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으로 무너진 적의 철제 마차 잔해 틈에서 단장의 강력한 빙결 기운이 실린 주문서가 바닥에 떨어져 노출되었다.
새파랗게 얼어붙은 종이 조각들은 공중에서 기이한 궤적을 그리며 회전하더니, 이내 서리 서린 바람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뿜어져 나온 냉기가 이온의 뺨을 스쳤다. 얼음 가시로 긁는 듯한 아릿한 감각에 이온은 어깨를 둥글게 말아 쥐었다. 어른들의 고함이나 날카로운 쇳소리를 들을 때마다 손끝부터 하얗게 질려 가던 고질적인 두려움이 가슴골을 타고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지만 눈앞에서 바르크가 으르렁거리며 꼬리를 바짝 세우고 있었고, 루미는 이온의 옷자락을 꼭 쥔 채 도끼눈을 뜨고 있었다. 아이들의 온기가 가냘픈 손가락을 통해 전해지는 순간, 이온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속에 고여 있던 두려움의 웅덩이가 조금씩 잔잔해졌다.
“시릴 씨, 저 주문서의 마력이 땅속으로 흘러들고 있어요.”
이온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주변을 살피던 시릴이 얼른 허리를 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품에는 구리선과 톱니바퀴가 복잡하게 얽힌 상자 하나가 안겨 있었다.
“걱정 마세요, 이온 씨! 저 얼음 단장 녀석이 원격으로 땅을 얼리려고 수작 부리는 모양인데, 우리한테는 이 녀석이 있잖아요?”
시릴이 자랑스럽게 들어 올린 상자 중심부에서 익숙한 태엽 소리가 들려왔다. *깍르륵, 째깍, 째깍.*
그것은 과거 루미가 소중히 품고 다녔던, 톱니 몇 개가 나가 완전히 망가져 가던 작은 장난감 태엽 장치였다. 시릴의 손을 거쳐 새생명을 얻은 태엽은 이제 과수원의 새로운 심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장난감 태엽의 불규칙한 회전 주기가 마도 공학적인 증폭 장치와 맞물리며, 씨앗을 일정 간격으로 정확하게 밀어내는 자동 살포기의 동력원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루미가 그 장치를 보며 보라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내 장난감 태엽이…… 정말로 밭을 가는 기계가 된 거야?”
“기계 정도가 아니란다, 꼬마 아가씨. 이건 이 가혹한 동토의 대지를 뒤흔들 위대한 발명품의 심장이지!”
시릴이 소리를 낮추며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이온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가죽 주머니를 열었다. 주머니 안쪽에는 단단하고 탄력 있는 검은색 씨앗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바로 이온이 영구 동토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세계수의 맥박을 통해 처음으로 개량해 냈던 ‘고무 탄성 가시덤불’의 씨앗들이었다.
당시 야생동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온실 경계에 심었던 이 가시덤불은, 밟는 순간 엄청난 복원력으로 침입자를 멀리 튕겨내는 기묘한 탄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온은 씨앗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대지의 흐름을 느꼈다. 손가락 끝에서 푸르스름한 정화의 마력이 싹트며 씨앗들에게 따스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루미의 태엽 장치에 이 씨앗들을 넣을게요. 그리고 포탄으로는…… 어제 수확한 끈끈이 별살구 즙을 채우면 돼요.”
이온의 제안에 시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끈끈이 별살구라고요? 그 만지기만 해도 사흘 동안 손가락이 안 떨어지던 그 괴상한 과일 말입니까?”
“네. 그걸 그냥 쓰면 너무 독하니까, 따뜻한 민들레 우린 물을 조금 섞었어요. 그러면 굳는 속도가 딱 알맞게 조절되거든요. 적들의 움직임만 묶어두기에 가장 좋은 상태가 돼요.”
이온의 설명에는 한 점의 살기도 없었다. 그저 정성스레 가꾼 정원의 잡초를 솎아내듯 차분하고 고요할 뿐이었다.
