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허공을 가른 지훈의 거친 손가락이 태성의 셔츠 깃에 닿기 직전이었다.

짝!

서늘한 정적을 깨뜨리는 가혹한 마찰음이 감독실 내부를 때렸다. 태성이 아주 간결하고도 매서운 궤적으로 지훈의 손목을 쳐낸 것이었다. 손등을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충격에도 태성의 눈동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되레 비정상적으로 가빠오는 숨을 누르기 위해 그의 턱뼈가 단단하게 맞물렸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갈비뼈 안쪽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격통이 밀려왔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될 정도의 스트레스 수치 상승. ‘택티컬 레저’가 지훈의 발목 아킬레스건을 강제로 개화하고 염증을 소멸시킨 대가였다. 겉으로는 시체처럼 차가운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태성의 셔츠 안쪽은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가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폐포 깊은 곳에서 비린내가 올라왔다.

지금 무너지면 끝이다. 저 날뛰는 짐승 같은 유망주를 굴복시키려면, 단 한 틈의 나약함도 보여서는 안 된다.

태성이 짓이겨진 목소리를 억누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주제망각이 도를 넘었군, 백지훈."

"뭐라고?"

지훈이 이를 갈며 쳐들린 손목을 움켜쥐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는 배신감과 독기가 한데 섞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사채업자 그 인간 쓰레기들이 부리는 뚜쟁이냐고! 내 발목이 이 모양 이 꼴인 걸 어떻게 알았고, 그 새끼들이 가진 내 빚 서류는 어떻게 빼돌린 건데!"

태성은 대답 대신 느릿하게 손을 뻗어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서 두툼한 서류 봉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성은 그것을 지훈의 가슴팍을 향해 툭, 던지듯 내팽개쳤다.

서류 봉투가 허공을 갈라 지훈의 단단한 가슴에 부딪힌 뒤 책상 위로 떨어졌다.

스르륵 흘러나온 종이쪼가리들.

그 맨 위표지에는 지훈의 부친이 갈겨쓴 조잡한 한글 서명과 함께, 붉은색 인감이 선명하게 찍힌 사채 원본 각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아주 깔끔한 서체로 인쇄된 법적 문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채권 양도 합의서] 양수인: FC 로드 (대표 장혜리) 양도인: 독사 금융 (대표 오창식)

지훈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는 허리를 숙여 미친 듯이 서류를 뒤적였다. 한 장, 두 장, 종이가 넘어갈 때마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른 속도로 거두어졌다.

"이…… 이게 왜 당신 손에……."

"네가 그 잘난 자존심을 세우며 방구석에서 썩어갈 때, 네 아비라는 인간은 이미 네 미래를 담보로 사채업자들에게 손을 벌렸다."

태성의 목소리에는 단 한 줌의 동정도 없었다. 오히려 지독할 정도로 비즈니스적이고 냉혹한 현실만을 담아내고 있었다.

"송관우. 그 에이전트 놈이 네 뒤에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었는지 아직도 감이 안 오나?"

태성이 다음 서류를 지훈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계약서가 아니었다. 송관우가 사채업자 오창식과 주고받은 은밀한 약정서의 사본이었다.

"송관우는 네 아비의 도박 빚을 일부러 방치했다. 아니, 오히려 부추겼지. 사채 이자가 네 키보다 높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결국 네가 사방이 막혀 숨이 넘어갈 때쯤 구원자처럼 나타날 생각이었던 거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네 '영웅권(소유권)'을 헐값에 넘겨받기 위한 수작이었다는 뜻이다. 네 발목이 완전히 주저앉아 국내 리그에서 매장당하면, 송관우는 사채 채무를 빌미로 널 해외 하부 리그나 불법 사설 도박 리그의 소모품으로 팔아넘기려 했다. 그 장부가 바로 네 손에 들려 있는 그거다."

지훈의 손끝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사실이었다.

송관우는 언제나 자신에게 친절한 척, 기회를 주겠노라 속삭이던 에이전트였다. 하지만 그의 이면에는 자신을 영원히 빚의 굴레에 가두어두고 피를 빨아먹으려던 거대한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태성이 장혜리 구단주를 통해 법률 자문을 구하고, 구단 예산을 변칙적으로 움직여 사채업자들의 채권을 합법적으로 인수해 오지 않았다면, 지훈은 사흘 뒤 송관우가 파놓은 함정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을 터였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다 알고……."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태성이 지훈의 턱 끝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억센 힘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태성이 뿜어내는 기세는 지훈의 숨통을 조이기에 충분했다.

"중요한 건, 이제 네 목줄을 쥔 주인이 바뀌었다는 사실이지."

"……!"

