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숲 너머에서 거대한 전차가 땅을 진동하는 굉음을 울리며 기사단의 공성 병기 본대가 전면 전진하기 시작했다.

온실의 유리창들이 파르르 떨리며 가장자리에 맺혀 있던 하얀 서리꽃들이 힘없이 바닥으로 바스러져 내렸다. 이온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서늘한 공포에 손가락 끝줄기를 파르르 떨었다. 귀를 찢는 듯한 무거운 쇠붙이의 마찰음, 대지를 무자비하게 짓밟는 어른들의 거친 발자국 소리. 그것은 이온이 가장 두려워하는 과거의 기억을 사정없이 두드리는 망치와도 같았다.

숨이 가빠지고 시야가 핑글 돌려던 그때, 보드라운 온기가 그의 손등을 덮었다.

“형아, 괜찮아. 우리가 같이 있잖아.”

루미가 단단하고 야무진 눈빛으로 이온을 올려다보며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 옆에서는 바르크가 꼬리를 꼿꼿이 세운 채, 이온의 다리에 제 몸을 부비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아이들의 맑은 숨결과 뽀얀 온기가 이온의 마음에 고여 있던 차가운 응어리를 부드럽게 녹여 내렸다.

두려움을 이겨 내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지키고 싶은 온기가 곁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온은 심호흡을 크게 하며 떨리는 손을 뻗어 루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응, 고마워, 루미야. 바르크도. 이제 우리가 가꾼 이 소중한 보금자리를 지킬 시간이야.”

이온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시릴이 황동 안경을 치켜올리며 호기롭게 앞으로 나섰다. 그의 품에는 둥글고 정교한 톱니바퀴들이 촘촘하게 맞물린 기이한 금속 장치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난날 루미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깨진 장난감 태엽 장치였다. 시릴의 천재적인 손길을 거쳐, 장난감 태엽은 이제 정원의 위대한 수호자로 다시 태어나 있었다.

“드디어 이 몸의 역작을 보여 줄 때가 왔군요!” 시릴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소곤거렸다. “이온 씨, 3화에서 루미가 쓰던 그 소중한 태엽 장치 기억하시죠? 제 마도 공학 기술을 더해, 태엽의 회전력을 수만 배로 증폭시키는 ‘자동 씨앗 살포 동력기’로 완전히 개조했습니다! 가볍고 빠르며, 무엇보다 소음이 거의 없죠.”

시릴이 장치의 오른쪽 손잡이를 가볍게 돌리자, 째깍째깍하는 미세하고 규칙적인 소리가 아늑한 온실 안을 채웠다.

이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에 찬 가죽 주머니에서 붉고 단단한 씨앗들을 한 움큼 꺼내 들었다. 1화에 처음 온실에 불시착했을 때, 척박한 얼음 땅에 간신히 심어 길러 냈던 ‘고무 탄성 가시덤불’의 개량형 씨앗들이었다. 세계수의 맥박이 이온의 손끝에서 푸르게 전율했다.

“시릴 씨, 준비되었어요. 온실 앞 통로 전체를 덮을 수 있게 넓게 뿌려 주세요.”

“맡겨만 두시라니까요!”

시릴이 살포기의 상부 투입구를 열자, 이온이 정성껏 모아 둔 고무 탄성 가시덤불 씨앗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갔다.

태엽 장치가 힘차게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째깍거리는 소리가 경쾌한 리듬을 타며 빨라지더니, 살포기의 둥근 주둥이에서 초당 수백 발에 달하는 붉은 씨앗들이 숲의 전방을 향해 안개처럼 뿜어져 나갔다. 씨앗들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온실 앞마당의 새하얀 눈밭 속으로 쏙쏙 파고들었다.

이온은 두 손을 대지에 대고 눈을 감았다. 그의 심장 박동과 대지의 맥박이 하나로 연결되는 감각이 찾아왔다. 영식 도감의 마법적인 권능이 발동하며, 하얀 눈 아래 잠들어 있던 씨앗들이 일제히 생명의 고동을 시작했다.

초록빛 새싹이 돋아나고, 굵직한 갈색 줄기들이 고무처럼 부드럽고도 질긴 탄성을 품은 채 서로의 몸을 엮어 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온실 앞마당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눈밭 같지만, 밑바닥은 거대한 탄성 그물망으로 가득 찬 완벽한 트랩 지대로 변모했다.

이 엄청난 성장의 대가로 이온의 머릿속에 묵직한 피로감과 졸음이 안개처럼 밀려왔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다리가 살짝 풀리려 하자, 바르크가 기민하게 이온의 허리를 제 등으로 받쳐 주었다. 루미는 이온의 옷자락을 꼭 쥐고 속삭였다.

“형아, 조금만 버텨 줘. 우리가 꼭 지켜 줄게.”

