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은 이윽고 기괴할 정도로 고요해집니다. 귀를 찢던 비명도, 골수에 사무치던 원한의 노호성도 한 조각 바람에 흩뿌려진 먼지처럼 사그라졌습니다. 오직 대지를 적시는 붉은 빗방울만이 역한 혈향을 풍기며 당신의 뺨을 타고 흘러내릴 뿐입니다.
검을 쥔 손끝이 마비된 듯 차갑게 식어 갑니다. 이십 년의 세월, 어두운 동굴 속에서 홀로 혀를 깨물며 무공을 연마하던 시절에는 오직 이 순간만을 소망했습니다. 가문을 도륙한 원수들의 목을 베어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 그 대업을 마침내 완수하였으되, 당신의 가슴에 휘몰아치는 것은 무림을 제패했다는 오연한 희열이 아니요, 끝간 데 없는 일망무제(一望無際)의 허무함뿐입니다.
고개를 들어 황량한 천지를 바라봅니다. 핏빛으로 물든 산하는 참화로 인해 잎새 하나 남지 않았고, 쓰러진 자들의 영혼이 원혼이 되어 밤안개 속을 정처 없이 떠돕니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의기도, 사사로운 복수를 갚겠다던 집념도, 결국 이 거대한 인과(因果)의 수렁 속에서 서로를 파멸로 이끄는 칼부림에 불과했음을 깨닫습니다. 아, 무정한 강호여. 은원의 사슬은 한 고리를 끊어내면 다시 새로운 업보를 엮어 인간을 평생 옭아매는 법입니다.
당신은 천천히 물이 고인 대지 위에 무릎을 꿇습니다. 일생을 함께하며 차가운 살기를 뿜어내던 검, 흑매검(黑梅劍). 한때는 가문의 끊어진 맥을 잇고 정의를 세울 유일한 빛이라 믿었던 그 철날을 지시합니다. 대지는 말이 없고, 흐르는 강물은 인간의 부질없는 은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묵묵히 흐릅니다. 당신은 검 끝을 부드럽게 흙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이제, 모든 인연의 고리를 이곳에 묻는다.”
검날이 대지에 깊숙이 묻힐 때, 스러져간 수많은 생명들의 묵은 넋이 밤바람을 타고 한 송이 검은 매화가 되어 사방으로 산화하는 듯합니다. 맑은 검향(劍香) 대신 자욱한 흙먼지만이 당신의 소맷자락을 쓸고 지나갑니다. 당신의 손은 더 이상 검자루를 쥐지 않습니다. 차가운 쇠붙이의 온기 대신, 텅 빈 손아귀에 잡히는 것은 오직 쓸쓸한 밤공기뿐입니다.
계곡 깊은 곳에서부터 푸른 안개가 밀려옵니다. 누구의 발길도, 바람의 소리도 닿지 않는 영원한 심산유곡(深山幽谷)의 초입에 서서 당신은 마침내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피로 물들었던 투쟁의 길도, 앞으로 펼쳐질 무림맹주의 영광도 모두 허망한 물거품에 지나지 않음을 알기에.
쓸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욱한 안개 속으로 한 걸음씩 발을 내딛습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세상에 남긴 당신의 궤적이, 피비린내 나던 이름 '한설'이 자욱한 습기 속으로 녹아내려 영원히 지워집니다. 뒤에 남은 것은 오직 주인을 잃고 대지에 묻힌 검 한 자루와, 그 위를 허무하게 스치는 바람의 독백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