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사흘씩이나 기다려 줄 필요가 있나?"

멀어지려던 고급 세단의 조수석 문이 신경질적으로 열렸다.

흙먼지를 뚫고 구두 굽을 디딘 박우진 상무가 가죽 서류철을 든 채 태성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이마에 핏대가 돋아 있었다. 수트 기사들이 뒤를 따랐다.

박 상무가 태성의 가슴팍을 가죽 서류철로 툭툭 쳤다. 가죽 냄새와 매캐한 담배 냄새가 태성의 코끝을 찔렀다.

"생각해 보니 사흘 뒤까지 이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광대 짓을 지켜볼 이유가 없더군. 당장 사직하고 구단 해체 동의서에 서명해라. 곱게 물러나면 이사회 차원에서 퇴직금 명목으로 몇 푼 쥐여줄 용의는 있으니까."

서류철이 태성의 가슴을 칠 때마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명치를 타고 올라왔다.

[현재 스트레스 지수: 29%] [심장 부하 경보: 부정맥 감지.]

가슴속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태성은 이를 악물었다. 턱뼈가 으스러질 듯 힘이 들어갔다. 입안에 고인 침을 붉은 흙바닥에 뱉어냈다. 피가 섞여 붉은 자국이 남았다.

태성은 고개를 들어 박 상무를 똑바로 응시했다. 차가운 살기가 어린 눈빛에 박 상무의 어깨가 찰나의 순간 움츠러들었다.

"서명?"

태성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이 쓰레기 같은 종이 쪼가리에 내 이름 석 자를 적을 일은 없다, 박 상무."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네놈이 감독 타이틀 달고 여기서 버텨봤자 남는 건 횡령 독박이랑 축구계 영구 제명뿐이야! 좋은 말로 할 때 서명해!"

박 상무가 서류철을 태성의 얼굴 앞으로 들이밀며 소리를 질렀다. 침방울이 튀었다.

태성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눈앞에 기이하게 반짝이는 반투명한 장부가 펼쳐졌다. 택티컬 레저(Tactical Ledger). 오직 태성의 눈에만 보이는 장부가 박 상무의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대상: 박우진 (FC 로드 상무이사)] [특이 사항: 구단 자산 사적 유용 및 횡령 의혹] [세부 데이터: - 신한은행 차명계좌 (예금주: 박*선, 친인척) - 최근 3개월간 청소년 육성 기금 세탁 정황 포착 - 누적 횡령 금액: 3억 4,500만 원]

태성의 동공이 가늘어졌다. 숫자가 뇌리에 박혔다. 완벽한 데이터였다. 회귀 전, 구단이 공중분해 될 때 언론에 흘러나왔던 소문들이 이 장부 위에서는 명백한 '수치'로 증명되어 있었다.

태성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박우진 상무."

"뭐? 이제야 겁이 좀 나냐?"

"신한은행, 예금주 박옥선."

박 상무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들이밀던 서류철을 잡은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너, 너 그 이름을 어떻게……."

"3억 4천 5백만 원."

태성은 박 상무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정확한 액수를 내뱉었다.

"청소년 육성 기금 명목으로 들어온 구단 지원금, 참 알뜰하게도 쪼개서 세탁하셨더군. 최근 3개월 동안 서부지점에서 주 2회씩 출금된 내역까지 읊어줘야 서명 대신 경찰서로 갈 차비를 하겠나?"

박 상무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누렇게 뜬 얼굴로 태성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극도의 공포가 떠올랐다. 이 횡령 기획은 이사회 내부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절대 비밀이었다. 일개 삼류 코치 나부랭이가, 그것도 당장 쫓겨날 바지 감독이 이 완벽한 가짜 장부의 실체를 꿰뚫고 있을 리가 없었다.

"네, 네놈이 그걸 어떻게…… 무슨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증거 있어?!"

"증거?"

태성이 박 상무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쳤다.

억센 힘에 박 상무가 뒤로 두 걸음 비틀거렸다. 태성은 그의 손에 들린 서류철을 낚아채어 그대로 반으로 찢어버렸다. 찌지직,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찢긴 종이 조각들이 진흙 바닥으로 흩날렸다.