아이들의 순수한 눈망울을 바라보며, 이온은 가슴을 가득 채우는 벅찬 감정을 느꼈다. 과거 자신을 배신하고 상처 입혔던 어른들의 세상과는 달랐다. 이곳의 온기는 일방적인 베풂이 아니었다. 이 작은 수인 아기들과 서로를 돌보고 생존을 나누는 과정에서 피어나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공동체의 연대였다. 그 믿음이 이온에게 기면증의 나른함을 이겨 낼 정신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때, 침엽수림의 거목들이 우지끈 무너지며 마침내 은빛 강철 기사단의 첨병 전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꺼운 철갑으로 온몸을 감싼 괴물 같은 기계 마차들이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돌진해 왔다. 전면에 달린 거대한 가시 바퀴들이 회전하며 대지를 잔인하게 짓밟았다. 전차 위에 탑승한 제국 기사들은 오만한 웃음을 터뜨리며 온실을 가리켰다.

“하하하! 겨우 저따위 유리 온실 하나를 차지하려고 이 고생을 했단 말인가! 단장님의 명령이다, 싹 다 짓밟고 정화의 과실들을 회수하라!”

기사들의 거친 고함이 숲을 울렸다. 하지만 온실 안의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바르크는 꼬리를 살랑이며 오히려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기대하듯 눈을 반짝였고, 루미는 시릴과 서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첨병 전차 세 대가 거침없이 온실 앞의 눈밭으로 진입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돌격하던 전차의 거대한 가시 바퀴가 눈 밑에 숨겨져 있던 고무 탄성 가시덤불의 중심부를 정면으로 밟았다.

그 순간, 지면이 깊게 가라앉는가 싶더니 가시덤불 줄기들이 엄청난 에너지를 머금은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리고 곧바로, 축적되었던 역학적 탄성 에너지가 단번에 폭발했다.

푸우웅―!

“어, 어어?! 으아아악!”

엄청난 무게의 철갑 전차가 마치 가벼운 종이 장난감처럼 하늘 높이 붕 떠올랐다. 기사들은 중력을 잃고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릴이 개조한 자동 살포기가 이번에는 이온이 수확해 둔 끈끈이 과즙 폭탄을 사방으로 발사했다.

퍼퍼펑!

허공으로 솟구쳤던 기사들의 철갑옷 위로 붉고 끈적한 과즙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철썩철썩 달라붙었다. 점성이 극대화된 과즙은 관절과 구동 부위에 닿자마자 굳어 버려, 기사들의 사지를 꼼짝달싹 못 하게 묶어 버렸다.

하늘 위로 기분 좋게 솟구쳤던 전차들과 기사들은, 온실 앞의 부드럽고 두꺼운 눈더미 위로 차례차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쿵! 퍼석! 털썩!

살상 지대나 다름없는 무기를 들고 왔던 침략자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그저 온몸에 달콤한 과즙을 뒤집어쓴 채 눈밭에 박혀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철갑옷의 관절이 단단히 접착되어 버린 탓에 그들은 마치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버둥거렸다.

“이, 이게 무슨 해괴한 마법이냐! 내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과일 냄새가 왜 이렇게 달콤한 거야! 으악, 눈에 들어갔어!”

기사들의 비명과 웅얼거림이 뒤섞여 마당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그 무시무시하던 공성 전차들은 바퀴가 하늘을 향한 채 고무 덩굴에 꽁꽁 묶여 있었다. 압도적인 무력 대신, 자연의 법칙과 기발한 역학적 덫을 활용한 완벽한 비살상 격퇴였다.

“와아! 성공이다! 다 날아가 버렸어!”

루미와 바르크가 제자리에서 깡충깡충 뛰며 환호성을 질렀다. 시릴 역시 황동 안경을 고쳐 쓰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과학과 마법의 조화는 아름답군요. 살생 없이도 제국의 정예 공성 병기를 고철로 만들다니, 이건 역사에 남을 전술입니다!”

이온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 당장이라도 잠들고 싶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그저 신기하고 따스했다. 누구도 다치지 않았고, 소중한 온실과 아이들은 무사했다.

그때, 공중에서 산산조각 나며 무너져 내린 선두 전차의 철제 마차 잔해 틈에서 둔탁한 금속 상자가 툭 떨어지며 깨졌다. 상자 안에서 가죽 가방과 함께 제국의 문양이 새겨진 일지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이온은 나른한 걸음을 옮겨 눈밭 위에 떨어진 일지 파편 하나를 조워 올렸다. 시릴과 아이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 곁으로 다가왔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는 고대 노스트바르트의 마지막 날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제국 황실의 탐욕은 끝이 없다. 대지 아래 흐르는 마력의 원맥을 강제로 뽑아 올리기 시작한 이후, 노스트바르트의 기온은 하루가 다르게 급강하하고 있다. 만물을 정화하던 세계수의 가지들이 얼어붙고 있다. 이것은 축복이 아닌 천형이다. 마력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려 했던 우리의 탐욕이, 결국 이 아름다운 도시를 영원한 동토의 지옥으로 만들었다...]

