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손안에 쥔 양피지 문서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잘게 떨렸다. 붉은 왁스 인장 위에 새겨진 칼날 문양이 마치 살아 있는 괴물의 눈동자처럼 이온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가학적인 필체로 적힌 글자들 하나하나가 얼어붙은 얼음 송곳이 되어 소년의 심장을 찔러왔다.

‘반항할 경우 사지를 절단하여 복속시켜서라도 반드시 노예 수송선에 태우도록.’

숨이 턱 막혔다. 이온은 가슴을 옥죄는 공포에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어른들의 거친 목소리, 자신을 도구로만 바라보던 차가운 눈빛들, 그리고 마침내 찾아왔던 배신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갔고, 심장은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형아…….”

루미가 덜덜 떠는 손으로 이온의 옷자락을 살며시 쥐었다. 아이의 여린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 이온은 떨리는 눈동자로 루미를 바라보았다. 핏기가 가신 얼굴, 바들바들 떨리는 작은 귀. 그 옆에는 항상 으르렁거리며 날을 세우던 바르크가 꼬리를 바짝 내린 채 이온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

이온은 차가운 침을 삼키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공포를 억눌렀다. 과거의 자신은 도망치기 바빴지만, 지금 제 등 뒤에는 갈 곳 없는 어린 생명들이 매달려 있었다. 이 온실은 그들에게 유일한 집이었고, 이온은 그들의 보호자였다. 소년은 덜덜 떨리는 손을 꽉 쥐어 힘을 주었다. 그리고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어 낮게 속삭였다.

“괜찮아. 내가…… 내가 지킬 거야.”

그때, 저 멀리 침엽수림 너머에서 웅장하면서도 불길한 쇠붙이 소리가 대지를 흔들었다. 쿵, 쿵, 쿵. 일정한 박자로 땅을 울리는 둔탁한 진동은 단순한 발걸음이 아니었다. 거대한 철갑을 두른 군대의 행진, 그리고 숲의 나무들을 무자비하게 쓰러뜨리며 다가오는 무거운 바퀴 소리였다. 은빛 강철 기사단의 본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이 얼마 없어. 정찰대가 당한 걸 알면 저들은 더 난폭하게 밀어붙일 거야.”

시릴이 낮고 진중한 목소리로 말하며 이온의 곁으로 다가왔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얼굴이었다. 시릴은 이온의 중증 대인기피증을 배려하듯 반 보 뒤에 멈춰 서서 일정 거리를 유지해 주었다. 그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이온은 가빠지던 호흡을 조금씩 가다듬을 수 있었다.

시릴은 품에서 먼지 쌓인 황동빛 기계 뭉치를 꺼내 놓았다. 그것은 지난날 루미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태엽이 망가져 움직이지 않던 고장 난 장난감이었다. 시릴의 손길을 거치며 장난감은 톱니바퀴와 미세한 관들이 정교하게 연결된 기묘한 형태로 변모해 있었다.

“루미의 깨진 장난감 태엽 장치를 분석해 봤는데, 제국의 정밀 마도 태엽보다 복원 탄성이 훨씬 훌륭하더군. 이걸 동력원으로 삼아서 온실 앞마당에 씨앗을 넓고 고르게 살포할 수 있는 간이 살포기를 만들었어. 이온, 네가 마력을 불어넣은 씨앗을 여기에 넣고 태엽을 감으면, 순식간에 사방으로 방어용 식물 씨앗을 퍼뜨릴 수 있을 거야.”

시릴의 손끝에서 황동 태엽이 째깍거리며 정교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망가진 장난감이 온실을 지킬 훌륭한 방어 도구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루미는 자신의 장난감이 멋지게 변한 모습을 보고 슬픔을 거둔 채 두 눈을 반짝였다.

