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이이익!
육중한 가죽 의자가 대리석 바닥을 긁으며 귀를 찢는 마찰음을 냈다. 감사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열 명의 중역들이 일제히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전까지 복도에서 본사 경호원들을 어깨로 밀쳐내고 들어온 이태성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상석 맞은편, 거대 심문 원탁 테이블 정중앙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방에서 쏘아지는 적대적인 시선들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피부를 찔렀지만, 태성은 오히려 다리를 꼬며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들어오라는 말은 안 한 것 같은데, 이태성 감독."
테이블 상석에 앉아 있던 골든 하베스트의 수장, 차형록이 들고 있던 찻잔을 도자기 받침대에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달그락거리는 자그마한 소리가 방 안의 무거운 정적을 깨뜨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거대 자본을 주무르는 자 특유의 오만함과 여유가 묻어났다.
태성은 대답 대신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서류 더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작비 유용 및 규격 외 예산 집행 의혹 보고서'. 붉은색 감사 인장이 찍힌 종이 쪼가리들을 두 손가락으로 가볍게 집어 올린 태성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바스락.
태성은 보고서를 흘깃 보더니 그대로 테이블 위로 툭 던져버렸다.
"대기업 감사팀씩이나 되어서 기껏 준비한 게 이딴 삼류 소설입니까? 글줄이나 쓰는 작가들을 고용하지 그랬어. 문장이 아주 유치해서 읽어줄 수가 없네."
"이태성!"
우측에 앉아 있던 중년의 감사관이 테이블을 탁 치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태성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 가죽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구겨지고 손때가 묻은 종이 뭉치 하나를 꺼내 원탁 정중앙으로 던졌다.
구겨진 종이가 테이블 위를 미끄러져 차형록의 찻잔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진짜 읽어야 할 건 여기 있지."
그것은 태성이 직접 작성한 '인페르노 특별 초청 캐스팅 리스트'였다. 종이 맨 위에는 붉은 글씨로 '최유빈'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태성의 시야 우측 하단에 반투명한 푸른빛의 [시네마 빌드 장부]가 명멸하기 시작했다.
[촬영장 리소스 동기화 중...] [공간 속성 변경 감지: 심문실 -> 가상 연출 구역] [경고: 골든 하베스트 카르텔의 '비공개 금융 약정서' 탭 오류 발생 (접근 제한)]
장부의 우측 하단에서 붉고 노란 스파크가 튀며 금융 약정서 탭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저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더러운 비자금 통로의 냄새가 풍겼다. 태성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오류 메시지를 응시했다. '기다려라, 조만간 이 장부의 락을 풀어서 너희들의 숨통을 통째로 끊어줄 테니.'
차형록이 눈매를 좁히며 테이블 위의 캐스팅 리스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끝이 노란 서류 봉투의 모서리를 천천히 두드렸다.
"이 감독, 자네가 아무리 천재 소리를 들어도 자본의 룰을 벗어날 순 없어. 이 조작된 서류... 아니, 이 완벽한 감사 보고서 한 장이면 자네의 데뷔작은 물론이고, 영원히 충무로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 수 있지. 횡령 혐의로 고발당한 감독의 영화를 어느 배급사가 걸어주겠나?"
차형록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걸렸다. 자본이라는 절대적인 권력으로 예술가를 짓밟을 때 느끼는 가학적인 희열이 그의 눈동자에 가득했다.
"누가 횡령을 했다고 그래?"
태성이 나직하게 받아치는 순간, 감사실의 굳게 닫힌 참나무 이중문이 다시 한번 천천히 열렸다.
스르륵.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온 인물은 커다란 검은색 선글라스를 벗으며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최유빈이었다. 그녀의 등장에 원탁에 앉아 있던 중역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골든 하베스트가 자랑하는 최고의 간판스타이자, 이번 '인페르노'의 여주인공으로 낙점된 그녀가 왜 이 삭막한 심문실에 나타났단 말인가.