이온의 조용한 목소리가 서리 낀 공기 사이로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고대 노스트바르트가 멸망한 진짜 원인. 그것은 기후의 재해가 아니라, 인간들의 끝없는 착취욕과 이기심이 불러온 인재였다. 기사단장 엘릭이 추구하는 정화의 힘 역시, 과거의 멸망을 불러왔던 그 더러운 탐욕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럴 수가…….” 시릴이 씁쓸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결국 제국은 과거의 비극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이온 씨의 정원을 빼앗아 똑같은 짓을 반복하려는 거였군요.”

이온은 종이를 꽉 쥐었다. 자신의 정원과 수인 아이들이 가진 정화의 힘은 오직 공존과 나눔을 위해서만 쓰여야 한다. 그것이 세계수의 맥박이 그에게 부여한 절대적인 규칙이었다.

“진짜 온기는…… 빼앗는 게 아니에요.” 이온이 단호한 눈빛으로 흐트러진 눈밭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산산조각 난 철제 마차의 가장 깊숙한 안쪽 잔해에서 검붉은 불꽃이 일렁였다.

단순한 불꽃이 아니었다. 심장을 얼려 버릴 듯한 가공할 빙결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주변의 눈밭이 순식간에 검푸른 얼음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바르크의 귀가 바짝 서며 날카로운 경고의 그르렁거림을 뱉어냈다.

그 무시무시한 한기의 중심에는, 은빛 강철 기사단장 엘릭의 강력한 마력이 깃든 푸른 빛의 주문서 한 장이 바닥에 떨어져 반쯤 펼쳐진 채 노출되어 있었다. 주문서 표면에 새겨진 황실의 인장 위로,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빙결 기운이 불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서리발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일어서며 주변의 눈밭을 파랗게 얼려 가기 시작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살결이 아려오는 한기였다. 바르크는 제 사지가 굳어 가던 날의 기억이 떠오른 듯, 웅크린 채 잘게 몸을 떨며 이온의 뒤편으로 물러섰다. 루미 역시 바르크의 앞을 가로막아서며 본능적으로 털을 곤두세웠다.

“이온 씨, 조심해요! 저건 단순한 주문서가 아니라, 엘릭 단장의 고유 마력이 직접 동기화된 ‘빙결 전이 매체’예요!”

시릴이 다급하게 경고하며 이온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주문서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냉기는 갓 피어난 고무 탄성 가시덤불의 부드러운 줄기들을 서서히 굳혀 가고 있었다. 탄성을 잃고 유리처럼 변해 가는 덩굴들이 자그마한 바람에도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어져 나갔다. 온실을 둘러싼 따스한 공기막마저 이 차가운 기운에 잠식당하기 시작하자, 이온은 가슴을 옥죄는 듯한 저릿한 통증을 느꼈다.

이대로 두면 아이들이 겨우 되찾은 온기마저 모두 얼어붙어 버릴 터였다.

이온은 무겁게 가라앉는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떴다. 세계수의 맥박을 과도하게 사용한 탓에, 당장이라도 눈 덮인 대지 위로 쓰러져 깊은 잠에 빠져들고 싶은 충동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이온은 제 옷자락을 꼭 쥔 채 자신만을 바라보는 네 개의 맑은 눈동자를 외면할 수 없었다.

“……루미야, 바르크야. 저기 저장고에 있는 황금 옥수수 대를 가져다줄 수 있겠니?”

이온이 땅으로 가라앉는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짜 내며 속삭였다.

아이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온실 안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이윽고 두 아이의 품에는 조금 전 수확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황금빛 정화 옥수수들이 가득 안겨 있었다. 껍질 사이로 비치는 알갱이들은 마치 작은 전등을 켜 둔 것처럼 은은하고 따스한 노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온은 그중 가장 크고 탐스러운 옥수수 하나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남은 모든 힘을 쥐어짜 내어, 옥수수 알갱이 속에 깃든 정화의 힘을 주문서를 향해 연결했다.

‘부탁해. 이 대지의 슬픔을, 저 차가운 분노를 녹여 줘…….’

이온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빛의 온기 맥박이 황금빛 옥수수를 관통했다.

순간, 옥수수 알갱이들이 팝콘처럼 팡, 팡 소리를 내며 하얗고 몽글몽글한 꽃송이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가공식이 아니었다. 이온의 마력과 공명하여 극대화된 ‘온기 정화의 꽃’들이었다.

시릴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는 개조된 살포기의 주둥이를 주문서 쪽으로 조준한 뒤, 이온이 피워 낸 온기 꽃송이들을 탄창에 쓸어 담았다.

