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재밌겠네. 그 새끼들이 짠 판에 내가 직접 들어가 주지.”

태성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벼려진 칼날처럼 서늘했다.

강혜원은 미처 대꾸할 틈도 얻지 못했다. 태성은 이미 그녀를 지나쳐 주차장에 세워진 세단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왼쪽 눈가가 기이할 정도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백서진의 깊은 트라우마를 강제로 찍어 누르고 신(scene)을 완성한 대가였다. 망막의 미세혈관이 터져 눈동자 절반이 핏빛으로 물든 상태였지만, 태성의 발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태성 감독님! 잠깐만요!”

혜원이 하이힐 소리를 거칠게 울리며 뒤쫓아왔다. 그녀가 조수석 문을 열려는 태성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태성의 체온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지금 가겠다는 건가요? 날이 밝으려면 아직 세 시간은 남았어요. 청문회는 오전 아홉 시예요!”

“시간 낭비할 여유 없어.”

태성이 혜원의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

“그 쥐새끼들이 서류 조작하고 입 맞출 시간 주는 것만큼 미련한 짓은 없지. 끌려가는 모양새로 들어가는 것보다, 내가 먼저 그 새끼들 모가지를 따러 가는 게 효율적이야. 운전대 잡아, 강혜원 에이전트. 아니면 내가 직접 몰까?”

그의 붉게 충혈된 눈이 혜원의 시선을 정면으로 꿰뚫었다. 맹수의 그것과도 같은 안광에 혜원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의 냉철하고 이성적인 계산기가 머릿속에서 빠르게 굴러갔지만, 이 무모한 감독의 기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미쳤군요, 정말.”

혜원이 신경질적으로 차 키를 꺼내 들었다.

운전석 문이 쾅 닫히고, 세단의 강력한 엔진음이 고요한 폐공장 세트장을 울렸다. 차체가 어둠을 뚫고 도로 위로 미끄러러지듯 나아갔다.

* * *

서울로 향하는 올림픽대로는 깊은 새벽의 침묵에 잠겨 있었다.

차창 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번쩍이며 태성의 창백한 얼굴을 비췄다. 그의 이마에는 굵은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크윽…….’

이빨을 악무는 소리가 조용한 차 안을 채웠다.

감정의 등가교환.

백서진이 카메라 앞에서 쏟아낸 그 처절한 광기와 학대의 고통이, 지금 태성의 척추를 타고 뇌수까지 고스란히 흘러들고 있었다. 척추 마디마디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수천 개의 바늘이 동시에 신경을 찌르는 듯한 이명이 울렸다. 손끝이 통제력을 잃고 잘게 떨렸다.

혜원은 힐끔 힐끔 백미러와 옆좌석을 살폈다. 핸들을 잡은 그녀의 손가락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태성이 시트를 뒤로 젖히지도 않은 채, 꼿꼿이 앉아 고통을 삼키는 모습이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요. 왜 그렇게 미련하게 버텨요?”

혜원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걱정을 가장한 가시 돋친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깊은 염려가 숨어 있었다.

“누가 그래? 아프다고.”

태성이 낮게 읊조렸다. 갈라진 목소리가 차가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눈에 피가 고이고 손을 그렇게 떠는데 안 아프다고요? 백서진 그 애를 구할 때부터 알아봤어요. 당신, 감독이 아니라 무슨 순교자라도 된 줄 아는 모양인데…… 보는 사람 피 말리게 하지 마요.”

“입 닥치고 앞이나 봐.”

태성이 창틀에 머리를 기댄 채 비스듬히 눈을 떴다. 피로 붉게 물든 왼쪽 눈이 혜원을 향했다.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 혜원 씨는 자기 밥그릇이나 잘 챙겨. 이번 청문회에서 나 나가떨어지면, 네 본사 라인도 같이 날아가는 거 모를 줄 알아?”

“참 내.”

