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뒤덮었던 자욱한 흑풍(黑風)이 비로소 걷힌다.
숨이 멎은 백두(百頭)의 원수들을 발아래 두고, 당신은 천천히 검을 거둔다. 이십 년 세월, 음습한 동굴의 혹독한 한기 속에서 홀로 온기를 탐하며 갈고닦았던 백무가의 절예가 마침내 대단원의 종언을 고하는 순간이다. 혈로(血路)의 끝에 남은 것은 승자의 거만한 포효가 아닌, 황량한 산야를 메우는 쓸쓸한 북풍 소리뿐이다.
무림의 명숙이라 자처하며 온갖 음모를 획책했던 모든 배후가 당신의 마지막 일검 앞에 고꾸라졌다. 당신이 떨친 검끝은 마치 보름달이 차올라 밤하늘의 어둠을 베어내듯 청명했고, 흐르는 물처럼 기나긴 잔영을 남기며 일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적의 단전을 꿰뚫었다. 그것은 지독한 고독 끝에 도달한 무(武)의 극의이자, 백무가가 천하에 고하는 서릿발 같은 선언이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하였거늘……."
피비린내로 얼룩진 장원에 세워진 백무가의 흑매화(黑梅花) 깃발을 바라보며 당신은 낮게 읊조린다. 깃발은 잔잔히 부는 바람을 타고 지존의 위치에서 고고히 나부낀다. 원수들의 무자비한 탐욕으로 스러져간 가문의 넋들이 비로소 그 바람에 실려 구천으로 돌아갔으리라.
당신의 등 뒤로, 기나긴 멸문의 풍파 속에서도 끝내 꺾이지 않고 당신의 곁을 묵묵히 지켜온 연인이 소리 없이 다가선다. 그녀의 눈망울에 고인 눈물은 비단 지난날의 슬픔만을 담고 있지 않다. 그것은 피로 물든 강호에 마침내 새로운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서광(曙光)과도 같다. 당신은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홀로 걷던 차가운 밤길이 마침내 끝났음을 깨닫는다.
강호의 은원(恩怨)은 가을 물과 같아 머무르지 않고 흘러가 인간의 자취를 지우나, 당신이 새로이 세운 백무가의 의기(義氣)는 백 년의 세월 동안 흔들리지 않고 무림의 등불이 될 것이다. 지독한 먹구름이 걷히고 마침내 중원의 밤하늘에 푸른 달빛이 가득 차오른다.
당신은 검을 완전히 칼집에 밀어 넣는다. 철컥이는 쇳소리가 지독했던 한설(寒雪)의 끝을 알린다. 이제 천하는 백무가의 검 아래 새로운 질서와 평안을 맞이할 준비를 끝마쳤다. 당신은 다시는 꺾이지 않을 흑매의 침묵 속에서, 저 멀리 붉게 밝아오는 새벽녘의 지평선을 고요히 응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