮이게 되겠지. 자, 어떻게 할 텐가?"

차형록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말려 올라갔다. 태성의 손목 위에 얹힌 파란색 가죽 수첩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수첩 표면에 박힌 금박의 '가압류 결정서'라는 글자가 감사실의 백색 형광등 불빛을 받아 차갑게 번뜩였다.

최유빈의 거친 호흡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녀의 가슴이 가파르게 들썩였다. 방금 전까지 온몸으로 뿜어내던 광기 어린 배역의 아우라가, 현실의 거대한 자본이라는 벽 앞에 부딪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유빈의 동공이 잘게 떨리며 태성의 옆얼굴을 향했다.

태성은 움직이지 않았다. 손목에 닿은 차가운 가죽의 감촉을 고스란히 느끼며, 가만히 차형록의 눈을 응시할 뿐이었다.

쿵. 쿵. 쿵.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머릿속에서는 수천 개의 송곳이 뇌수를 쑤셔대는 듯한 극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최유빈의 트라우마 락을 강제로 비틀어 열고, 그녀의 연기력을 A+ 등급까지 폭발시킨 대가였다. '감정의 등가교환 법칙'이 태성의 신경망을 타고 들어와 척수액을 차갑게 얼려버렸다.

입안에서 쇠맛이 돌았다. 터진 입술 틈새로 흘러나오려는 붉은 피를, 태성은 혀끝으로 꾹 눌러 삼켰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지만, 눈빛만큼은 오히려 짐승처럼 번뜩였다. 이 정도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과거에 동료들을 잃고 홀로 살아남아 밤마다 불면증에 울부짖던 그 지옥에 비하면, 육체의 통증은 오히려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감각에 불과했다.

태성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목 위의 파란 수첩을 손가락 끝으로 툭 쳐서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툭.

조용한 감사실 바닥에 수첩이 떨어지는 소리가 기묘할 정도로 크게 울렸다.

"어라?"

명노식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안경을 고쳐 썼다. 감사실 원탁에 둘러앉은 중역들의 시선이 일제히 바닥으로, 그리고 다시 태성의 얼굴로 향했다.

태성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차형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 초. 이 초. 삼 초.

시간이 끈적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 정도의 자본 압박과 법적 위협 앞에서는 변명을 늘어놓거나, 무릎을 꿇거나, 혹은 분노를 터뜨려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태성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눈앞의 차형록이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철저한 무표정으로 침묵을 유지했다.

침묵은 방 안의 산소를 서서히 빼앗아 갔다.

1분이 지났다. 차형록의 이마에 닿는 형광등 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의 여유롭던 미소가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태성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그 침묵 속에서 차형록의 숨소리만 더 커질 뿐이었다.

2분이 흘렀다. 감사관 중 한 명이 땀이 배어나는 목덜미를 셔츠 깃 너머로 훔쳐냈다. 차형록의 오른손 손가락 끝이 테이블 위를 규칙적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탁. 탁. 탁.

불안의 징표였다. 상대가 패를 보여주지 않으니, 자신이 쥔 패가 진짜 칼인지 종이호랑이인지 확신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지독한 정적 속에서 차형록의 턱관절이 단단하게 뭉쳤다.

3분이 되는 순간.

꿀꺽.

결국 차형록의 목줄기가 크게 출렁이며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이태성 감독. 내 말이 장난처럼 들리나 보군."

차형록이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목소리에 미세한 균열이 가 있었다. 애써 태연한 척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콧방울이 미세하게 벌어지는 것까지 태성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태성은 그제야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냉소적이고 가학적인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차 대표님."

태성의 목소리는 쇠 긁는 소리처럼 낮고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감사실 안의 그 어떤 목소리보다 묵직하게 고막을 때렸다.

"돈을 세탁하는 종이 쪼가리치고는, 이 대본이 꽤나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이렇게까지 악을 쓰며 장난질을 치시는 걸 보니."

"뭐라구?"

명노식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지만, 태성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오직 차형록만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10억 원의 영수증이라. 참 편리한 숫자군요. 골든 하베스트가 이번 분기에 우회 상장을 준비하면서 해외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흘려보낸 자금의 규모와 정확히 일치하니까요."

차형록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너, 그게 무슨..."