"송관우의 더러운 손아귀에서 널 꺼내온 건 나다. 장혜리 구단주의 명의를 빌렸지만, 결국 이 채권을 주무르는 건 나란 말이다. 이제 네 아킬레스건을 짓누르던 통증도 사라졌겠지?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지훈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실제로 발목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다. 깃털처럼, 아니, 고등학교 시절 가장 전성기였던 그 순간보다 더 완벽한 탄성이 아킬레스건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이 기적 같은 신체 변화와 눈앞의 냉혹한 감독이 제시한 서류들이 톱니바퀴처럼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선택해라, 백지훈."

태성이 서류 뭉치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평생 송관우의 노예가 되어 음지에서 구르다 비참하게 은퇴할 것인가. 아니면 내 밑에서 사냥개가 되어, 그라운드 위의 모든 적을 물어뜯고 양지의 왕좌로 올라갈 것인가."

지훈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자신을 기만한 송관우를 향한 살의였고, 동시에 자신을 이 나락에서 건져 올린 눈앞의 남자, 강태성을 향한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자 경외감이었다.

이 남자는 괴물이다.

동시에,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악마였다.

지훈이 마침내 태성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서류를 가슴에 품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거친 숨소리 사이로 짓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뭐부터 하면 되지?"

태성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짐 싸라. 당장 떠난다."

* * *

오후 2시, FC 로드 클럽하우스 정문 앞.

구단의 낡은 전용 버스 한 대가 시동을 건 채 덜컹거리고 있었다. 매연을 쿨럭이며 뿜어내는 버스 주변으로, 꾀죄죄한 유니폼 차림의 선수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아니, 갑자기 훈련원은 무슨 훈련원이야? 서해? 거긴 염전밖에 없는 깡촌이잖아!"

"감독 미친 거 아냐? 사흘 뒤면 주니어 대표팀이랑 평가전인데, 이 타이밍에 이동을 한다고?"

선수들의 얼굴에는 패배주의와 불만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이미 구단이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고 믿는 오합지졸들이었다. 훈련을 열심히 해봐야 연봉이 오르는 것도 아니고,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 시간만 때우며 이적 시장에 자신들을 받아줄 다른 삼류 구단이 없는지 기웃거리는 처지들이었다.

그때, 구단주 장혜리가 날카로운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버스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뒤로 비서와 구단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원 탑승하세요."

장혜리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지금부터 외부와의 모든 연락은 차단됩니다. 휴대폰은 전부 회수하겠어요."

"예? 휴대폰 회수라니요! 구단주님, 이건 인권 침해 아닙니까?"

고참 선수 한 명이 항의하듯 한 걸음 나섰다. 장혜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구단 규정 제14조, 감독의 재량에 따른 특별 소집 훈련 시 선수는 구단의 통제에 전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불응할 시 즉시 계약 해지 및 잔여 연봉 지급 정지 처분을 내리겠습니다. 불만 있으신 분은 지금 이 자리에서 짐 싸서 나가셔도 좋습니다."

싸늘한 일갈에 선수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들의 시선이 장혜리의 뒤편, 천천히 걸어 나오는 강태성 감독에게로 향했다.

태성은 검은색 트레이닝복 지퍼를 목 끝까지 채워 올린 채, 한 손에는 낡은 가죽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그라운드를 통치하는 제왕처럼 오만하고 단단했다.

그리고 태성의 바로 한 걸음 뒤.

마치 그림자처럼 고개를 숙인 채 따라오는 인물이 있었다.

"어? 저 새끼 백지훈 아냐?"

"백지훈이 왜 저기 있어? 훈련도 안 나오던 놈이?"

선수들이 웅성거렸다. 백지훈은 팀 내에서 가장 통제 불가능한 시한폭탄이자, 사채 빚에 쫓겨 다니는 골칫덩이였다. 그런 그가 마치 얌전한 사냥개처럼 태성의 뒤를 묵묵히 따르고 있는 모습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태성이 버스 계단에 올라서며 선수들을 내려다보았다.

"30초 준다."

태성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기묘한 압박감을 품고 있었다.

"타라. 타지 않는 놈은 이 시간부로 내 스쿼드에서 제외다. 주니어 대표팀 경기든, 그다음 리그 경기든, 내 눈에 띌 일은 영원히 없을 거다."

그의 시선이 선수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었다.

단순히 기세 싸움이 아니었다. 태성의 시야 속에서 '택티컬 레저'의 푸른빛 숫자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공격수 김민우: 전술 적합도 42% (하락세)] [미드필더 최현태: 체력 한계치 55% (정체)] [골키퍼 박주영: 반응 속도 48% (둔화)]

쓰레기들.