차형록의 뒤에 서 있던 모략가 명노식이 당황한 듯 안경테를 치켜올렸다.
"최유빈 씨? 당신이 여기 왜... 지금 본사 감사 중인데 사전에 연락도 없이 들어오면 곤란합니다."
"내가 불렀어."
태성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으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무섭게 가라앉았다.
[특수 지배 연출: '현장 주도' 프로토콜을 가동합니다.] [대상 공간을 영화 '인페르노' 제14씬 '취조실' 세트장으로 가상 선포합니다.] [공간 동조율: 89%... 92%... 상승 중.]
"여기 앉아 계신 돈줄들이 우리 영화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아주 궁금해하더라고. 마침 잘됐잖아? 세트장까지 갈 필요 없이 여기서 직접 보여주지."
태성이 원탁의 대리석 표면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 진동이 방 안의 공기를 타고 무겁게 퍼져나갔다.
"지금부터 이 방은 감사실이 아니다. 연쇄 살인 용의자 '은수'가 형사들에게 취조당하는 독방이다."
최유빈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가볍게 경련하고 있었다. 매일 밤 향정신성 제약사의 제조사 고유 코드 'GH-0931'이 박힌 푸른 알약 없이는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하는 그녀였다. 가짜 연기라는 세상의 조롱과 기획사의 압박 속에서 껍데기만 남은 채 살아온 날들.
태성의 시야에 유빈의 상태창이 붉게 타올랐다.
[대상: 최유빈] [트라우마 락: '깨진 유리구두' (활성화 상태)] [연기력 평가: 가짜 인형 (C-)]
태성은 그녀의 락을 해제하기 위해, 그리고 이 방 안의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의 대가리를 깨부수기 위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구두 굽 소리를 내며 유빈의 뒤로 가만히 다가갔다.
순간, 태성의 가슴을 찌르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윽.
[감정의 등가교환 법칙 작동] [배우 최유빈의 정신적 고통 수치 전이 중...] [통증 등급: 경고 (흉부 압박 및 호흡 곤란)]
허파가 쪼그라들고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덮쳤다. 이태성은 입술을 짓씹으며 강제로 통증을 억눌렀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한계 상황에 다다를수록 태성의 눈빛은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는 유빈의 귀밑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오직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하고 잔인하게 속삭였다.
"유빈아."
그녀가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평생 예쁜 인형으로 박제되어 살다 뒤질래? 발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깨진 유리구두를 밟고 서 있으면서, 아프지 않은 척 가짜 미소나 짓는 쓰레기로 남고 싶냐고."
"감독님..."
"너를 억누르는 저 새끼들이 보여? 너를 돈 세탁용 기계로만 보는 저 얼굴들이 보이냐고. 저 새끼들이 네 몸에 채워놓은 쇠사슬을 네 손으로 끊어내 봐. 못하겠으면 그냥 여기서 혀 깨물고 뒤지든가."
태성의 독설은 잔인하도록 원초적인 자극이었다. 그녀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상처를 사정없이 후벼 파는 가시 돋친 채찍질.
하지만 그 채찍질 끝에는, 그녀를 이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건져내고자 하는 처절한 구원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유빈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과거 자신을 도구로 부리며 짓밟았던 자들의 얼굴이, 원탁 너머에서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차형록과 명노식의 얼굴 위로 겹쳐 보였다. 그녀의 심장박동 소리가 감사실 전체를 울리는 듯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증명해 봐. 네가 진짜 살아 숨 쉬는 배우인지, 아니면 저 새끼들이 던져주는 돈이나 처먹고 웃어주는 쇼윈도 안의 시체인지."
태성의 목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뚫고 뇌리에 박혔다.
최유빈의 호흡법이 달라졌다. 얕고 빠르게 떨리던 숨소리가 길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목덜미를 따라 푸른 핏대가 돋아났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빛은 방금 전의 화려한 탑스타의 그것이 아니었다. 짐승의 구석에 몰린 처절함과, 세상을 통째로 저주하는 듯한 시퍼런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녀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차형록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취조... 하겠다고?"
