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북카페 문을 밀치고 나오는 태성의 구두 굽이 보도블록을 사납게 짓밟았다.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무전기 너머로는 여전히 조감독의 비명 섞인 숨소리가 악을 쓰고 있었다.

- “이, 이 감독님! 세트장 뒤편 조명기까지 다 때려 부수고 있습니다! 서진 씨 눈빛이 완전히 돌았어요! 제발 빨리 좀……!”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무전이 뚝 끊겼다.

태성은 액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았다. 낡은 SUV의 엔진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회색 도시의 풍경이 흐릿한 잔상으로 뭉개졌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십 개의 카메라 앵글이 교차하고 있었다.

백서진.

아동 임대 학대라는 지옥 같은 과거에서 걸어 나온 천재. 녀석의 내면에 도사린 어둠은 단순한 연기용 소품이 아니었다. 언제든 자신과 주변을 통째로 불살라 버릴 수 있는 시한폭탄이었다.

끼이이익―!

타이어가 비명을 지르며 폐공장을 개조한 세트장 ‘인페르노’의 흙바닥을 긁었다. 태성은 차문이 제대로 닫히기도 전에 차에서 내려 세트장 안으로 내달렸다.

세트장 내부는 조명도 제대로 켜지지 않아 음산한 푸른빛만이 감돌고 있었다. 입구에 모여 있는 스태프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누구 하나 선뜻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하고 주저하는 꼴이 보였다.

“감독님 오셨다!”

누군가의 외침에 모세의 기적처럼 길을 터주는 스태프들 사이로, 태성은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다.

시야 우측 하단, 굳게 닫혀 있던 ‘시네마 빌드 장부’가 붉은색 경고등을 깜빡이며 눈앞에 펼쳐졌다.

[대상: 백서진] [트라우마 지수: 98% (임계점 돌파)] [상태: 자학적 붕괴 상태 (현실과 배역의 경계 상실)] [씬 완성도: 82% (불안정)]

태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세트장 한가운데, 쓰러진 철제 책상과 깨진 유리 파편들 사이에 백서진이 서 있었다. 녀석의 한 손에는 소품실에서 빼돌린 게 분명한, 날이 서 퍼렇게 빛나는 사냥용 대검 소품이 들려 있었다. 아니, 소품이 아니었다. 낡은 공구함에서 찾아낸 진짜 날붙이였다.

서진의 셔츠는 이미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날카로운 유리 조각에 긁혔는지 손등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기이하게 몸을 비틀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다 똑같아. 당신들도 내가 죽기를 바라잖아. 그래야 진짜 완성된다고 속삭였으면서.”

서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녀석은 칼날을 자신의 목덜미에 바짝 가져다 댔다. 얇은 살갗 위로 서늘한 쇠붙이가 파고들며 붉은 선이 그어졌다.

“감독님, 위험합니다! 다가가면 안 됩니다!”

조감독이 태성의 소매를 붙잡았지만, 태성은 그 손을 사납게 뿌리쳤다.

“카메라.”

태성의 목소리는 지독하리만치 차분했다.

“예? 예? 이 상황에 카메라라니요?”

“조명 다 끄고, b카메라 3번 앵글만 살려. 당장 돌려.”

“감독님!”

“돌려, 이 새끼야!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태성의 사나운 고함에 조감독이 사르르 떨며 오퍼레이터 석으로 달려갔다.

태성은 겉옷을 벗어 바닥에 던져 버렸다. 셔츠 소매를 거칠게 걷어 올리며, 녀석이 만들어낸 광기의 영역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카메라 렌즈가 서서히 회전하며 두 사람의 숨 막히는 대치를 프레임 안에 담기 시작했다.

“백서진.”

태성의 목소리가 텅 빈 세트장의 콘크리트 벽을 타고 묵직하게 울렸다.

서진의 고개가 삐딱하게 꺾였다. 초점을 잃은 핏빛 눈동자가 태성을 향했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당신도 그 인간들이랑 똑같아! 날 이용해서 뭘 만들고 싶은 건데? 결국 내 피를 짜내서 장사하려는 거잖아!”

칼날이 서진의 목을 더 깊게 파고들었다. 당장이라도 경동맥이 터져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태성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서진의 눈앞 반 보 앞까지 다가갔다. 칼끝이 태성의 쇄골 뼈 근처에 닿을 듯한 거리였다.

“그래, 정확하게 봤네.”

태성이 잔인하게 비웃었다.

“난 네 피가 필요해. 네 그 썩어 문드러진 영혼을 쥐어짜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쓰레기를 만들 생각이니까.”

서진의 호흡이 턱 하고 멈췄다. 예상치 못한 감독의 냉소적인 반응에 녀석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태성은 녀석의 칼을 쥔 손목을 덥석 부여잡았다. 칼날이 살을 스치는 서늘한 감각이 전해졌지만, 태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의 얼굴 가까이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서진아.”

태성의 낮은 목소리가 서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죽으려면 제대로 죽어. 이따위 어설픈 몸짓으로 관객을 모독하지 마라. 네가 지금 하려는 건 연기가 아냐. 그저 무서워서 도망치려는 쥐새끼의 발악이지.”

“뭐…… 라고?”

“진짜 지옥을 보여주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고작 이 정도로 도망치겠다고? 네 과거가 널 갉아먹는 게 억울하지도 않아? 널 물건처럼 다룬 그 새끼들 머리 위에 군림할 기회를 주겠다는데, 여기서 칼을 그어?”

태성의 눈에 서린 광기는 서진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어두웠다.

