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덜미의 가죽을 뚫고 들어온 차가운 스테인리스 바늘이 경동맥 바로 옆의 미세혈관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피부 밑으로 젤리처럼 걸쭉하고 이질적인 액체가 밀려드는 감각이 소름 끼치도록 선명했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피가 일순간 얼어붙는 것 같았다.
"흐흐, 잘 가라, 이태성. 네 잘난 천재성도 여기서 끝이다."
귓가에 달라붙는 명노식의 끈적한 숨소리. 비열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바로 등 뒤에 있었다.
뇌수가 뒤틀리는 극심한 현기증이 시야를 검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불타는 세트장 안에서 스태프들을 구하느라 장부의 오버클럭 페널티를 온몸으로 받아내던 참이었다. 전신이 으스러질 것 같은 통증 위로 정체불명의 화합물 'GH-0931'이 주입되는 순간, 태성의 눈앞에 반투명한 붉은색 경고창이 사정없이 점멸했다.
[경고: 사용자 신체에 심각한 독성 물질 유입 중!] [감정의 등가교환 적용 중 — 현재 누적 육체 피로도: 98%] [경고: 임계 치사량 도달까지 남은 시간 12초.]
"컥, 으윽……!"
태성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핏방울이 다시 한번 울컥 튀어 나갔다. 허리가 꺾이고 무릎이 콘크리트 바닥에 닿는 순간, 명노식의 손아귀에 힘이 더 들어갔다. 머리채가 사정없이 뒤로 잡아당겨 졌다.
하지만 태성의 눈동자는 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옥의 화염보다 더 푸르게 타올랐다.
과거의 비극을 반복할 순 없었다. 동료들을 잃고 껍데기만 남은 채 몰락했던 15년 전의 그 참혹한 기억이 머릿속을 후려쳤다. 기어코 일어서서 다 구하겠다고, 그렇게 결심하고 기어 올라온 회귀의 길이었다. 이까짓 간신배의 수작에 무릎 꿇을 자리가 아니었다.
'장부…… 고통 임계 강제 극복.'
태성은 심장 박동을 억지로 늦추며 뇌신경을 쥐어짜 냈다. 육체의 통증을 아드레날린으로 강제 치환하는 명령이 장부의 시스템을 관통했다.
지이이잉!
순간, 전신에 마비라도 온 듯 통증이 뚝 끊겼다. 아니, 고통을 느끼는 감각 세포 자체가 일시적으로 차단되었다. 일종의 쇼크 상태를 아군으로 삼은 셈이었다.
태성은 눈을 부릅떴다. 근육의 모든 섬유질이 비정상적으로 터질 듯 팽창하는 감각이 전해졌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어, 어어?"
명노식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기도 전이었다.
태성은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틀며 왼팔을 뒤로 뻗었다. 그의 손귀가 정확하게 명노식의 손목 뼈마디를 움켜쥐었다. 뼈와 뼈가 맞부딪쳐 삐걱거리는 섬뜩한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오도독!
"으아아악!"
명노식의 비명이 비명(碑銘)처럼 세트장 뒤편의 어둠을 찢었다.
태성은 멈추지 않았다. 움켜쥔 손목을 그대로 아래로 꺾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가죽 구두가 명노식의 디딤발 오금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중심을 잃고 무너지는 명노식의 덜미를 움켜쥐고, 바닥의 갈라진 콘크리트 구멍과 부러진 나무 널빤지 더미 위로 사정없이 처박아 버렸다.
콰아아앙!
흙먼지와 깨진 시멘트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명노식은 바닥에 처박힌 채 컥컥거리며 핏물을 뱉어냈다. 주사기는 이미 바닥에 떨어져 쓸쓸하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다행히 약물은 극소량만 주입된 상태였다.
태성은 숨을 몰아쉬며 명노식의 등짝을 구두 밑창으로 짓밟아 고정했다. 짓눌린 명노식의 갈비뼈가 비명을 질렀다.
"이, 이 괴물 같은 새끼가……!"
"입 닥쳐. 냄새나니까."
태성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엎어진 명노식을 향해 있지 않았다. 자신의 눈앞에 여전히 둥둥 떠 있는 시네마 빌드 장부의 우측 하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1화에서 회귀하던 순간부터 줄기차게 깜빡이던 기이한 시스템 오류 표식이 있었다. 골든 하베스트 카르텔의 마크와 함께 점멸하던 '비공개 금융 약정서' 숨겨진 클로즈 탭. 감사관들이 들이닥쳤을 때도, 차형록이 목을 조여올 때도 늘 잠겨 있던 그 붉은색 자물쇠 아이콘이, 지금 명노식에게 주입받은 약물의 충격 때문인지 미세하게 균열을 일으키며 흔들리고 있었다.
[시스템 경보: 외부 약물 침입으로 인한 임시 동조율 급증.] [우측 하단의 숨겨진 비공개 금융 약정서 탭의 강제 락(Lock) 해제 조건 충족.]