“따뜻하게 녹여 버리자고요!”

째깍거리는 태엽 소리와 함께, 하얗고 따스한 정화의 꽃무리들이 주문서를 향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스스스스―.

매서운 빙결의 기운과 온기의 꽃들이 부딪치자, 숲속 가득 포근한 수증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귀를 찢을 듯한 냉소적인 파열음 대신, 마치 봄눈이 녹아내릴 때 들리는 아늑한 물소리가 사방을 채웠다. 사납게 요동치던 푸른 빛무리들이 따스한 정화의 힘에 감싸여 서서히 그 빛을 잃고 투명하게 정화되어 갔다.

마침내 주문서 표면의 붉은 인장이 완전히 녹아내리며, 사방을 얼어붙게 만들던 한기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하아, 하아…….”

이온은 밀려오는 극심한 피로감에 무릎을 꿇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식은땀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 하얗게 기화했다. 바르크가 다가와 이온의 뺨을 제 젖은 코로 꾹꾹 누르며 걱정스레 웅얼거렸고, 루미는 작은 손으로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때, 정화되어 바닥에 툭 떨어진 주문서의 뒷면을 살피던 시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온 씨, 이것 좀 보세요. 이 주문서의 마력 잔해에…… 아주 기괴한 물질이 섞여 있어요.”

시릴이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주문서 가장자리에 묻은 검붉은 앙금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그것은 정화되지 못한 채 타르처럼 끈적하게 뭉쳐 있는,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결정의 찌꺼기였다.

“이건 제국 황실에서 극비리에 제조하는 ‘강제 정화 결정석’의 정제 독소예요. 엘릭 단장…… 그자가 이 독한 것을 지속적으로 복용하고 있었던 게 분명해요. 마비 증상을 억지로 억누르기 위해 몸을 망쳐 가면서까지 말이죠.”

시릴의 목소리에 깊은 우려가 담겨 있었다.

강제로 마력을 끌어올리는 결정석의 부작용은 복용자의 정신을 극도로 황폐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통제 불능의 흥분 상태로 몰고 가는 파멸의 독약이었다. 엘릭이 왜 그토록 이온의 온실과 온기의 과실들에 집착하는지, 그 잔혹한 집념의 실체가 어렴풋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 역시 제국이 만들어 낸 뒤틀린 탐욕의 피해자이자, 스스로 파멸을 향해 걸어가는 시한폭탄이었던 것이다.

숨을 고르던 이온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의 마음속 한기가…… 왜 그렇게 깊고 날카로웠는지 알 것 같아요.”

타인을 짓밟아서라도 온기를 갈구하는 비극적인 순환. 이온은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려왔지만, 이 아름다운 과수원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결코 물러설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그러나 평화로운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웅― 웅―.

갑자기 사그라들었던 주문서의 종이 조각들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기이한 공명음과 함께 붉은 마법진으로 다시 재조합되기 시작했다.

정화된 마력의 틈새를 비집고, 붉은 마법진 중앙에서 차갑고 오만한 실루엣이 투명한 환영으로 솟아올랐다. 그것은 은빛 강철 기사단장, 엘릭 크로이츠의 형상이었다.

환영 속 엘릭은 입꼬리를 기괴하게 올린 채, 얼어붙은 눈빛으로 온실과 이온을 내려다보았다.

“과연…… 기적의 정원답군. 내 정예 첨병 전차들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력화할 줄이야.”

그의 목소리는 숲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환청이 되어 이온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온은 움찔하며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지만, 루미와 바르크가 그의 앞을 단단히 가로막아서는 것을 보고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엘릭의 환영이 낮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쥐새끼들아. 너희가 상대한 것은 내 군세의 아주 보잘것없는 그림자일 뿐이다. 이 연극을 통해 너희가 가진 정화의 한계와 방어선의 맹점을 모두 파악했으니.”

그의 시선이 이온이 아닌, 온실 밑바닥의 대지로 향했다.

“너희가 가꾼 그 온기 어린 흙 밑바닥에 흐르는 고대 노스트바르트의 마력 맥을…… 내가 직접 폭주시켜 주마. 대지 자체가 얼어붙을 때, 과연 그 얄팍한 동정심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지켜보지.”

말을 마친 엘릭의 환영이 산산이 부서져 내림과 동시에, 온실 앞마당의 먼 대지 아래에서부터 무겁고 거대한 진동이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단순한 전차의 진동이 아니었다. 대지 깊숙한 곳에서 잠자던 고대의 차가운 마력 원맥이, 엘릭의 원격 주문에 의해 강제로 뒤틀리며 폭발하려는 전조였다.

우르릉―!

온실의 유리벽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고, 정화되었던 흙들이 푸른빛으로 물들며 차갑게 식어 가기 시작했다.

이온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대지의 맥박이 가파르고 위험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