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을 에는 한풍(寒風) 속에서 마침내 원한에 찬 세월의 잔재가 한 자루 검 끝에 응집된다. 파르르 떨리는 검신이 남궁세가 가주의 심장을 깊숙이 꿰뚫었을 때, 외마디 비명은 홀연히 멎고 오직 사위(四圍)를 감싸는 차가운 대기만이 남는다. 이십 년의 세월, 오직 이 한순간을 위해 주칠한 어둠 속에서 독을 삼키고 뼈를 깎아내던 당신의 고독한 행보가 마침내 그 종막을 고하는 순간이다.
적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혈은 붉지 않다. 이미 당신의 검에 실린 사독(蛇毒)의 진기가 그의 오장육부를 검게 태워버린 까닭이다. 검을 거두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자의 육신은 마치 고목이 꺾이듯 차디찬 대리석 바닥 위로 무너져 내린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하였던가. 가문을 멸하고 찬란한 영화를 누리던 자의 최후는 바람에 날리는 낙엽만큼이나 허망하고 쓸쓸하다.
검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먹물 같은 피를 바라보며, 당신은 가슴속을 채우던 응어리가 풀려나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승리의 희열이 아니었다. 뼈마디를 파고드는 지독한 한기와 함께 단전(丹田) 깊은 곳에서 잠자던 포악한 마성(魔性)이 마침내 임계점을 이탈한다.
아아, 전신의 경맥을 타고 역류하는 사독진기는 이제 주인을 삼키는 검은 불꽃이 되어 온몸을 사정없이 불태운다. 주화입마(走火入馬). 깊고 어두운 심연에서 끌어올린 힘의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핏줄이 까맣게 도드라지며 시신경을 타고 올라오고, 당신의 맑던 안광은 이성을 잃은 악귀의 붉은 살기로 물든다.
오운차월(烏雲遮月)이라, 검은 구름이 달빛마저 삼켜버린 잔혹한 밤.
복수는 끝났으나 구해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은 스스로가 흘린 검은 피의 제물이 되어 버렸다. 한때 가문의 영광을 재건하려던 고결한 검수는 사라지고, 오직 피에 굶주린 한 마리 맹수만이 중원의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달빛조차 비끼어 가는 울창한 죽림 사이로, 밤마다 홀로 울부짖는 고독한 악귀의 울음소리가 쓸쓸하게 울려 퍼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