과거의 영광에만 사로잡혀 몸 관리조차 하지 않은, 그야말로 썩어빠진 오합지졸들이었다. 하지만 태성은 이들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이 폐급 자재들을 깎고 조각해서,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방패와 날카로운 창으로 재탄생시키는 것.

그것이 이 기적의 장부를 손에 넣은 자신의 의무이자,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

"10초 남았다."

태성이 시계를 보지도 않고 읊조렸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백지훈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버스 계단을 밟고 올라가 가장 뒷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오직 독기만이 서려 있었다.

지훈이 움직이자, 눈치를 보던 다른 선수들도 서둘러 버스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투덜거림은 여전했지만, 태성과 장혜리가 뿜어내는 서슬 퍼런 기운에 압도되어 감히 소리를 높이는 자는 없었다.

덜컹.

버스 문이 닫히고, 낡은 차량이 클럽하우스를 벗어나 서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흐릿한 회색빛 도시의 풍경이 지나가고, 이내 텅 빈 논밭과 갯벌의 짠내가 섞인 바람이 창문 틈새로 불어닥쳤다.

태성은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가슴 통증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지만,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스트레스 지수는 여전히 위험 수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해 고립 훈련원.’

그곳은 단순한 훈련장이 아니다. 외부의 모든 방해 공작과 언론의 눈을 차단하고, 오직 자신만의 전술을 선수들의 뇌리에 강제로 주입할 수 있는 완벽한 밀실이었다. 그곳에서 사흘 동안, 자신은 이 쓰레기들을 인간의 한계까지 몰아붙일 생각이었다.

* * *

세 시간의 주행 끝에 버스가 멈춰 선 곳은, 사방이 거친 갈대숲과 진흙 갯벌로 둘러싸인 황량한 부지였다.

과거 염전이었던 폐허 위에 지어진 서해 고립 훈련원.

높게 솟은 콘크리트 담벼락 위에는 철조망이 엉성하게 얽혀 있었고, 낡은 철문은 녹슬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려라."

태성의 명령에 선수들이 툴툴거리며 가방을 메고 내렸다.

"와, 진짜 무슨 감옥도 아니고…… 여기서 훈련을 하라고요?"

"공기가 아예 다른데? 짠내가 진동을 하네."

선수들이 흙먼지를 털어내며 정문을 통과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부아아앙!

거친 엔진 소리와 함께 세련된 외제 SUV 한 대가 먼지를 뿜으며 훈련원 정문 앞을 가로막아 섰다. 느닷없는 차량의 등장에 선수들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차 문이 열리고, 선글라스를 낀 사내 한 명이 내렸다.

잘 정돈된 네이비색 트레이닝복, 가슴팍에 선명하게 새겨진 '드래곤즈'의 엠블럼.

그는 FC 로드의 지역 라이벌이자, 명문 구단으로 도약 중인 '드래곤즈'의 2등 코치, 임태수였다. 그의 뒤편 차 조수석에서는 한 스태프가 캠코더를 든 채 버젓이 이쪽을 촬영하고 있었다.

임태수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강태성 감독님 아니십니까? 이런 깡촌 구석에서 고아원 캠프라도 차리신 줄 알았습니다."

지독할 정도로 예의를 가장한 조롱이었다.

FC 로드의 선수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패배주의에 젖어 있다 한들, 라이벌 구단의 코치에게 대놓고 무시당하는 상황은 자존심을 긁기에 충분했다.

태성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차가운 눈빛으로 임태수를 응시했다.

"용건만 말해라."

"하하, 명색이 지역 라이벌인데 인사가 너무 박하십니다."

임태수가 캠코더 쪽을 슬쩍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희 드래곤즈 한재열 감독님께서 아주 흥미로운 제안을 하셔서요. 안 그래도 해체 직전인 불쌍한 구단이라 훈련 파트너 구하기도 힘드실 텐데, 내일 당장 우리 2군이랑 연습 경기 한 판 어떠십니까? 아, 물론 카메라로 경기 분석 좀 하는 조건으로요. 주니어 대표팀이랑 하기 전에 몸풀기는 하셔야지 않겠습니까?"

도발이었다.

단순히 연습 경기를 제안하는 것이 아니었다. 2군을 보내 정식 경기도 아닌 연습 매치에서 FC 로드를 처참하게 짓밟고, 그 전술과 치부를 언론에 공개해 완전히 매장해 버리겠다는 한재열의 추악한 심리전의 서막이었다.

카메라 렌즈가 태성의 얼굴을 집요하게 향했다.

선수들은 침묵했고, 팽팽한 긴장감 속에 서해의 차가운 바닷바람만이 갈대숲을 흔들었다.

태성이 천천히 임태수에게로 걸어갔다.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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