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스름한 마력의 빛이 양피지 지도 위로 잔잔하게 번져 나갔다. 시릴이 들고 있는 가죽 지도 장치에서 흘러나온 빛은 얼어붙은 온실 안을 차갑게 물들였다. 그 푸른 빛줄기 위로, 마치 붉은 불씨 같은 점들이 조밀하게 돋아나 있었다.
하나, 둘, 셋…… 열둘.
붉은 점들은 정지해 있지 않았다. 서서히, 그러나 단단한 포위망을 그리며 온실을 향해 좁혀오고 있었다.
사각, 사각.
눈밭을 짓밟는 무거운 철갑구두 소리가 매서운 칼바람을 뚫고 유리벽 너머로 스며들었다. 쇠사슬이 가죽 옷깃에 쓸리는 서슬 퍼런 마찰음이 고요한 정원을 날카롭게 갈랐다.
이온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귓가를 때리는 쇠붙이 소리에 손끝이 차갑게 식어 가며 파르르 떨렸다. 과거 자신을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던 어른들의 거친 목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뒤엉켰다. 숨이 턱 막혀 오며 가슴이 조여들었다.
“이, 이온 형…….”
목소리마저 얼어붙은 루미가 이온의 소맷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바르크는 돋아난 온몸의 털을 꼿꼿이 세운 채 온실 입구를 향해 나직하게 그르렁거렸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어나갈 기세였지만, 녀석의 여린 앞다리 역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기, 기다려, 바르크. 나가면 안 돼.”
이온은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바르크의 작은 머리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아이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이온의 손등을 적셨다. 두려움에 질린 수인 아이들의 눈망울을 마주하는 순간, 이온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용기가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이 작고 따뜻한 생명들을 또다시 빼앗길 수는 없었다.
이온은 고개를 돌려 시릴을 바라보았다. 시릴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그의 손은 이미 품속에서 놋쇠로 만든 정교한 태엽 장치들을 주섬주섬 꺼내놓고 있었다.
“시릴 씨,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해요. 저들이 이 온실 경계선을 넘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상대는 정예 기사들이네! 내 호신용 태엽 트랩들만으로는 저 무거운 철갑옷을 입은 괴물들을 오래 붙잡아둘 수가 없어. 태엽의 회전력이 저들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금방 쇠줄이 끊어질 걸세.”
시릴이 이마를 짚으며 다급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책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온은 온실 바깥쪽,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경계 구역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1화에서 처음 대지에 뿌리를 내렸던 ‘고무 탄성 가시덤불’이 눈 밑에 숨죽인 채 웅크리고 있었다. 지난번 들개 무리를 가볍게 튕겨냈던 그 신비로운 덤불이었다.
“그렇다면…… 시릴 씨의 태엽 장치를 제 가시덤불과 융합하면 어떨까요?”
“가시덤불과 태엽을?”
시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네. 고무 탄성 가시덤불은 충격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강한 힘으로 되튀어 오르는 성질이 있어요. 시릴 씨가 만든 태엽의 회전 복원력을 이 가시덤불의 부드러운 줄기와 연결하는 겁니다. 덤불이 눌리는 순간 태엽의 방아쇠가 풀리며 탄성을 세 배, 아니 다섯 배로 증폭시키는 방어선을 만드는 거죠.”
이온의 설명에 시릴은 턱을 괴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의 시선이 문득 루미의 낡은 가방 옆에 삐져나와 있는 깨진 장난감 태엽 장치에 머물렀다. 그것은 지난날 온실 구석에서 루미가 조심스레 만지작거리던 작은 보물이었다.
“아……! 저 장난감의 이중 톱니 배열 방식이라면 가능하겠어!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며 힘을 축적했다가 한 번에 방출하는 구조 말일세. 루미, 잠깐 그 장난감 좀 보여주겠니?”
루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깨진 태엽 장치를 건넸다. 시릴은 돋보기안경을 코끝에 걸치고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소형 구리 나사를 풀고 톱니를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째깍, 째깍, 째르릉. 가느다란 금속음이 온실 안의 긴장감을 조금씩 지워갔다.
그사이 이온은 온실 문을 열고 차가운 눈밭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매서운 칼바람이 뺨을 스쳤지만, 이온은 개의치 않고 눈 위에 손을 얹었다.
‘세계수의 맥박.’
이온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연초록빛 온기가 눈밭 아래로 스며들었다. 대지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고무 탄성 가시덤불의 맥박이 이온의 심장박동과 공명하며 쿵, 쿵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가시덤불의 줄기들이 보랏빛 광채를 띠며 부드럽게 꿈틀거렸다.
시릴이 개조를 마친 호신용 태엽 장치 네 개를 들고 뛰어왔다.