태성은 망설이지 않았다. 피가 묻은 손가락으로 허공의 시스템 창을 난폭하게 쓸어내렸다.
스르르륵!
자물쇠가 산산조각 나며 가려져 있던 데이터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차형록과 골든 하베스트가 지난 10년간 영화 제작비 명목으로 해외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세탁해 온 비자금의 흐름도, 그리고 명노식의 차명 계좌로 흘러 들어간 리베이트 내역이 완벽하게 정리된 금융 장부였다.
"……찾았군."
태성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감사 청문회에서 차형록을 일시적으로 입 다물게 만들었던 패보다 백 배는 더 치명적인, 골든 하베스트의 심장을 단숨에 도려낼 수 있는 무시무시한 비수였다.
"이태성…… 너,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바닥에 짓눌린 명노식이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었다. 태성은 구두 굽에 힘을 더 실어 그의 대가리를 바닥 진흙탕 속으로 처박아 버렸다.
"네 정체나 신경 써. 조만간 무상 급식 먹게 될 텐데 메뉴가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태성은 차갑게 뱉어내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목덜미에 묻은 피와 독액을 대충 훔쳐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지만, 지금은 멈출 때가 아니었다.
저 멀리서 소방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붉고 푸른 경광등 빛이 어둠에 잠긴 폐공장, 아니 반쯤 불타버린 세트장 '인페르노'의 해골 같은 골조를 기이하게 비추고 있었다.
스태프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방관들이 잔불을 정리하며 내뿜는 하얀 스팀과 자욱한 매캐한 연기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지옥의 묵시록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그야말로 압도적인 비주얼이었다.
태성은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불타버린 세트장의 중심부로 걸어 들어가는 그의 등 뒤로, 장부의 알림음이 다시 한번 고막을 때렸다.
[시네마 빌드 장부 특수 효과 발동!] [필드 환경 분석: 불타버린 폐허 (인페르노 세트장)] [적용 버프: '특수 조명 효과: 소멸 전야' 활성화.] [효과: 현장에 존재하는 모든 인물의 감정 몰입도 +40%, 절망 및 구원 연출 완성도 보정 +50%.]
태성의 동공이 맹렬하게 흔들렸다.
이건 위기가 아니었다. 하늘이 내린 최고의 기회였다. 억만금을 들여도 결코 만들 수 없는, 실제 화마가 핥고 간 잿더미와 자욱한 실제 스팀, 그리고 소방차의 경광등이 만들어내는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천연의 조명.
"전원 스탠바이."
태성의 메마른 목소리가 메가폰을 타지도 않았음에도 현장 전체에 무겁게 내리앉았다.
"감독님?!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불이 겨우 꺼졌는데 촬영이라니요!"
강혜원이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와 태성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태성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옷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온몸은 그을음 범벅에, 목덜미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태성! 너 미쳤어? 당장 병원부터 가야 해!"
태성은 혜원의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 그리고 옆에 서서 불안하게 떨고 있는 최유빈을 똑바로 응시했다.
"최유빈."
"네, 네? 감독님……."
"네가 맨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 '진짜 연기'라는 거. 오늘 안 하면 평생 기회 없어."
태성은 손가락으로 잿더미가 된 세트장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불타다 남은 목재와 소품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그 중심에는 깨진 유리 조각들이 달빛과 경광등의 붉은 빛을 받아 붉고 푸르게 번뜩이고 있었다.
[최유빈의 고유 트라우마 상태 분석 중……] [트라우마 락(Lock): '깨진 유리구두' (유년기 학대 및 억압으로 인한 감정 폐쇄)] [해제율: 15%]
태성은 최유빈의 눈동자 속 깊이 가라앉은 두려움을 읽었다. 그녀는 과거의 상처와 억압 속에서 스스로를 예쁜 인형으로 포장해 왔다. 진짜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극단의 공포.
"유빈아."
태성이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가학적이고 냉소적이던 평소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뼈를 깎는 통증 속에서도 오직 배우의 영혼만을 붙잡으려는, 집요하고도 뜨거운 연출가의 숨결이었다.
"가서 밟아."
"……네?"
"저 깨진 유리 조각들, 네가 평생 신고 있던 그 가짜 유리구두야. 그걸 네 발로 짓밟고 부숴 버려. 발이 찢어지고 피가 나도 상관없어. 진짜 네 목소리를 내란 말이야."
태성은 말을 마치자마자 직접 세트장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의 가죽 구두를 벗어 던졌다.
"감독님?!"
스태프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태성은 맨발로 날카롭게 깨진 유리 파편들 위를 성큼 걸어 들어갔다. 서슬 퍼런 유리 조각들이 그의 발바닥을 파고들며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태성의 얼굴에는 고통의 기색조차 없었다. 오직 광기 어린 집념만이 눈동자에서 이글거릴 뿐이었다.
감정의 등가교환 페널티로 이미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발바닥의 통증 따위는 뇌에 도달하기도 전에 무시되었다.
