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열연의 황홀감이 세트장 공기 중에 가득 차 있을 때, 유빈이 폐허 밑에 숨겨진 철판에서 기이하게 반짝이는 갈색 봉투와 3화에서 봐 두었던 것과 같은 화학 약물 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감독님…… 저기, 저 밑에……."

그녀의 손가락 끝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촬영장을 지배하던 SSS급 명장면의 여운이 뜨겁게 요동치는 불꽃의 잔해 사이로, 차가운 푸른빛을 뿜어내는 유리 앰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방수들이 뿌린 물줄기에 그을음이 씻겨 내려가며, 진흙과 잿더미 속에 처박혀 있던 추악한 비밀의 편린이 기어이 고개를 치켜든 것이다.

태성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눈을 부릅떴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극심한 피로와 통증이 뇌하수체를 사정없이 두들겼다. 배우들의 트라우마를 강제로 진정시키고 미친 연기력을 끌어내기 위해 작동했던 '시네마 빌드 장부'의 등가교환 법칙. 그 지독한 대가가 태성의 전신을 산산이 조각낼 것처럼 옥죄어 왔지만,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진흙바닥을 딛고 앞으로 나아갔다.

"조명팀, 어시스트 라이트 3번. 이쪽으로 핀포인트 슛."

태성의 목소리는 갈라져 거칠었으나, 현장을 지배하는 감독의 명령은 서슬 퍼런 칼날 같았다.

"예? 아, 예! 감독님!"

얼을 빼고 있던 조명 스태프가 서둘러 소형 LED 라이트를 꺾어 태성의 발끝을 비추었다.

백색의 날카로운 광선이 그을린 기둥 더미 아래, 검게 탄 기물 틈새를 정통으로 관통했다. 태성은 허리를 숙여 잿더미 속에서 서서히 타들어 가던 갈색 서류 봉투와, 그 옆에 흩어져 있던 투명한 화학 약물 병들을 거두어들였다.

그의 손아귀에 묵직한 감각이 전해졌다.

태성은 주저하지 않고 메인 카메라의 고화질 핀포인트 렌즈를 끌어당겼다. 렌즈의 초점이 10cm 앞으로 들이밀어졌다. 카메라 모니터 화면 가득, 물방울이 맺힌 유리 앰플의 외관이 터질 듯이 확대되어 박혔다.

[GH-0931]

푸른색 특수 라벨 위에 선명하게 인쇄된 화학 코드 번호.

그 순간, 태성의 머릿속에서 15년 전의 기억과 회귀 직후 최유빈의 대기실에서 포착했던 불온한 정보들이 단숨에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역시 이거였나.'

GH-0931. 겉보기에는 단순한 수면 장애 치료제나 피로 해소용 영양제 라벨을 달고 있지만, 실상은 인간의 전두엽을 마비시켜 의존증을 극대화하는 신종 향정신성 최면 마약. 골든 하베스트의 자회사인 GH 제약이 극비리에 제조하여 충무로의 배우들을 길들이는 데 사용하던 은밀한 사슬이었다.

명노식은 이 앰플을 최유빈의 음료와 영양제에 몰래 섞어 복용하게 만들었고, 그녀를 완벽히 통제 가능한 인형으로 박제하려 했다. 쓸모가 다하면 자살로 위장해 폐기처분할 계획이었던 살인 청부적 스폰서 주사의 실체가, 마침내 타다 남은 인페르노 세트장의 밑바닥에서 그 추악한 대가리를 드러낸 것이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태성이 카메라 렌즈 바로 앞에서 앰플을 가볍게 흔들었다. 투명한 액체가 백색 광선 아래에서 불길하게 출렁였다. 현장에 남아 있던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가 미친 듯이 터지기 시작했다. 섬광이 어두운 세트장을 대낮처럼 밝혔다.

"이건 단순한 약물이 아닙니다. 골든 하베스트가 자사 배우들을 영혼까지 갉아먹기 위해 투여하던 'GH-0931'이라는 향정신성 금지 약물입니다."