긁히고 갈라진 목소리가 감사실의 에어컨 소리를 집어삼키며 정적을 찢었다.
"씬 14. 은수의 고백. 큐."
태성의 낮고 묵직한 지시가 떨어짐과 동시에, 최유빈이 원탁 테이블을 양손으로 세차게 내리쳤다.
쿵-!
"날 기소해 봐, 이 개자식들아!"
그녀의 목청에서 터져 나온 비명은 단순한 연출용 대사가 아니었다. 평생 자신을 억눌러 온 세상을 향해 내지르는 피 맺힌 절규였다. 유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형록의 코앞까지 상체를 들이밀었다.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분노의 열기에 번들거렸다.
"내가 그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하지? 아니야. 난 그 사람을 구원한 거야! 너희들이 매일 밤 그 더러운 돈뭉치로 목을 조를 때, 그 사람이 내지른 비명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이나 있어? 깨진 유리 조각이 심장에 박혀서 피를 흘리는데도... 너희들은 그냥 웃으라고 했잖아! 이 더러운 위선자들아!"
미친 듯한 열연이었다. 유빈의 거친 호흡이 차형록의 뺨에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녀의 손끝은 원탁의 대리석 표면을 긁어내려 손톱 밑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말해봐! 내가 진짜 괴물이야? 아니면 나를 이렇게 만든 너희들이 진짜 괴물이야!"
순간, 감사실 내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원탁에 둘러앉아 있던 중역들 중 몇 명은 자신도 모르게 의자를 뒤로 슬금슬금 물렸다. 차형록의 비서 명노식은 들고 있던 펜을 떨어뜨렸고, 감사관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유빈의 눈빛을 피했다. 가짜 인형이라 조롱받던 여배우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아우라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태성의 시야에 경이로운 수치들이 쉴 새 없이 차올랐다.
[최유빈 연기 완성도: C- -> A+ 폭발적 상승!] [흥행 예측 게이지: 12.4% -> 31.2% 수직 상승!] [트라우마 락 '깨진 유리구두' 1단계 해제 완료.]
태성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비린 피 맛을 삼켰다. 전신이 찢어지는 듯한 등가교환의 고통이 신경을 난도질했지만, 그의 입가에는 승리자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것이 바로 카메라 뒤에서 지시만 내리는 방관자가 아닌, 카메라 앞까지 기어들어가 배우와 함께 미쳐가는 이태성식 현장 밀착 연출의 힘이었다. 횡령범으로 몰며 자신을 축출하려던 기업의 중역 회의실을, 단 한 순간에 소름 끼치는 천재 배우의 오디션 무대로 뒤바꿔버린 완벽한 역전극.
정적이 지배한 방 안에는 유빈의 거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탁. 탁. 탁.
상석에 앉아 있던 차형록이 천천히 손뼉을 쳤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굳어 있던 입꼬리가 기묘하게 솟아올랐다.
"대단하군. 훌륭한 쇼야. 껍데기뿐인 줄 알았던 최유빈을 진짜 배우로 만들어 놓다니. 감독으로서의 그 미친 재능은 확실히 인정하지."
차형록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태성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푸른색 가죽으로 마감된 얇은 수첩 하나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이태성 감독. 예술은 예술이고, 돈은 돈이야."
차형록이 그 푸른 수첩을 태성의 손목 위에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수첩 표면에는 금박으로 '가압류 결정서'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연기는 좋으나, 횡령으로 세어 나간 제작비 10억 원의 영수증이 당장 증명되지 않으면... 이 영화는 오늘부로 올스톱이다. 그리고 저 아가씨도 단순한 배우가 아니라 공범으로 엮이게 되겠지. 자, 어떻게 할 텐가?"
태성의 손목 위에 얹힌 파란 압류 수첩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차형록의 잔인한 미소가 태성의 시야를 가득 채우며, 새로운 위기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