"내 눈이 증거고, 내 머릿속에 든 데이터가 증거다. 장혜리 구단주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까? 대기업의 적대적 인수합병을 막으려 발버둥 치는 젊은 구단주가, 내부에서 피를 빠는 기생충을 발견했을 때 말이야."

"강태성……!"

"사흘 뒤다."

태성은 짓이기듯 말했다.

"그때까지 내 눈앞에서 꺼져라. 그리고 만약 그 경기 전에 내 훈련장에 발을 들이거나 허튼수작을 부리면, 이 장부 전체가 금융감독원과 언론사에 통째로 넘어갈 줄 알아."

박 상무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태성의 눈빛은 허세를 부리는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모든 패를 쥐고 흔드는 포식자의 눈이었다.

"가자."

박 상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수행원들에게 손짓했다. 그는 도망치듯 세단에 올라탔다. 먼지를 휘날리며 사라지는 차 뒷모습을 보며, 태성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쿵.

또다시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에 태성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하지만 입꼬리는 내려가지 않았다. 적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쥐었다. 이 구단에서 자신을 흔들 수 있는 자는 이제 없다.

태성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렸다.

운동장 한구석, 땀에 젖어 헐떡이며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백지훈이 서 있었다. 그의 눈에는 반항심과 혼란, 그리고 깊은 불신이 뒤섞여 있었다.

"백지훈."

태성이 그를 불렀다.

"따라와라."

***

감독실 안은 서늘했다.

낡은 책상과 전술 분석용 화이트보드가 전부인 좁은 방. 태성은 책상 뒤에 걸터앉아 책상 서랍에서 두꺼운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던졌다. 탁, 소리를 내며 책상 위에 떨어진 봉투를 지훈은 힐끗 바라보았다.

"이게 뭡니까?"

지훈의 말투에는 날이 서 있었다. 언제든 들이받을 준비가 된 들개 같은 태도였다.

"네 목줄이다."

태성이 차갑게 대꾸했다.

"정확히는 사채업자 '독사'가 쥐고 있는 네 아버지의 도박 채무 변제 계약서 사본이지."

지훈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내 뒷조사라도 한 건가? 이딴 식으로 나 협박해서 뭘 얻으려는 건데!"

"협박이 아니라 비즈니스다."

태성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독사가 네 발목 연골을 담보로 잡고 매주 이자를 뜯어가고 있지. 네가 아무리 프로 무대에서 뛰어봤자, 네 연봉은 고스란히 그놈들 주머니로 들어간다. 네가 이 오합지졸 팀에서 썩어가며 패배주의에 물든 이유도 결국 그거잖아. 열심히 뛰어봤자 네 인생은 바뀌지 않으니까."

지훈은 이빨을 드러냈다.

"닥쳐! 당신이 뭘 알아! 내 인생이 어떤 지옥이었는지 당신이 어떻게 아냐고!"

"알아."

태성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그래서 내가 제안하는 거다. 빚 5천만 원. 장혜리 구단주를 통해 법률 자문을 구하고, 독사 놈들이 불법으로 증액한 이자 부분을 쳐내고 채권을 완전히 확보했다. 이제 네 빚의 주인은 나다."

지훈은 멍하니 태성을 바라보았다.

"내가 네 사채 빚을 대신 해결해 준다. 독사 놈들이 다신 네 주위를 맴돌지 못하게 묶어두는 것도 끝냈다."

"조건이…… 뭡니까?"

지훈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사채업자보다 더 독한 놈이 눈앞에 서 있었다.

태성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의 눈빛이 지훈의 심장 속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사흘 뒤 경기부터 시작해, 내 모든 전술에 네 영혼을 갈아 넣어라. 내가 뛰라고 하면 심장이 터질 때까지 뛰고, 멈추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뼈가 부러져도 멈춰라. 네 발목, 네 허벅지, 네 호흡 하나까지 전부 내 전술의 부품으로 바쳐라."

"……."

"지옥 같은 빚쟁이들의 개가 될래, 아니면 내 밑에서 황제가 될래? 선택은 네 몫이다."

지훈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지긋지긋한 가난, 아버지를 핑계로 자신을 옥죄던 사채업자들의 폭력. 그 사슬을 끊어낼 수만 있다면, 이 미친 감독의 부품이 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훈이 고개를 숙였다. 거친 머리칼 사이로 그의 붉어진 눈이 보였다.