태성의 목소리가 생방송 마이크를 타고 전국으로, 그리고 전 세계로 송출되는 스트리밍 채널을 타고 무섭게 퍼져나갔다.

"명노식 감독이 최유빈 배우를 협박하고 가스라이팅하며 주입하려 했던 실체이자, 오늘 이 세트장에 방화를 저지르면서까지 은폐하려 했던 골든 하베스트의 더러운 아킬레스건이죠."

그 순간, 태성의 시야 우측 하단에서 붉은빛으로 미친 듯이 점멸하던 '시네마 빌드 장부'의 인터페이스가 격렬하게 진동했다.

[시스템 경고: 숨겨진 클로즈 탭 '비공개 금융 약정서'의 암호화 체계가 물리적 증거 획득으로 인해 해제됩니다!] [골든 하베스트 카르텔의 비자금 세탁 경로 및 GH 제약 불법 약물 유통 장부 복원 완료.] [데이터 전송 준비 완료.]

회귀 첫날부터 인터페이스 구석에서 오류처럼 깜빡이던 그 미해결 탭이, 실물 물증인 'GH-0931'의 발견과 동시에 완벽한 디지털 증거로 해금된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약물 유통망을 넘어, 영화 제작비를 부풀려 비자금을 조성하고 세탁하던 골든 하베스트의 핵심 금융 카르텔을 일격에 몰살할 수 있는 핵폭탄 고리였다.

태성은 비틀거리는 몸을 곧추세우며 차갑게 웃었다.

"끝났다, 명노식. 그리고 차형록."

그의 시선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최유빈에게로 향했다.

유빈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평생 자신을 옭아매고, 밤마다 악몽 속에서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들었던 검은 유령의 실체가 고작 저 작은 유리병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때, 유빈의 눈앞에 떠돌던 보이지 않는 사슬이 깨지는 소리가 들린 것은 환각이 아니었다.

[배우 '최유빈'의 고유 트라우마 락 '깨진 유리구두'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트라우마 지수: 98% → 45% → 12% → 0% (완전 정화!)] [배우 '백서진'의 트라우마 지수: 0% (안정 상태 유지)]

"아……."

유빈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언제나 그녀의 목덜미를 짓누르던 형언할 수 없는 공포와 무력감이, 마치 썰물처럼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눈앞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아졌다. 깨진 유리 조각을 맨발로 짓밟으며 자신의 한계를 깨부순 연기가, 그리고 태성이 세상 앞에 폭로한 진실이 그녀의 영혼을 옭아매던 마지막 빗장을 완전히 부숴버린 것이다.

유빈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감싸 안았다. 더 이상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지 않았다. 가짜 연기라는 오명도, 협박의 쇠사슬도 이제는 그녀를 구속할 수 없었다. 오롯이 자신의 재능과 영혼으로 설 수 있는 진짜 '배우'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서진 역시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동료의 구원은 곧 자신의 구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온전히 태성의 몫이었다.

"커헉……!"

태성의 입에서 시커먼 피 한 움큼이 바닥으로 울컥 쏟아져 내렸다.

두 배우의 트라우마를 제로로 만들고, SSS급 명장면을 뽑아내기 위해 장부의 한계를 끌어당긴 대가. 전신의 세포가 하나하나 타들어 가는 듯한 고열이 신경계를 난사했다. 눈앞이 핑 돌며 암전되려는 찰나, 억센 손길이 그의 어깨를 부축했다.

"이태성! 정신 차려!"

강혜원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태성의 이마를 짚는 그녀의 손길이 가늘게 떨렸다.

"너 지금 몸이 완전히 망가졌어! 당장 정밀 검사부터 받아야 해!"

"놔, 혜원아…… 아직 할 일이 남았어."

태성은 혜원의 부축을 받으며 억지로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입가에 묻은 피를 거칠게 훔쳐내며, 그는 가학적일 정도로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 가지고 안 죽어. 내 시나리오는 아직 클라이맥스도 안 왔으니까."