"보여드리죠.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태성이 허공을 향해 오른손을 가볍게 뻗었다. 그의 시야 오른쪽에 투명하게 떠 있던 '시네마 빌드 장부'가 푸른빛을 내며 반응했다. 장부의 우측 하단, 회귀 첫날부터 붉은색 경고등처럼 끊임없이 점멸하던 미해결 에러 탭이 있었다.

[골든 하베스트 카르텔 비공개 금융 약정서 - 클로즈 탭 오류]

그것은 단순한 시스템의 에러가 아니었다. 골든 하베스트라는 거대 자본 카르텔이 영화 제작비를 빙자해 저질러온 수천억 원대 비자금 세탁의 은밀한 통로이자, 장부가 태성에게 쥐여준 치명적인 역습의 카드였다.

태성이 손가락으로 그 탭을 가볍게 두드렸다.

[시스템 연동: 감사실 메인 디스플레이 인터페이스 동기화 중...] [동기화 완료. 데이터를 송출합니다.]

위잉-

감실 전면에 설치된 150인치 대형 빔 프로젝터가 갑자기 스스로 켜지며 푸른 광원을 뿜어냈다. 회의실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 위로, 정체불명의 엑셀 시트와 복잡한 해외 송금 내역서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게... 이게 무슨...!"

중역 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화면에 띄워진 서류 상단에는 'Golden Harvest Corp. Private Agreement'라는 영문 로고와 함께, 차형록의 친필 서명과 직인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날짜는 불과 삼 일 전. 송금 대상은 조세 회피처로 유명한 케이맨 제도의 유령 회사들이었다. 그리고 송금 명목은 '영화 인페르노 제작비 선급금'.

10억 원씩 쪼개져 나간 수십 개의 계좌 내역이 실시간으로 스크롤을 내리며 붉은색으로 강조되었다.

"차 대표님."

태성이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전신의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지만, 기색조차 내지 않고 똑바로 서서 차형록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제가 횡령한 10억 원의 영수증입니까? 아니면, 대표님이 우회 상장 심사를 앞두고 급하게 털어내야 했던 검은 돈의 꼬리표입니까?"

감사실은 이제 단순한 정적이 아니었다. 무덤 속 같은 죽음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화면에 찍힌 숫자들은 골든 하베스트의 명줄을 단숨에 끊어버릴 수 있는 금융감독원 제출용 내부 고발 자료 그 자체였다.

"당장! 당장 그거 꺼! 명 비서, 뭐 하고 있어! 저 기계 전원 안 내리고!"

차형록이 자리에서 일어나 비명을 질렀다. 그의 평정심은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셔츠 깃을 잡아당기는 손가락은 사정없이 떨렸다.

"어, 예! 예! 대표님!"

명노식이 허둥지둥 빔 프로젝터 콘트롤러로 달려가 전원 버튼을 연타했다. 하지만 장부의 초자연적인 힘으로 연동된 시스템은 먹통이었다. 화면은 꺼지기는커녕, 우회 상장을 위해 조작된 주주 명부와 이중 계약서까지 추가로 띄우며 더욱 붉게 타올랐다.

"이건 해킹이야! 조작된 문서라고! 당장 보안팀 불러!"

차형록이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그때, 감사실의 묵직한 철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구두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맑게 때리며 다가왔다. 모두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그곳에는 단정한 정장 차림에 서류 가방을 든 강혜원이 서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감청색 양복을 입은 사내 서너 명이 엄숙한 표정으로 뒤따르고 있었다.

"보안팀을 부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차 대표님."

혜원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단호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서류 가방을 원탁 위에 무겁게 내려놓았다.

"골든 하베스트 공식 준법감시팀 법적 대리인, 그리고 본사 소수 주주 연대의 위임을 받은 강혜원 피디입니다."

"강 피디... 네년이 감히?"

차형록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혜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류 가방에서 파란색 인장이 찍힌 문서를 꺼내 차형록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방금 전, 이태성 감독님이 제시한 내부 고발 데이터는 금융감독원 및 검찰 특별수사부에 실시간으로 동시 접수되었습니다. 또한, 본사 이사회에 차형록 대표이사의 배임 및 횡령 혐의에 대한 긴급 해임안을 제출했습니다."

혜원이 태성의 등 뒤로 걸어와 나란히 섰다. 그녀의 눈빛에는 태성을 향한 굳건한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우리가 제작하는 영화 '인페르노'의 제작비는 단 일 원도 사적으로 유용되지 않았음을, 준법감시팀의 이름으로 보증합니다. 오히려 차 대표님이 사적으로 유용한 제작비 명목의 자금 10억 원에 대해, 지금 즉시 가압류 효력 정지 및 원상 복구 청구 소송을 제기하는 바입니다."

