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淸風)마저 숨을 죽인 밤이다. 대지 위에 흩뿌려진 선혈은 은은한 월광을 받아 검붉은 자색(紫色)으로 빛나고 있었다.
당신의 손에 들린 검, 오랜 침묵을 깨고 세상으로 나온 ‘야율검(夜律劍)’의 검신을 따라 궂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그것은 마치 이십 년 동안 가슴 깊이 품어온 한(恨)을 토해내는 차가운 눈물과도 같다.
백하문(白河門)의 전초 기지는 고요 속에 침몰해 있었다. 불과 반 시진 전까지만 해도 장검을 부딪치며 기세를 올리던 삼류 무사들의 기개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적막한 죽음의 향취만이 숲을 채운다. 당신의 복수는 노도와 같았으나, 그 궤적은 무척이나 서정적이었다. 달빛을 베어 무는 서리처럼 차가웠고, 가을 밤풍경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무심했다.
스러진 삼십여 명의 시신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붉은 거품을 토하며 연명을 도모하고 있었다. 백하문의 초소 지휘관. 그의 가슴팍에는 깊고 푸른 검흔(劍痕)이 푸른 이끼처럼 돋아나 있었다. 매화가 흐드러지듯 꽃피운 검상(劍傷)은 당신이 연마한 고독한 무공의 결정체였다.
당신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심(無心)의 눈빛으로 그를 굽어본다. 살기조차 거두어진 깊은 심연. 그것이 사내에게는 도리어 가공할 천형(天刑)으로 다가왔으리라.
"누구... 누구냐... 이토록 귀곡성(鬼哭聲)과 같은 검로를 쓰는 귀신이..."
"묻는 것은 나다."
당신의 목소리는 해묵은 무덤에서 피어오르는 인화(燐火)처럼 서늘하다. 검끝이 사내의 목울대를 실핏줄처럼 파고들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 종내 그가 피할 수 없는 진실을 뱉어낸다.
"남... 남궁... 세가... 창천(蒼天)의 이름 아래... 너희 가문을 지우라 은밀히 사주한 것은... 제왕검(帝王劍)의 후예들이었다..."
그 이름이 귀를 파고드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가느다란 균열이 일어난다. 남궁세가. 천하를 호령하는 정종(正宗)의 명문이자 무림의 대들보라 불리던 자들이 바로 당신의 가문을 멸문 지경으로 몰아넣은 흑막이었던 것이다. 위선으로 가득 찬 가문의 백색 장포가 피비린내 속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흐흐... 이미... 늦었다... 그분들의 정찰대가... 이 영내를..."
사내의 목덜미가 꺾이며 마지막 단말마가 끊어졌다. 백하문의 거점은 완벽한 침묵 속에 잠겼다.
원수의 꼬리가 잡혔다. 비로소 가야 할 길의 안개가 걷혔으나, 사방은 적막한 어둠뿐이다. 산비탈 너머로 남궁세가의 정찰대가 발하는 서슬 퍼런 살기가 바람을 타고 여기까지 전해온다. 적들의 목을 추가로 베어 복수의 서막을 피로 물들일 것인가. 아니면 가문이 무너지던 날, 홀로 살아남아 자취를 감추었던 옛 동맹의 흔적을 좇아 힘을 모을 것인가.
차가운 야풍이 밤의 장막을 흔들고, 당신의 손가락은 다시 검자루를 굳게 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