그때, 온실 앞마당을 둘러싼 가시덤불 장벽 너머로 묵직한 말발굽 소리가 설원을 뒤흔들며 다가왔다. 은빛 강철 기사단의 선발대였다. 그들의 철갑옷이 햇빛에 반사되어 시린 빛을 뿜어냈다. 선두에 선 기사가 거대한 장검을 뽑아 들고 외쳤다.
“저 기괴한 식물 장벽을 베어 넘겨라! 온실 안의 모든 정화 열매와 수인 놈들을 남김없이 포획한다!”
오십 명에 달하는 중장갑 기사들이 일제히 돌격해 왔다. 대지를 짓밟는 군화 소리가 이온의 귓전을 때렸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지만, 이온은 도망치지 않았다. 대신 시릴이 만든 살포기 손잡이를 힘차게 잡아당겼다.
*태엽이 감기는 날카로운 소리.*
루미의 장난감 태엽이 힘차게 회전하며 살포기 내부의 피스톤을 작동시켰다.
동시에 이온이 바닥에 심어둔 고무 탄성 가시덤불 씨앗들이 순식간에 싹을 틔우며 대지 위로 솟구쳤다. 돌격하던 기사들의 발끝에 질기고 탄력 있는 덩굴들이 부딪혔다.
“우와앗? 이게 무슨……!”
선두에 선 기사가 가시덤불을 밟는 순간, 가시덤불이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늘어났다가 엄청난 힘으로 되튀었다.
*보오옹―!*
기이하고 가벼운 파열음과 함께 거구의 기사가 하늘 높이 쏘아 올려졌다. 갑옷의 무게가 무색하게도, 그는 포물선을 그리며 저 멀리 눈더미 속으로 수직 낙하했다. 머리만 눈 속에 파묻힌 기사가 버둥거리는 모습은 공포스럽기보다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당황하지 마라! 대열을 유지해라!”
뒤따르던 부대장이 소리쳤지만, 이미 온실 앞마당은 탄성 가시덤불의 거대한 트램펄린 지대로 변해 있었다. 기사들이 발을 내딛는 족족 여기저기서 *뵹, 뵹* 소리가 울려 퍼지며 은빛 갑옷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중력의 법칙을 무시한 채 허공을 휘젓는 기사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지금이에요, 시릴 씨!”
이온의 외침에 시릴이 살포기의 각도를 조절했다. 대형 노즐 끝에서 노란빛을 띠는 걸쭉한 액체 방울들이 하늘로 쏘아 올려졌다. 끈끈이 별살구의 과즙으로 만든 특제 포탄들이었다.
*퓽! 퓽! 퓽!*
하늘을 수놓은 노란 포탄들이 지상에 남아 버둥거리던 기사들의 머리 위로 정확히 떨어졌다.
*철퍼덕!*
달콤하고 상큼한 과일 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겉보기에는 맛있는 잼 같았지만, 그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끈끈한 과즙은 기사들의 철갑옷 이음새와 관절 부위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차가운 눈바닥에 닿는 순간, 이온이 계산한 대로 무서운 속도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어, 어라? 팔이 안 움직인다!”
“다리가…… 다리가 땅바닥에 붙어 버렸어! 으아악! 방패가 안 떨어져!”
기사들은 당황하여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움직이려 할수록 과즙은 더욱 단단하게 굳어 옷과 대지를 하나로 묶어 버렸다. 마치 정교하게 만들어진 은빛 조각상들이 눈밭 위에 촘촘히 박혀 있는 형국이었다.
무거운 철갑옷을 입은 채 바닥과 완전히 융합되어 버린 기사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들의 자랑스러운 대검과 방패는 이제 지면을 지탱하는 버팀목에 불과했다.
“이, 이게 무슨 마법이냐! 비겁하게 정면 승부를 하지 않고 이런 끈적이는 과일 즙 따위로……!”
한 기사가 분통을 터뜨리며 소리쳤지만, 그의 투구 틈새로 흘러든 단 과즙 향기 때문에 근처 숲속에서 겨울잠을 자던 눈다람쥐들이 하나둘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달콤한 냄새에 이끌린 다람쥐들이 기사들의 어깨와 머리 위에 올라타 킁킁거리며 간지럽히자, 기사들은 울상을 지었다.
