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던 차형록의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가 뚝 끊겼다.
태성은 먹통이 된 전화를 쥔 채 천천히 팔을 내렸다. 손바닥에 끈적하고 기분 나쁜 땀이 배어 나왔다. 귓가에는 여전히 "평생 빚더미 위에서 피를 말리며 죽어가게 만들 테니까"라는 차가운 협박의 잔향이 웅웅거리고 있었다.
시야 우측 하단에서 붉은 에러 메시지가 미친 듯이 점멸했다.
[ERR_LOCK_01: 골든 하베스트 비공개 금융 약정서] [경고: 락 해제 완료까지 남은 시간 72시간.]
72시간. 단 사흘이었다. 사흘 안에 저들이 들이밀 가압류의 칼날을 부러뜨리지 못하면, 겨우 산소호흡기를 붙여놓은 영화 ‘인페르노’는 첫 슬레이트를 치기도 전에 시체 공시소로 직행하게 된다.
태성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어 붉은 핏방울이 맺혔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뇌수가 짜릿하게 절여지는 도파민이 전신을 지배했다. 과거에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지독한 부채감과 불면증이, 이 극단적인 위기 상황 속에서 오히려 날카로운 이성으로 치환되는 감각이었다.
태성은 망설임 없이 재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단 두 번 울리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침묵 속에서 태성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예산 50% 가압류? 아주 전형적이고 지저분해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군, 차 회장님.”
수화기 너머에서 나직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예상치 못한 역습에 차형록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아직 할 말이 남았나, 이 감독? 쥐새끼가 덫에 걸리면 비명부터 지르는 법인데, 자네는 제법 씩씩하군.”
“착각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쥐고 흔드는 그 잘난 돈 구멍 몇 개 막는다고 내가 기어 다닐 줄 알았나 본데. 예산 50% 삭감? 기꺼이 깎아 드리지. 그 빈자리를 자네들이 그렇게 무서워하는 진짜 피와 땀으로 채워서, 당신들 대가리가 깨질 정도로 기괴하고 완벽한 걸작을 만들어 줄 테니까.”
“말장난으로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단계는 지난 것 같은데. 내일 아침이면 법원 집행관들과 감사관들이 자네 그 허름한 세트장에 들이닥칠 걸세. 장비 하나, 필름 한 통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놓아도 그런 소리가 나올지 보지.”
차형록의 목소리에는 거대 자본을 쥔 자 특유의 오만함이 가득했다. 예술가들의 열정 따위는 돈 몇 푼으로 말려 죽일 수 있다는 확신.
태성은 낮게 실소했다. 그 웃음 끝에는 뼛속까지 시린 살기가 담겨 있었다.
“내일 아침 감사관들 오라고 하십시오. 내가 직접 그 개새끼들 목줄을 쥐고 세트장을 구경시켜 줄 테니. 그리고 똑똑히 지켜봐. 당신들이 좋아하는 그 잘난 종이 쪼가리 없이도 어떤 괴물이 탄생하는지. 내 영화의 판권을 넘기느니, 차라리 그 세트장을 통째로 불태우고 그 안에서 죽는 게 내 체질이라서 말이지.”
“이태성……!”
차형록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균열이 일어난 순간, 태성은 망설임 없이 폴더폰을 거칠게 닫아버렸다. 탁, 하는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액정이 꺼졌다.
그때 세트장 철문을 열고 강혜원이 허겁지겁 뛰어들어왔다.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 감독! 방금 투자사에서 연락 왔어. 예산 동결 신청서가 법원에 접수됐다고……. 이거 어떻게 할 거야? 당장 내일부터 장비 대여업체들이 들이닥칠 텐데!”
혜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현실적인 제작자로서 그녀가 느끼는 공포는 당연했다. 자본이 멈추면 영화는 죽는다. 그것이 충무로의 절대적인 공식이었으니까.
태성은 그녀를 향해 냉소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뭘 어떻게 해. 장비 업체 사장들 오면 따뜻한 믹스커피나 한 잔 대접해 드려. 그리고 말해. 우리가 찍는 건 장비가 아니라 인간의 밑바닥이라고.”
“지금 장난해?! 예산이 반 토막 났어! 스태프들 인건비는 어쩌고, 당장 다음 주 촬영 분량 필름 값은 어떡하냐고!”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지. 강 피디, 걱정하지 마. 저들이 우리 목을 죄어올수록 이 영화의 가치는 더 치솟을 테니까. 지금은 돈 걱정할 때가 아니라, 우리 세트장에 들어올 다음 제물을 사냥할 시간이야.”
“제물이라니? 그게 무슨…….”
태성은 대답 대신 혜원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세트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다음 타깃의 이름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최유빈.
골든 하베스트가 애지중지하는, 그러나 조만간 썩어 문드러질 껍데기뿐인 여배우. 그녀가 가진 최고의 재능을 자본의 손아귀에서 빼앗아 오는 것. 그것이 차형록의 목을 조를 첫 번째 열쇠였다.