완벽한 체크메이트였다.

차형록은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회색빛으로 변한 얼굴로 스크린에 띄워진 자신의 비자금 내역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단두대에 목이 걸린 사형수와 다름없었다.

띠링-!

태성의 시야에 반가운 푸른빛 시스템 알림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완료: 도발 및 침묵 반격 성공!] [골든 하베스트 카르텔의 자본 압박을 성공적으로 무력화했습니다.] [제작진 신뢰도 수치가 사상 최대치로 잠금 해제됩니다.] [현재 제작진 신뢰도: 98% (최상)] [보상: 스태프 피로도 회복 속도 +50%, 씬 완성도 보정 계수 상승!]

머리를 짓누르던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등가교환의 페널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승리의 카타르시스가 고통을 압도하고 있었다. 태성은 터진 입술에서 흘러나온 핏방울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내며, 차형록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차 대표님."

태성이 원탁을 두 손으로 짚고 상체를 숙였다. 그의 그림자가 차형록의 위로 어둡게 드리워졌다.

"예술은 예술이고, 돈은 돈이라고 하셨죠."

태성이 싸늘하게 웃었다.

"틀렸습니다. 이 바닥에서는, 실력이 곧 돈이고 권력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장난감처럼 주무르던 그 돈줄, 이제 내가 쥐고 흔들 차례입니다."

차형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릴 뿐이었다.

"선택하십시오."

태성이 품 안에서 만년필 한 자루를 꺼내 차형록의 앞에 툭 던졌다.

"횡령 혐의로 쇠고랑을 차고 평생 쌓아온 금융 제국이 무너지는 걸 지켜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지금 당장 '인페르노'의 예산 원상 복구 및 제작비 20억 원 추가 증액 보증서에 사인하시겠습니까."

"2, 20억 추가라니...!"

명노식이 기겁하며 소리쳤지만, 차형록은 이미 판단력을 잃고 있었다. 눈앞에 들이밀어진 검찰 고발장과 비자금 내역서는 그의 목을 죄는 실제 밧줄이었다. 여기서 거부하면 그의 인생은 오늘로 끝이었다.

"하, 하겠네... 서명하지..."

차형록이 사들사들 떨리는 손으로 만년필을 쥐었다. 그의 손가락이 종이 위에서 볼품없이 춤을 추며 서명을 남기기 시작했다. 대기업의 거물이 천재 감독의 발밑에서 굴복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감사실 안의 모두가 그 굴욕적인 서명 장면에 시선을 빼앗겨 있을 때였다.

명노식의 눈빛이 살인적인 광기로 돌변했다. 그의 시선은 서명하는 차형록이 아닌, 이태성의 등 뒤를 향해 있었다. 명노식은 이대로 차형록이 무너지면 자신의 목줄도 함께 날아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태성... 네놈이 감히 우리를 파멸시키려 들어?'

명노식은 이빨을 가득 악물었다. 그의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이 거칠게 폰 자판을 두드렸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이, 그는 감사실 뒷문을 살며시 열고 복도로 빠져나갔다.

어두운 비상계단으로 들어선 명노식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나다. 명노식이야."

그의 목소리는 뱀의 쉭쉭거리는 소리처럼 낮고 살벌했다.

- 예, 실장님. 대기 중입니다.

"지금 당장 실행해. 이태성이 목숨보다 아끼는 그 지옥굴... '인페르노' 세트장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어 버려. 흔적도 남기지 말고 싹 다 태워버리라고!"

전화를 끊은 명노식의 얼굴에 광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같은 시각, 감사실 안의 태성은 차형록이 서명한 보증서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심장을 찌르는 듯한 기묘한 오한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이건... 무슨 느낌이지?'

시네마 빌드 장부의 경고등이 갑자기 붉은색이 아닌, 위험천만한 암적색으로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위험! 촬영장 내 무형 자원 수치 이상 급변!] [세트장 '인페르노' 완성도: 95% -> 40% 급락 중!] [감지된 위험 요소: 외부 물리적 타격 및 화재 발생 가능성 99.8%!]

태성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크게 흔들렸다. 보증서를 쥔 그의 손가락끝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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