태성은 혜원의 손에서 그녀의 개인 휴대전화를 뺏기듯 가져왔다. 그리고 미리 입력해 두었던 국가수사본부 부장검사의 핫라인 번호를 눌렀다.

통화 신호음이 채 세 번을 울리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이태성 감독인가? 지금 생중계 보고 있네. 그게 정말 사실인가?

"화면으로 보고 계시면서 물으십니까, 검사님."

태성은 피 섞인 숨을 몰아쉬며, 장부에서 해금된 골든 하베스트의 비공개 금융 약정서 파일과 현장에서 촬영한 GH-0931의 정밀 사진 데이터를 즉각 전송했다.

"지금 메일로 전송한 파일에 골든 하베스트가 지난 5년간 영화 제작비를 빙자해 세탁한 비자금 세부 내역과, GH 제약의 마약성 약물 불법 유통 장부가 들어 있습니다. 이 정도면 긴급 체포 영장 발부하는 데 10분도 안 걸리겠지?"

수화기 너머에서 무거운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서류가 거칠게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지시 소리가 들려왔다.

- ……확인했네. 이건 단순한 마약 사건이 아니군. 금융 카르텔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는 메가톤급 폭탄이야. 즉시 특별수사팀을 현장으로 급파하겠네. 몸조리 잘하고 있게.

"빨리 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 쥐새끼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전화를 끊은 태성이 휴대전화를 혜원에게 툭 던졌다.

"스태프들 전부 백업 데이터 챙기고 철수 준비해. 오늘 촬영분은 우리 목숨줄이다."

"하지만 감독님, 세트장 가압류 건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차형록이 법원의 강제 집행관들을 움직였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혜원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 태성은 불타버린 세트장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욱한 연기 너머로 새벽의 푸른빛이 아주 미세하게 비쳐 들고 있었다.

"올 테면 오라 그래. 판을 깔아놨으니, 손님을 맞이해야지."

세트장의 소방수 불길이 완전히 진화되고, 사방에 짙은 탄내와 가스 연기가 자욱하게 깔린 그 순간이었다.

멀리서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한두 대가 아니었다. 붉고 푸른 경광등 불빛이 골목길의 낡은 담벼락을 어지럽게 물들이며 세트장 입구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검찰 수사 차량과 경찰차, 그리고 구급차들이 먼지를 휘날리며 들이닥쳤다.

하지만 그 경찰차들의 행렬을 뚫고, 기이할 정도로 거대한 외제 세단 서너 대가 세트장 정문 안마당까지 무단으로 밀고 들어왔다.

끼이익!

타이어가 흙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차 문이 열렸다.

어둠을 뚫고 걸어 나오는 사내들. 검은 양복을 입은 용역 수십 명과 그 뒤를 따르는 법원 로고가 선명한 서류 봉투를 든 강제 집행관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는, 잘 재단된 코트를 걸친 골든 하베스트의 수장 차형록이 서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비열하고도 오만한 웃음기가 가득 고여 있었다.

차형록은 주저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겨, 피를 흘리며 서 있는 이태성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방금 법원으로부터 실시간으로 발급된 도장이 찍힌 문서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이태성 감독. 여기까지 아주 재밌는 쇼를 보여줬군."

차형록이 백색의 서류를 태성의 눈앞에 흔들며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법은 예술보다 힘이 센 법이지. 방금 법원으로부터 이 세트장 내의 모든 촬영 장비와 오늘 촬영한 영화 필름 일체에 대한 '강제 가압류 및 현장 봉인 집행 명령'이 떨어졌다. 너희는 이제 카메라 한 대, 필름 한 칸도 여기서 가지고 나갈 수 없어."

강제 집행관들이 붉은색 압류 딱지를 들고 세트장 안으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스태프들이 비명을 지르며 제지하려 했으나, 덩치 큰 용역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차형록이 태성의 귀에 얼굴을 밀착하며 낮게 속삭였다.

"네가 무슨 짓을 하든 이 영화는 세상에 나오지 못해. 내가 널 여기서 완전히 묻어버릴 테니까."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태성은 피로 물든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차형록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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