혜원이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녀는 차를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가속페달을 더 깊게 밟았다.

“걱정해 줘도 그 모양이군요. 그래요, 나도 내 밥그릇 지키려고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그 잘난 청문회장에 시체로 들어가지나 말아 줘요.”

그녀는 글로브 박스를 열어 생수 한 병과 진통제 통을 태성의 무릎 위로 툭 던졌다.

“먹기 싫으면 품고라도 있어요. 부적 삼아.”

태성은 물병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플라스틱의 감촉이 손바닥의 열기를 조금 식혀 주었다. 약은 먹지 않았다. 이 지독한 통증이 오히려 그의 이성을 날카롭게 벼려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통을 느낄 때마다, 과거에 동료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분노가 가라앉고 냉정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 * *

태성은 눈을 감고 마음속의 심연을 들여다보았다.

시야 우측 하단에서 푸른빛으로 점멸하는 인터페이스, ‘시네마 빌드 장부’가 떠올랐다.

[시네마 빌드 장부] - 촬영장 완성도: 32% - 스태프 피로도: 45% - 실시간 흥행 예측값: 240만 명 (상승 중) - 호스트 신체 부하율: 88% (위험)

부하율 88%. 몸이 비명을 지르는 이유가 눈으로 확인되었다.

태성은 시선을 장부 우측 하단 구석으로 옮겼다. 그곳에는 1화 때부터 미세한 시스템 오류처럼 깜빡이던 탭이 있었다.

[비공개 금융 약정서 (골든 하베스트)]

태성은 의식적으로 그 탭을 터치했다. 장부의 인터페이스가 거칠게 요동치더니, 수많은 숫자와 영문 텍스트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골든 하베스트의 내부 자금 흐름망이었다.

‘차형록, 이 영리한 금융가 새끼가 내 영화를 어떻게 이용하고 있었는지 볼까.’

태성은 뇌를 쥐어짜는 듯한 두통 속에서도 장부의 검색 기능을 이용해 ‘인페르노’ 제작비 계좌를 추적했다. 100억 원의 제작비 파이프라인. 하지만 장부가 제시하는 실시간 회계 데이터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제작비 중 일부가 특수 목적 법인(SPC)을 거쳐 해외의 수상한 유령 계좌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해외 송금 IP 추적 중...] [대상: 185.220.101.XX (케이맨 제도 거점 프록시)] [최종 수혜 계좌: Golden Legacy Holding]

“찾았다.”

태성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골든 하베스트는 ‘인페르노’라는 고예산 영화의 제작비를 부풀려 자금을 세탁하고 있었다. 차형록이 태성을 횡령 혐의로 몰아세우려 했던 진짜 이유는, 진짜 횡령을 저지르고 있는 자신들의 꼬리를 자르고 태성에게 모든 덤터기를 씌우기 위함이었다.

태성은 장부의 최적화 코딩 기능을 가동했다. 장부의 푸른 빛이 깜빡이며 해당 IP의 거래 내역과 비공개 금융 약정서의 원본 데이터를 추출하기 시작했다.

[데이터 추출 완료.] [기밀 폴더 ‘C-Project’에 저장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방어용 방패가 아니었다. 차형록의 심장을 단숨에 꿰뚫을 수 있는 무자비한 창이었다.

그때, 장부의 화면에 붉은색 경고 창이 거대하게 떠올랐다.

[경고: 호스트의 신체 부하율이 임계치(85%)를 지속해서 초과하고 있습니다.] [시스템 제약 해제 조건 충족.] [‘감정의 등가교환’으로 축적된 고통의 대가로, 특수 지배 연출 기능이 임시 해금됩니다.]

[특수 지배 연출 (Special Dominance)] - 설명: 연출자의 절대적인 카리스마와 압도적인 존재감을 현실 공간에 투사합니다. 대상들의 심리적 저항선을 무너뜨리고 최면적인 복종 상태를 유도합니다. - 지속 시간: 15분 - 주의: 사용 후 신체 부하율이 급격히 상승합니다.