"카메라 잡아! 조명은 소방차 경광등 그대로 쓴다! 반사판 대지 마!"
태성이 라이브로 카메라를 직접 어깨에 짊어졌다. 렌즈 너머로 최유빈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굶주린 야수와도 같았다.
"배우 최유빈, 카메라 뒤가 아니라 바로 네 눈앞에 내가 있다. 나를 봐. 그리고 네 안의 그 더러운 기억들을 다 끄집어내서 나한테 던져."
그것은 단순한 디렉팅이 아니었다. 함께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자는, 목숨을 건 페이스메이킹이었다.
최유빈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태성의 발밑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와, 그의 어깨에 얹힌 묵직한 카메라, 그리고 매캐한 연기 속에서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 압도적인 눈빛.
순간, 최유빈의 머릿속에서 단단하게 잠겨 있던 빗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내렸다.
깡! 끄으으응!
[시스템 알림: 배우 최유빈의 트라우마 락 '깨진 유리구두' 강제 해제 성공!] [동조율 100% 도달. 극중 인물 '엘레나'와의 영혼적 결합 개시.]
최유빈이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그녀의 맨발이 잿더미와 깨진 유리 조각 위로 내려앉았다. 날카로운 파편이 살을 파고드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고통이 아닌, 설명할 수 없는 해방감으로 일그러졌다.
"아…… 아아아!"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대본에 적힌 가공의 대사가 아니었다. 유년 시절, 어두운 골방에 갇혀 울부짖던 한 아이의 처절한 비명이었고, 가짜 예술가라는 세간의 평가에 숨 막혀 하던 탑스타 최유빈의 날 것 그대로의 절규였다.
"컷 하지 마! 계속 가!"
태성은 피가 흐르는 맨발로 카메라를 지탱하며 최유빈의 움직임을 조절했다. 카메라 렌즈가 그녀의 눈동자에 맺힌 눈물과, 그 눈물에 반사되는 붉은 경광등의 빛을 완벽하게 포착해 냈다.
최유빈은 무릎을 꿇었다. 잿더미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울부짖었다. 온몸에 그을음과 피가 뒤섞여 흘러내렸지만, 그 모습은 세상 그 어떤 피에타 상보다 숭고하고 아름다웠다.
"살려줘…… 제발, 나를 여기서 꺼내줘……!"
그녀의 절규가 폐허가 된 세트장 '인페르노'의 허공을 찌르고 들어왔다.
현장에 있던 강혜원도, 백서진도, 심지어 잔불을 정리하던 소방관들마저도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숨을 죽였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한 인간의 영혼이 불타오르며 뿜어내는 거룩한 생명의 불꽃이었다.
태성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셔터 릴리즈를 움켜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씬 완성도 실시간 측정 중……] [92%…… 95%…… 98%……] [최종 완성도: 99.8% (SSS급 마스터피스 컷 획득!)]
"……컷."
태성의 입술 속에서 나직한 선언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현장의 공기가 탁 풀리며 안도감과 경외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흐윽…… 흑……."
최유빈은 여전히 잿더미 위에 주저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이전의 불안해 보이던 인형의 그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한계를 완벽하게 깨부수고 다시 태어난, 진짜 '배우'의 눈빛이었다.
"유빈아, 잘했어. 정말 잘했어."
강혜원이 달려가 최유빈을 껴안았고, 스태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울컥한 표정으로 기립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불타버린 지옥의 잔해 속에서, 그들은 기적 같은 걸작의 한 장면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태성은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를 조심스럽게 삼각대에 거치했다.
그의 육체는 이미 한계를 넘어서 있었다. 쥐어짜 냈던 아드레날린이 바닥나자, 차단되었던 고통이 한꺼번에 척추를 타고 뇌로 역류했다. 입안이 온통 비릿한 피 맛으로 가득 찼다.
'커헉……!'
신음을 삼키며 가슴을 움켜쥐는 태성의 시야에, 울음을 그친 최유빈의 모습이 들어왔다.
유빈은 강혜원의 품에서 벗어나, 자신이 무릎을 꿇고 있던 바닥의 타다 남은 철판 틈새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며 그곳을 가리켰다.
"감독님…… 저기, 저 밑에……."
태성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유빈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소방수의 물줄기에 씻겨 내려간 잿더미 밑, 시커멓게 그을린 가압류 대상 철판 틈새에서 기이하게 반짝이는 갈색 서류 봉투 하나가 삐져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깨진 유리 조각들 사이로 미처 타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아까 명노식이 들고 있던 것과 똑같은 투명한 화학 약물 병들이 뒹굴고 있었다.
앰플의 푸른 표면에는 선명한 글자가 박혀 있었다.
[GH-0931]
그것은 단순한 약물이 아니었다. 이 세트장을 불태우고 최유빈을 파멸시키려 했던 명노식,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골든 하베스트 차형록의 거대한 추악함이 잠겨 있는 판도라의 상자였다.
태성의 입술이 피로 물든 채 비틀려 올라갔다.
"이게…… 진짜 명작의 피날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