이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온실 주변의 지형을 살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온실 입구 초입에 빽빽하게 자라난 기묘한 넝쿨들이었다. 그것은 이온이 이곳에 처음 불시착했을 때, 영식 도감의 안내를 받아 가장 먼저 심었던 ‘고무 탄성 가시덤불’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자그마한 씨앗줄기에 불과했던 가시덤불은, 이온이 틈틈이 정화 마력을 나누어 준 덕분에 이제는 굵직하고 단단한 가죽 같은 질감의 줄기로 성장해 있었다. 줄기 마디마디에는 날카로운 가시 대신 말랑말랑하면서도 질긴 고무 공 같은 주머니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덤불들이…… 그새 많이 자랐네.”

이온이 다가가 줄기를 살짝 만지자, 고무 탄성 가시덤불이 마치 반갑다는 듯이 웅크렸던 줄기를 부드럽게 펴며 이온의 손가락을 살포시 감싸 안았다. 차가운 겉보기와 달리 줄기 안쪽에서는 기분 좋은 온기가 미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녀석들은 침입자가 밟는 순간, 그 힘을 고스란히 저장했다가 몇 배의 탄성으로 되돌려 주어 하늘 높이 튕겨내 버리는 기발한 비살상 역학 덫이었다.

“이 덤불들이라면 기사단의 정예 기병들이 달려오더라도 단 한 걸음도 안으로 들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어.”

이온은 가시덤불의 생태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품속에서 영식 도감을 꺼냈다. 도감의 가죽 표지가 이온의 마력에 반응해 은은한 초록빛 맥박을 뿜어냈다.

[세계수의 맥박을 동조합니다.] [개체명: 고무 탄성 가시덤불] [성장 단계: 완전체 진입 가능] [특이 사항: 대지의 마력을 정화하여 탄성 계수를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온은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온실 앞마당의 흙바닥에 두 손을 얹었다. 차가운 눈밭 아래로 굳어 있던 흙의 감촉이 전해졌다. 이온의 손바닥에서 시작된 청색과 초록색이 뒤섞인 따스한 마력의 물결이 대지 속으로 스며들었다.

쿵, 쿵, 쿵.

대지의 맥박이 이온의 심장박동과 겹쳐졌다.

순간, 온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고무 탄성 가시덤불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눈밭을 뚫고 굵직한 넝쿨들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뻗어 나갔고, 줄기는 성인 남성의 허벅지만큼 두껍게 부풀어 올랐다. 가시덤불의 표면은 더욱 팽팽해졌으며, 공기 주머니들은 마치 단단하게 부푼 풍선처럼 터질 듯한 탄성을 머금었다.

이 덤불을 밟는 자는 그 누구라도 숲 밖으로 날아가 버릴 터였다.

마력을 급격하게 소모한 탓에 이온의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눈앞이 순간적으로 흐려지며 몸이 비틀거렸다. 세계수의 맥박을 넓은 범위에 최대 출력으로 행사할 때마다 찾아오는 지독한 기면증의 전조였다. 다리가 풀려 쓰러지려는 찰나, 누군가 옆에서 이온의 허리를 단단하게 받쳐 들었다.

“형아! 조심해!”

우람하면서도 보드라운 감촉이 이온의 몸을 감쌌다.

바르크였다. 청색 마력 마비증으로 인해 사지가 파랗게 굳어 비틀거리던 꼬마 늑대 수인은 이제 없었다. 이온이 정성껏 끓여 준 단호박 수프와 달빛 은총초, 그리고 카오나무의 치유 열매를 꾸준히 먹은 덕분에, 바르크의 몸속에 박혀 있던 제국 기사단의 ‘강제 마력 결정석’ 마독은 완전히 정화되어 배출된 상태였다.

바르크의 두 다리는 묵직한 설원을 단단하게 디디고 있었고, 파랗게 변해 가던 사지는 본래의 건강한 회색빛 털로 뒤덮여 건강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바르크는 이온이 만들어 준, 온실 구석에 걸려 있던 낡은 파수꾼의 가죽 망토를 어깨에 늠름하게 걸치고 있었다. 망토 깃 사이로 삐져나온 꼬리가 힘차게 흔들렸다.