“아, 안 돼! 간지러워! 제발 저리 가! 으하하학! 하지 마!”
단 한 번의 칼부림도 없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완벽한 제압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사납기로 소문난 은빛 강철 기사단의 정예 선발대 오십 명이, 단지 달콤한 살구 즙에 발이 묶여 눈밭 위에서 눈물을 흘리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시릴은 저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공구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침묵 속에서 이온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이온은 적들의 비명과 소란 속에서도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밭에 갇힌 기사들이 다치지 않았는지 차분하게 살피며, 입가에 엷고 따스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비살상으로…… 이 정도 인원을 완벽하게 무력화하다니.’
시릴의 등줄기에 기분 좋은 전율이 돋았다. 그것은 공포가 아닌 깊은 경외심이었다. 무력으로 상대를 짓밟고 파괴하는 제국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대지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완벽하게 굴복시키는 지혜의 힘. 시릴은 자신이 이 온실을 선택한 것이 일생일대의 가장 고귀한 결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바르크가 신이 나서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굳어 버린 기사들 사이를 누볐다.
“그르릉! 바보들 같다!”
“바르크, 조심해. 아직 위험할지도 몰라.”
루미가 동생을 단속하며 기사단 장교의 앞으로 다가갔다. 장교는 이미 가슴팍까지 눈밭에 파묻힌 채 끈끈이 즙에 걸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가죽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바르크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가방의 끈을 가볍게 끊어 이온에게 가져왔다.
“형아, 이거!”
이온은 조심스레 가방을 받아 들고 안을 살폈다. 기사단의 인장이 찍힌 두꺼운 가죽 수첩이 눈에 들어왔다. 장교가 기록한 진군 일지였다.
수첩을 펼쳐 침침한 글씨들을 읽어 내려가던 이온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의 시선이 특정 구절에 멈춰 섰다.
[……노스트바르트 동부 수용소에서 이송된 수인 아기들 중 마독 발현율이 높은 개체 12마리, 후방 초소 지하 감옥에 임시 억류 중. 본대 합류 시 이송 예정.]
이온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옆에서 같이 글을 읽은 루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 갔다.
“여기에…… 내 동생들이 있는 거지? 아직 기지에 갇혀 있는 거지?”
루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이온은 수첩을 꼭 쥐었다. 대인기피증으로 인해 낯선 이들과 마주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소년이었지만, 갇혀서 추위와 마독에 신음하고 있을 어린 생명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쳤다.
“구하러 가야 해요.”
이온이 나직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바닥에 굳어 있던 장교의 품 안에서 붉은빛이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기사단 고유의 마력 통신석이었다.
통신석 너머로 들려오는 음성은 차갑다 못해 주변의 공기를 통째로 얼려 버릴 듯 오만하고 잔혹했다. 은빛 강철 기사단장, 엘릭 크로이츠의 목소리였다.
[선발대가 고작 끈끈이 풀때기에 당해 전멸했다고? 한심한 놈들.]
통신석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이온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엘릭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분노를 넘어선, 기괴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좋다. 정원의 주인아. 네놈이 가진 그 얄팍한 자비심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내 똑똑히 확인해 주지. 산 자들이 움직이지 못한다면, 추위도 고통도 느끼지 않는 고대의 군대를 깨우면 그만이다.]
지직거리는 마력의 파열음 사이로 엘릭의 서늘한 조소가 흘러나왔다.
[내 손에 쥐어진 가동식 혹한병(혹한의 골렘)들이 네놈의 온실을 짓밟고 대지를 얼려 버릴 것이다. 내가 직접 갈 터이니, 목을 씻고 기다려라.]
통신석의 빛이 툭 끊기며 사방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푸른빛의 거대한 마력 기둥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기 시작했다. 고대의 봉인된 금단 유물이 깨어나는 불길한 진동이 발밑의 대지를 타고 무겁게 전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