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도 흐려진 밤, 가을바람이 쓸쓸히 무덤가 같은 대지를 쓸고 지나갑니다. 이곳은 본래 당신의 가문, 한(韓)씨 세가의 영광이 서려 있던 서운산(棲雲山) 자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광의 흔적 대신 가문 무인들의 고결한 뼈 위에 사독문(邪毒門)의 검붉은 깃발이 불길하게 펄럭이고 있을 뿐입니다. 멸문당한 가문의 옛 터전을 바라보는 당신의 흑색 눈동자엔 일생을 지배한 고독과 묵은 비장함이 서리서리 맺혀 있습니다.
하오문의 시비가 건넨 서신에 적힌 대로, 사독문의 숨통을 쥐고 있는 비밀 창고는 산자락 깊숙한 협곡 사이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기괴하게 뒤틀린 고목들 사이로 드러난 석조 창고의 외벽은 푸르스름한 이끼와 정체불명의 점액질로 뒤덮여 있어, 마치 거대한 독충의 고치를 연상케 합니다. 사방을 둘러싼 경계는 물샐틈없어 삼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철갑을 두른 무인들이 격자 모양으로 사위를 순찰하고 있으며, 기척을 숨긴 암초(暗哨)들이 나뭇가지 사이에서 매의 눈으로 어둠을 부릅뜨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당신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삼엄한 경비가 아니었습니다. 창고 주위를 장막처럼 두껍게 에워싸고 있는 구슬픈 녹색의 안개, 바로 흡입하는 즉시 오장육부를 녹여내린다는 사독문의 비전 독무(毒霧)인 '인폐골독(咽肺骨毒)'이 대지에 자욱했습니다. 가을 서리조차 얼어붙게 만드는 기괴한 한기와 함께, 대기를 부식시키는 치명적인 기운이 바람을 타고 은밀히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일류 고수라 한들 내력의 방어막 없이는 찰나의 순간에 해골로 변할 마공의 유산이었습니다.
당신은 허리춤에 매달린 칠흑의 검자루를 가만히 어루만집니다. 이십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빛 한 점 들지 않던 기괴한 동굴의 어둠 속에서 당신이 삼킨 것은 독이었고, 뱉어낸 것은 서린 검기였습니다. 뼈를 깎는 고절(孤絶)의 시간 속에서 마침내 완성한 독문무공은 이제 당신의 혈관 속에 차가운 밤강물처럼 고요히 흐르고 있습니다. 눈앞의 독무는 치명적인 재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십 년 동안 당신의 육신에 아로새겨진 독공(毒功)을 깨우는 정수일지도 모릅니다.
마침 바람이 거세지자 녹색 안개가 요동치며 창고로 향하는 외길을 더욱 짙게 가로막습니다. 그때, 저 멀리 사독문의 문양이 선명한 수송마차가 철 무겁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독무가 잠시 걷히는 안전 통로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마차의 하부에는 어두운 그늘이 깊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가문의 원수들에게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할 첫걸음이 바로 저 너머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독무를 마주한 당신의 발끝에 스산한 살기가 어려 들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