“형아, 나 이제 하나도 안 아파. 몸이 엄청 가벼워! 저 나쁜 철갑 옷 입은 놈들이 오면, 내가 이 망토를 입고 제일 먼저 달려 나가서 다 막아 줄 거야!”

바르크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씩하게 웃었다. 두려움에 떨며 이온의 뒤에 숨던 겁쟁이 아기 수인은 어느새 온실의 든든한 파수꾼으로 성장해 있었다. 바르크는 동물적인 예민한 귀를 쫑긋거리며 숲 너머의 진동을 분석했다.

“철갑 놈들, 아직 저기 멀리 있어. 눈길이 깊어서 빨리 못 와. 우리가 준비할 시간은 충분해!”

바르크의 든든한 외침에 이온은 용기를 얻었다. 소년은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깨우고 다시금 영식 도감을 펼쳤다.

“시릴, 이 온실 지하의 구조를 좀 봐 줄 수 있어? 도감에 이상한 문양이 나타났어.”

이온이 가리킨 곳은 온실 중앙의 바닥, 이끼와 흙먼지에 가려져 있던 고대 마법 영문이 새겨진 석판이었다. 시릴이 안경을 고쳐 쓰며 바닥에 엎드려 문양을 꼼꼼히 살폈다. 그의 손가락이 고대 영문의 궤적을 따라 움직였다.

“이건…… 단순한 온실 배관이 아니야.” 시릴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노스트바르트 지하에는 얼어붙은 청색 마력의 역학적 압력이 강하게 흐르고 있어. 이 온실은 그 압력을 정화하고 조율하는 밸브 역할을 하던 고대 마법 공학의 결정체야! 여기 새겨진 영문을 분석해 보면…… 지하의 마력 압력을 한곳으로 모아 특정 방향으로 분출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숨겨져 있어.”

“분출 제어라고?”

“그래! 저 기사단 놈들이 만약 온실의 마법 장벽을 부수기 위해 강력한 마력 공성 병기를 가져온다 해도, 우리가 지하의 역학적 압력을 역으로 제어해서 분출시키면 그 공성 에너지를 그대로 상쇄하거나 밖으로 밀어낼 수 있어. 쉽게 말해, 적들이 가하는 압력을 지하의 뿜어져 나오는 마력 바람으로 밀어 올려 무력화하는 거지!”

시릴은 즉시 품에서 도구를 꺼내 바닥의 석판을 열고 내부의 황동 밸브를 조율하기 시작했다. 장난감 태엽을 만질 때처럼 그의 손길은 거침없고 정교했다. 노스트바르트의 차가운 지하 압력이 밸브의 틈새로 쉬익 소리를 내며 제어되기 시작했다.

이제 방어망의 기틀은 갖추어졌다. 하지만 장기전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온실 내부의 자원과 식량을 충분히 비축해야 했다. 적들이 온실을 포위할 경우를 대비해 수확물 저장고를 확장하고, 아기 수인들과 시릴이 먹고 힘을 내며 방어에 사용할 수 있는 기적의 농작물을 대량으로 생산해야만 했다.

이온은 온실의 비옥한 정토 구역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이온이 미리 심어 두었던 특별한 품종의 씨앗들이 흙 속에서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대형 ‘정화 옥수수’와 수분이 터질 듯이 가득 찬 ‘수화 과물’의 씨앗이었다.

“모두, 나에게 힘을 빌려줘.”

이온은 무릎을 꿇고 흙 위에 두 손을 올렸다.

세계수의 맥박을 다시 한번 최대 출력으로 행사했다. 그의 가슴속에서 온화하고 따뜻한 봄바람 같은 마력이 뿜어져 나와 온실 전체를 가득 채웠다.

우우웅―!