"……하겠습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뼛속 깊은 집념이 담겨 있었다.

"하겠다고요, 시발. 당신이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그 지옥에서 나 좀 꺼내줘."

[계약 완료: 백지훈과의 '독점 전술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택티컬 레저의 성장 거래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태성의 시야에 백지훈의 능력치 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백지훈 (FW / 19세)] - 현재 잠재력: C- (부상 및 심리적 위축으로 하락 중) - 한계치 잠재력: S+ (천재적 오프더볼 및 순간 가속) - 현재 상태: 발목 만성 염증, 영양실조 초기

태성은 장부의 페이지를 넘겼다. 그의 손가락이 지훈의 능력치 중 '발목 안정성'과 '순간 가속' 항목을 가리켰다.

[성장 투입 가능 자원: 시스템 기초 포인트 100 SP] [투입 시 효과: 발목 염증 즉시 완화 및 순간 가속 잠재력 1단계 개화 (D+ -> C+)]

태성은 망설임 없이 포인트를 투입했다.

그 순간.

쿠궁!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해머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발생했다.

"끄흐으윽……!"

태성은 급격히 밀려오는 고통에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손톱이 나무 책상을 긁으며 찌르르 소리를 냈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요동치다, 이내 멎을 듯이 쿵쾅거렸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눈을 제대로 뜨기조차 힘들었다. 시야가 온통 붉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경고! 무리한 한계 돌파 및 가치 부여로 인해 신체에 급격한 부하가 발생합니다!] [현재 스트레스 지수: 45%] [위험 단계 진입: 심장 마비 전조 증상인 부정맥의 강도가 증가합니다. 추가적인 무리한 시스템 사용 시 생명력에 심각한 영구적 훼손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닥쳐…….'

태성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가슴을 짓누르는 바위 같은 무게감에 숨이 막혔다. 입안 가득 비릿한 피 맛이 다시 번졌다. 가슴이 갈갈이 찢어지는 고통이 뇌척수액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손끝이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딱딱하게 굳어갔다.

하지만 태성은 신음 소리를 밖으로 내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부러질 듯 깨물었다.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이 어린 괴물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은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 같아야 했다.

태성이 고통을 참으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섬뜩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한편, 지훈은 제 자리에 서서 멍하니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지훈이 조심스럽게 발가락을 움직이고, 발목을 좌우로 돌려보았다.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날 때마다 뼈를 찌르는 듯했던 만성적인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묵직하고 뜨겁게 타오르던 염증의 열감이 가라앉고, 발목 뒤꿈치 아킬레스건 부근이 깃털처럼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몸 안에서 무언가 족쇄가 풀린 듯한 기묘한 감각.

지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제자리에서 가볍게 발을 굴렀다. 통증이 없었다. 완벽하게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태성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감독은 땀에 흠뻑 젖은 채, 숨을 헐떡이며 자신을 비웃듯 바라보고 있었다. 귀신을 본 듯한 표정의 지훈이 태성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당신……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지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단순한 빚 탕감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이 즉각적이고 물리적인 변화는 의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아무리 뛰어난 감독이라 한들, 사채업자 '독사'의 이름과 자신만 알고 있던 은밀한 채무 내역을 이토록 정확하게 짚어내고 미리 확보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장혜리 구단주를 움직여 채권을 인수했다는 타이밍조차 너무나 정교했다. 마치 자신이 이 구단에 들어와 무너질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지훈의 혼란은 순식간에 깊은 의구심과 경계심으로 변했다.

"말해."

지훈이 태성의 책상 앞으로 다가와 두 손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그의 눈이 붉게 핏발 서 있었다.

"당신 사채업자 놈들이랑 한패야? 아니면 날 어떻게 알고 뒷조사한 건데! 내 발목이 이럴 걸 어떻게 알고 있었느냔 말이야!"

지훈은 이성을 잃은 듯 태성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태성의 셔츠 깃을 잡으려 허공을 갈랐다.

태성은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 속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훈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대답을 요구하는 지훈의 거친 호흡이 감독실의 서늘한 공기를 가득 채웠다. 사흘 뒤의 결전을 앞두고,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폭발하기 직전의 도화선처럼 타들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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