현장에서 직접 배우의 호흡을 제어하는 ‘페이스메이커 연출’. 태성은 서진의 트라우마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 그의 고통을 정면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서진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태성의 뜨거운 숨결이 닿을 때마다, 녀석의 눈에 서려 있던 살기가 조금씩 부서져 내렸다.

“내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서진의 갈라진 목소리에서 마침내 진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보여줘. 네가 가진 그 더러운 상처가 얼마나 위대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 카메라 앞에서 증명해. 넌 살아서 괴물이 되어야 해.”

태성이 서진의 손가락을 하나씩 꺾으며 칼을 빼앗았다. 챙강―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대검이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동시에 서진의 무릎이 꺾였다. 태성은 주저앉는 서진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아 지탱했다. 녀석의 거친 호흡이 태성의 어깨에 닿았다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장부의 인터페이스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백서진 트라우마 수치 98% -> 45%로 급감] [씬 완성도: 100% (완벽한 롱테이크 씬 확보)] [감정의 등가교환 법칙 작동 시작]

쿠웅―!

머릿속을 거대한 해머로 내리치는 듯한 극심한 충격이 태성의 뇌리를 때렸다.

순식간에 눈앞이 암전되며 시야가 흐려졌다. 속이 뒤집히는 구토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백서진이 평생 동안 겪어온 아동 학대의 기억, 그 더럽고 끈적한 공포의 잔재들이 태성의 신경계를 타고 고스란히 전이되고 있었다.

온몸의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에 태성은 신음을 삼키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턱 끝으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으윽…….’

단단히 붙잡은 서진의 어깨가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바닥에 꼬꾸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태성은 이 고통을 겉으로 내색할 수 없었다. 여기서 자신이 무너지면, 겨우 잡아놓은 서진의 이성도 함께 무너진다.

태성은 억지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서진의 머리를 거칠게 밀쳐냈다.

“컷.”

태성이 뱉어낸 목소리는 차갑고 가학적이었다.

“이 병신 같은 놈아. 겨우 이 정도 연기하려고 내 세트장을 개판으로 만들어 놔? 당장 일어나서 몸 추스려. 한 시간 뒤에 재촬영 들어갈 테니까.”

서진은 멍한 눈으로 태성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삼킬 듯이 안아주던 온기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지독한 독설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서진은 그 독설 속에서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 것, 자신을 오직 ‘배우’로만 대하는 태성의 태도가 녀석의 망가진 영혼을 단단히 붙잡아 매고 있었다.

“……네, 감독님.”

서진이 붉어진 눈시울을 훔치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스태프들이 서둘러 달려와 서진을 부축하고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태성은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겨 감독 의자에 주저앉았다. 손끝이 덜덜 떨려 주머니 속의 담배를 꺼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고, 가슴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슬픔과 공포가 솟구쳤다.

이것이 장부를 사용하는 대가.

동료를 구원할 때마다 그들이 가진 고통의 무게를 고스란히 육체로 받아내야 하는 저주였다.

태성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폐부 깊숙이 박히며 통증을 아주 잠시 마비시켰다.

그때, 세트장 구석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짝, 짝, 짝― 하는 기묘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태성이 고개를 돌렸다.

어둠을 헤치고 걸어 나오는 여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타이트한 네이비 정장에 날카로운 지적 세련미를 풍기는 여자. 골든 하베스트 차형록의 대리인이자, 이 현장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에이전트 강혜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깊은 충격과 전율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의 냉철한 포커페이스는 어디로 갔는지, 그녀의 꼭 쥔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대단하네요, 이태성 감독님.”

혜원이 태성의 앞에 멈춰 서며 나직하게 말했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인 줄 알았어요. 아니, 그 이상의 무언가였죠. 감독이 직접 카메라 안으로 걸어 들어가 배우의 광기를 통제하고 씬을 완성하다니. 충무로 역사상 이런 연출은 본 적이 없어요.”

태성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비스듬히 혜원을 올려다보았다.

“칭찬 들으려고 한 짓 아니야. 감사관님 눈에는 이게 다 돈 낭비로 보이겠지.”

“아뇨.”

혜원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이건 예술이에요. 그리고…… 아주 위험한 예술이죠. 당신이 왜 백서진을 고집했는지,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네요. 하지만…….”

혜원이 슬그머니 태성의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입술이 태성의 귀밑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그녀의 서늘하고 이성적인 목소리가 속삭이듯 흘러나왔다.

“방금 본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차형록 회장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태성의 담배 끝에서 붉은 불꽃이 번뜩였다.

“그 금융가 나부랭이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데?”

혜원은 세트장 문밖을 힐끗 응시한 뒤, 목소리를 한 단계 더 낮췄다.

“내일 오전, 골든 하베스트 본사 감사실에서 특별 청문회가 열립니다. 공식 안건은 ‘인페르노 제작비 유용 및 감독의 횡령 혐의’. 차 회장은 이번 청문회를 통해 당신을 감독직에서 완전히 퇴출하고, 제작을 강제 중단시키기로 이미 의결을 끝마쳤어요.”

태성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올 것이 왔다.

골든 하베스트의 자본 카르텔이 드디어 발톱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태성의 눈빛에는 두려움 대신,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잔혹한 탐욕이 서려 있었다.

시야 우측 하단, 시네마 빌드 장부의 구석진 곳에서 차형록의 검은 비자금 세탁 경로가 담긴 ‘비공개 금융 약정서’ 탭이 푸른빛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퇴출이라…….”

태성이 낮게 읊조리며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져 짓밟았다.

“재밌겠네. 그 새끼들이 짠 판에 내가 직접 들어가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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