태성은 낮게 웃었다.

몸을 갉아먹는 고통이 결국 그에게 악마의 채찍을 쥐여 준 셈이었다.

“지배 연출이라…….”

그는 손가락을 까닥였다. 온몸을 찌르던 통증이 일순간 차가운 마취제처럼 가라앉으며, 전신에 기묘하고도 폭발적인 에너지가 무겁게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 * *

오전 7시 40분.

여의도에 위치한 골든 하베스트 본사 빌딩은 이른 아침의 차가운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유리로 뒤덮인 초고층 빌딩은 자본주의의 거대하고 냉혹한 묘비처럼 서 있었다.

혜원이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에는 이미 검은색 수트 차림의 본사 보안 요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태성 감독님, 강혜원 에이전트님 맞으십니까?”

귀에 인이어를 낀 거구의 요원이 차 문을 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혜원이 차에서 내리며 서류 가방을 고쳐 쥐었다.

“안내해요. 도망 안 가니까.”

요원들은 태성과 혜원을 호위하듯 가로막으며 전용 엘리베이터로 이끌었다. 엘리베이터가 최고층인 32층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상승했다. 사방이 거울로 된 엘리베이터 안에서, 태성은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핏발이 선 왼쪽 눈, 단정하지 않게 흐트러진 머리칼, 하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대리석으로 마감된 드넓은 복도가 나타났다. 복도 끝에는 육중한 참나무로 만들어진 감사실의 이중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문 앞에는 네 명의 보안 요원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강혜원 에이전트님은 여기서 대기해 주십시오. 감독님만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보안 팀장이 앞을 가로막으며 사무적인 톤으로 말했다.

혜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소리예요? 난 이 프로젝트의 관리 책임자이자……”

“본사 지침입니다.”

팀장의 태도는 단호했다. 사실상 태성을 고립시켜 심리적으로 무너뜨리겠다는 차형록의 얄팍한 계산이었다.

태성이 혜원의 어깨를 툭툭 쳤다.

“밖에서 커피나 마시고 있어. 금방 끝나니까.”

“하지만 감독님……”

“내 말 안 들려?”

태성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혜원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태성은 그대로 참나무 문을 향해 걸어갔다. 보안 요원 두 명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손을 뻗었다.

“몸수색이 있겠습니다. 소지품을……”

“비켜.”

태성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눈빛이 변한 것은 찰나였다. 임시 해금된 ‘특수 지배 연출’의 파동이 공기를 타고 요원들에게 들이쳤다.

순간, 요원들은 숨이 턱 막히는 압도적인 중압감을 느꼈다. 거대한 스크린 속의 괴물이 현실로 튀어나와 자신들의 목덜미를 움켜쥔 듯한 환각.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뻗었던 손이 허공에서 굳어버렸다.

태성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마주 서 있는 거구의 요원들을 어깨로 거칠게 밀쳐냈다. 요원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밀려나듯 좌우로 비틀거리며 길을 터주었다.

쾅-!

태성이 구두 굽으로 참나무 문을 걷어차듯 열어젖혔다.

방 안에는 거대한 원형 심문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둘러싸고 있는 것은 골든 하베스트의 중역들과 감사관, 그리고 상석에 앉아 여유롭게 찻잔을 만지고 있는 차형록 회장의 대리인들이었다. 열 명의 중역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태성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오만함과 경멸, 그리고 사냥감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포식자의 미소가 서려 있었다.

방 안의 공기는 얼어붙을 듯 차가웠다.

태성은 그들의 시선을 비웃듯 받아쳐 내며, 방 한가운데에 놓인 거대 심문 원탁 테이블 정중앙의 빈자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는 단 한마디의 양해도 없이, 정중앙의 무거운 가죽 의자를 발로 쾅 차서 뒤로 밀쳐낸 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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