***
이틀 뒤, 서울 강남의 한 외딴 회원제 북카페.
높은 천장까지 뻗어 있는 서가 사이로 이글거리는 오후의 햇살이 비껴들고 있었다. 사방이 고요한 고서들로 둘러싸인 방 안, 안쪽에 위치한 개별실에서 최유빈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대중 앞에서의 화려한 여신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챙이 넓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커다란 선글라스 뒤로 초조한 눈빛을 숨긴 채였다.
테이블 위에는 마시지 않아 완전히 식어버린 에스프레소 잔이 놓여 있었다.
태성이 맞은편 의자를 거칠게 끌어당겨 앉았다. 털썩, 무거운 마찰음에 유빈의 어깨가 사시나무 떨듯 움찔했다.
“불러내기 힘들더군, 최유빈 씨.”
태성이 턱을 괴며 물었다. 유빈은 선글라스를 벗지 않은 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의 입술에 칠해진 붉은 립스틱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이태성 감독님 맞으시죠? '인페르노'라는 독립영화 시나리오를 보내셨던데……. 제 매니저를 건너뛰고 제 개인 연락처로 직접 연락하신 이유가 뭐죠? 기획사에서 알면 난리 나요.”
“기획사가 난리 나는 게 무서운가, 아니면 네 속이 썩어 들어가는 걸 들키는 게 무서운가?”
“뭐라고요?”
유빈의 목소리 톤이 한 단계 올라갔다.
그녀는 극심한 불안감을 감추려는 듯, 무의식적으로 테이블 밑에 놓아둔 가죽 가방 지퍼를 열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하지만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방 속으로 들어간 그녀의 손바닥이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더듬었다.
태성은 그 짧은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매서운 시선이 유빈의 떨리는 손끝과 가방 안쪽에 머물렀다.
슥.
태성이 번개처럼 손을 뻗어 유빈의 가방 안쪽에서 작은 갈색 플라스틱 약물병을 낚아챘다.
“앗! 뭐 하는 짓이에요? 당장 돌려줘요!”
유빈이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선글라스가 코끝으로 흘러내리며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드러났다. 동공은 바늘구멍처럼 수축해 있었고, 흰자위에는 붉은 실핏줄이 터져 있었다. 지독한 불안과 불면이 만들어낸 흔적이었다.
태성은 약물병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흰색 라벨지 구석에 아주 작게 인쇄된 영문과 숫자의 조합이 태성의 시야에 꽂혔다.
[GH-0931]
태성의 뇌리에 둔탁한 경보가 울렸다. 시네마 빌드 장부의 정보와 회귀 전 기억이 맞물려 작동했다.
'GH-0931'.
향정신성 제약사의 제조사 고유 코드. 그리고 훗날 골든 하베스트가 최유빈을 통제하기 쉬운 인형으로 만들고, 결국 그녀를 자살로 위장해 파멸로 몰고 갔던 그 금지된 약물의 실체였다. 지금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죽어가는 독약을 삼키고 있는 셈이었다.
“이거 돌려줘요! 그거 없으면 나……!”
유빈이 이성을 잃고 태성의 손에 쥔 약물병을 뺏으려 들었다. 하지만 태성은 가볍게 손을 뒤로 빼며 약물병을 자신의 코트 안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이게 없으면 숨도 못 쉬는 모양이지?”
태성의 독설이 비수처럼 날카롭게 꽂혔다.
“우울증 치료제? 아니, 이건 그런 단순한 약이 아니야. 네 영혼을 서서히 갈아 마시고 껍데기만 남겨서, 저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개목줄이지. 너 자신도 느끼고 있잖아. 이 약을 먹을 때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가고, 거울 속의 네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는 걸.”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내놔! 내놓으라고!”
유빈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쌕쌕거리는 가쁜 숨소리가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눈가에 억울함과 수치심이 섞인 눈물이 맺혀 흘러내렸다.
태성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맨날 예쁜 요정, 사랑스러운 여주인공 역할만 맡으며 카메라 앞에서 기계처럼 웃으니까 행복한가? 평론가들이 네 미모를 찬양하고 네 연기를 '인형 같다'고 조롱할 때마다, 속에서 피가 거꾸로 솟지 않더냐고.”
“…….”
“대중은 네 화려한 겉껍데기를 보지만, 내 눈엔 다 보여. 네 진짜 영혼은 그 안에서 질식해 죽어가고 있어. 너를 묶고 있는 그 가식적인 유리구두를 깨부수고 싶지 않아?”
태성은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눈빛이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타올랐다.