온실 내부의 공기가 기분 좋은 진동으로 가득 찼다. 차갑고 메말랐던 흙이 순식간에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새싹들이 흙을 뚫고 솟아오르더니, 눈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줄기를 뻗어 올렸다. 굵직한 옥수수 줄기가 이온의 키를 훌쩍 넘어 온실 천장을 향해 뻗어 나갔고, 그 마디마디마다 성인의 팔뚝만 한 거대한 정화 옥수수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옥수수 껍질 틈새로 비쳐 보이는 알갱이들은 마치 순수한 황금을 깎아 만든 것처럼 찬란한 노란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 옆에서는 터질 것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붉은색 수화 과물들이 줄기마다 매달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흙바닥으로 툭, 툭 떨어졌다. 과일의 표면은 얇은 유리막처럼 맑았고, 그 안에는 정화된 맑은 물과 끈적한 점성을 가진 과즙이 가득 차 있어 흔들릴 때마다 찰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우와아아! 옥수수다! 엄청 커!”

루미가 소리를 지르며 옥수수 줄기로 달려갔다. 바르크 역시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돌리며 갓 수확한 대형 정화 옥수수 하나를 품에 가득 안았다.

황금빛 정화 옥수수는 차가운 동토의 기운을 단숨에 날려 버릴 정도로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이온이 옥수수 하나를 뚝 꺾어 껍질을 벗기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가 온실 안을 가득 메웠다.

한 입 베어 물면 톡 터지는 알갱이 속에서 달콤한 즙과 함께 체내의 잔류 마독을 깨끗하게 씻어 내는 정화 에너지가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기적의 식량이었다.

“이 수화 과물도 정말 대단해요!” 시릴이 붉은 과일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며 감탄했다. “안에 든 과즙의 점성이 엄청나군. 이걸 시릴 표 살포기로 던지면, 기사들의 철갑옷 마찰 부위에 들러붙어 관절을 완전히 굳혀 버릴 수 있겠어. 완벽한 비살상 투척 무기야!”

이온은 몰려드는 깊은 피로감 속에서도 미소를 지었다.

온실 깊숙한 곳에 마련된 목조 저장고가 이온의 마력 제어에 동조하여 공간이 마법적으로 넓어졌다. 수확한 황금빛 정화 옥수수와 붉은 수화 과물들이 아늑한 저장고 안으로 차곡차곡 쌓여 갔다. 불모의 동토 한가운데에서, 그 어떤 풍요로운 영지에서도 볼 수 없는 탐스럽고 아름다운 식량과 방어 자원이 순식간에 산더미처럼 완비된 것이다.

따스한 온실 내부에는 승리의 예감과 힐링의 안도감이 가득 내려앉았다. 아이들은 갓 구운 옥수수를 나누어 먹으며 웃음꽃을 피웠고, 시릴은 황동 살포기를 최종 점검하며 만족스러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온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완벽하고 안전한 온기의 공동체가 바로 눈앞에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온기는 잔인하도록 짧게 스러졌다.

콰아아앙―!

온실 유리가 미세하게 떨릴 정도의 거대한 충격음이 숲속을 강타했다.

단순한 행진 소리가 아니었다. 숲의 거목들이 꺾이고 부서지는 비명이 메아리쳤고, 대지는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바르크의 귀가 쫑긋 서더니, 이내 꼬리를 바짝 내리며 온실 입구 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형아…… 기사 놈들이…… 엄청 큰 괴물 구루마를 가지고 오고 있어!”

시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는 급히 온실 창밖의 어두운 침엽수림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스름한 눈보라 속에서 나무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으며 전진하는 거대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그것은 검은 철갑으로 무장한, 제국 기사단의 공성 전차 본대였다. 전차 전면에 달린 거대한 가시 바퀴가 회전할 때마다 하얀 눈밭이 검붉은 흙먼지로 뒤덮였다.

기사단장 엘릭이 이끄는 본대가 마침내 그 압도적인 위용을 드러내며, 온실을 향해 전면 전진을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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