“내가 보낸 시나리오 읽어봤겠지. '아샤' 역할. 평범한 요정이 아니야. 스스로의 상처를 가학적인 폭력과 광기로 배설하는, 처절하고 기괴한 안티히어로지. 네가 매일 밤 거울을 보며 짓씹던 그 추악한 자아를 그대로 스크린에 뱉어내면 돼. 어때, 평생 인형으로 살다 버려지느니, 한 번쯤 진짜 '배우'로 세상에 침을 뱉고 싶지 않나?”
“내가 왜…… 당신 같은 삼류 감독의 독립영화에…… 내 커리어를 망치면서까지…….”
유빈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격렬하게 회오리치고 있었다. 태성의 날카로운 언어가 그녀의 심장 가장 깊은 곳, 가장 숨기고 싶었던 치부를 정확하게 관통했기 때문이다.
태성은 속으로 시네마 빌드 장부를 활성화했다.
우웅, 하는 이명과 함께 시야 전면에 반투명한 푸른 인터페이스가 전개되었다.
[인물 프로필: 최유빈] [트라우마 지수: 89/100 (극도 불안 및 약물 의존)] [상태: 자아 분열 위험 수위]
그리고 그녀의 이름 바로 옆에, 날카롭게 깨진 유리 조각들이 얽혀 있는 구두 모양의 아이콘이 붉은빛을 뿜어내며 점멸하고 있었다.
[특수 트라우마 락: 깨진 유리구두] [해제 조건: 과거의 억압된 트라우마의 물리적 재현 및 감정적 해방]
'깨진 유리구두.'
아역 시절부터 기획사와 부모의 강요에 의해 강제로 주입된 '완벽한 인형'이라는 억압이 만들어낸 거대한 벽이었다. 그녀의 트라우마 수치가 장부를 통해 태성의 신경망으로 연결되는 순간, 지독한 통증이 약하게 전이되기 시작했다.
머리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편두통이 관자놀이를 때렸지만, 태성은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입꼬리를 올렸다. 이 정도 통증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과거에 동료들을 지키지 못했던 지옥 같은 불면증에 비하면, 이 통증은 오히려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감각이었다.
“네 기획사, 그리고 골든 하베스트. 그놈들이 너한테 주는 그 약을 끊고 내 현장으로 와라. 그러면 내가 널 진짜 배우로 만들어 주지. 아니, 온전한 너 자신으로 숨 쉴 수 있게 해주마.”
유빈은 태성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광기와도 같은 확신이 서려 있었다.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갈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이 지옥 같은 삶에서 건져줄 유일한 동반자처럼 보였다.
그녀의 주먹 쥔 손에서 힘이 서서히 빠졌다.
“……정말,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난 한 번도 그런 연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아니.”
태성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네가 하는 게 아냐.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넌 내 디렉팅에 네 영혼을 던지기만 하면 돼. 바닥까지 추락할 각오만 가지고 오라고.”
유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미세하게 떨리던 그녀의 어깨가 마침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녀의 눈에 서려 있던 불안감이, 날카로운 오기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좋아요. 계약서 보내세요. 대신, 그 약병은 돌려줘요. 당장 오늘 밤에 잠을 잘 수가 없단 말이에요.”
“이건 내가 보관하지. 촬영장에서 네 연기가 내 마음에 들 때마다 한 알씩 주마. 약에 의존하지 말고, 네 안의 고통으로 불면을 견뎌내.”
태성은 잔인하게 미소 지으며 약병을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유빈은 독기 서린 눈빛으로 태성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은 이전의 생기 없는 눈동자와는 완전히 달랐다. 진짜 살아있는 인간의 불꽃이 튀기 시작한 것이다.
“후회하게 만들지 마세요, 이태성 감독님.”
유빈이 차가운 목소리로 뱉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선글라스를 고쳐 쓰고 북카페 문을 열고 나간 직후였다.
태성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주머니 속의 약병을 만지작거렸다. 골든 하베스트의 약점을 쥐었고, '인페르노'의 가장 중요한 퍼즐 조각 중 하나를 손에 넣었다.
바로 그때였다. 태성의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무전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세트장에서 현장 조율 중인 스태프가 보낸 다급한 신호였다.
치이익―
거친 기계음과 함께 조감독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이, 이 감독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당장 세트장으로 오셔야 합니다!”
태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무전기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야? 차분히 말해.”
- “백서진 씨가…… 서진 씨가 갑자기 배역에 완전히 미쳐버렸습니다! 촬영이 멈췄는데도 대본에 몰입해서 깨진 날붙이 소품을 들고 스태프들을 위협하며 폭주하고 있어요! 세트장을 다 부수고 피를 흘리면서…… 장난이 아닙니다! 인명 사고가 날 것 같습니다, 감독님!”
치이익, 비명 소리와 함께 무전이 뚝 끊겼다.
태성의 눈빛이 순식간에 빙점 이하로 얼어붙었다. 시야 우측 하단의 장부 인터페이스에서 백서진의 트라우마 수치가 붉은색 경고음과 함께 폭발적으로 치솟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