“준비되었네, 이온! 가시덤불의 가장 굵은 마디에 이 구리 고리를 걸어주게!”
이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덤불의 신축성 있는 마디를 들어 올려 시릴의 태엽 장치와 단단히 맞물렸다. 마법 식물의 생명력과 정교한 마도 공학 기술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순간이었다. 줄기가 태엽의 톱니를 감싸 안듯 조여들었고, 덤불 전체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잔뜩 긴장된 상태로 눈 아래에 다시 숨었다.
다중 비살상 방어선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하지만 영토의 법칙을 조율하고 식물의 성질을 억지로 바꾼 대가는 즉각적으로 찾아왔다. 이온의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머릿속이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무거워졌고, 사지가 급격히 나른해졌다. 영식 도감을 사용할 때마다 찾아오는 깊은 기면증의 전조였다. 이온은 온실 기둥을 짚으며 겨우 버티고 섰다. 당장이라도 하얀 눈밭 위로 쓰러져 깊은 잠에 빠질 것만 같았다.
그때, 따스하고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사르르 스쳤다.
“이온 형, 이거 먹어.”
루미였다. 대인기피증으로 떨고 있는 이온을 두고 도망치기는커녕, 녀석은 온실 주방에서 조심스럽게 끓여 온 샛노란 죽 그릇을 받쳐 들고 서 있었다. 단호박의 부드러운 단맛과 기적의 정화 열매즙을 듬뿍 넣어 뭉근하게 끓여낸 ‘샛노란 온기 죽’이었다.
“형이 그랬잖아. 힘들 때는 따뜻한 걸 먹어야 몸도 마음도 녹는다고.”
루미의 해사한 눈망울 속에 이온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온은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쥐고 죽을 한 입 크게 떠 넣었다.
따스한 온기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온몸의 혈관을 부드럽게 깨웠다. 얼어붙었던 심장이 다시금 힘차게 고동쳤고, 기면증으로 무거워지던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영양실조와 마독으로 죽어가던 아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요리를 해 주었다는 사실이, 이온의 마음속 깊은 상처를 어루만져 치유해 주는 것 같았다.
“고마워, 루미. 정말 맛있어.”
이온이 입가를 닦으며 미소 짓자, 루미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서걱! 서걱! 서걱!
발소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온실을 둘러싼 가시덤불 장벽 너머로 푸른빛이 도는 은색 철갑옷을 입은 무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이온과 시릴은 온실의 반투명한 유리창 뒤에 몸을 숨긴 채 그들을 관찰했다. 그들의 갑옷은 제국의 정식 기사단처럼 화려해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군데군데 붉은 녹이 슬어 지저분했고 가문의 문장이 있어야 할 어깨 보호대는 날카로운 도구로 거칠게 깎여 나가 있었다.
“저 문장…….”
시릴이 나직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정식 황실 기사단이 아니야. 저들은 제국 외곽 영지를 무단으로 점령하고 황실의 이름을 사칭해 약탈을 일삼는 몰락 귀족 엘릭의 사병들이네. 가문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범죄자들과 부랑자들을 모아 기사단 흉내를 내고 있는 무뢰한들이지.”
그들의 눈빛은 차가운 동토의 얼음보다 더 탐욕스럽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선두에 선 조장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온실을 올려다보며 검을 뽑아 들었다.
“단장님의 말씀이 맞았군. 이 척박한 땅에 이토록 온기가 가득한 온실이 존재하다니! 여기에 기적의 열매가 가득하다는 거지? 당장 쳐들어가서 전부 쓸어 담아라! 방해하는 수인 가축 놈들은 다리를 부러뜨려 마차에 실어라!”
조장의 거친 고함에 이온의 몸이 찌릿하게 떨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치고 싶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소중한 터전과 아이들을 해치려는 자들을 향한 단호한 거부감이었다.
“진입한다! 돌격!”
철갑을 두른 기사 다섯 명이 일제히 온실을 향해 눈밭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무거운 갑옷의 무게 때문에 대지가 쿵쿵 울렸다.
그들이 정확히 고무 탄성 가시덤불 경계선 위에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째깍!
지하에 매설된 시릴의 태엽 장치가 방아쇠를 당겼다. 톱니바퀴가 폭발적인 회전력으로 맞물려 돌아가며 가시덤불의 탄성 뿌리를 극단적으로 잡아당겼다가 한순간에 놓아버렸다.
스보옵―!
“어, 어어..?”
선두에 서던 기사의 발밑에서 거대한 보랏빛 가시덤불이 팽팽한 새총 고무줄처럼 솟구쳐 올랐다. 엄청난 탄성에 직격당한 기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와아앗!”
뒤이어 달려오던 세 명의 기사 역시 차례대로 발밑에서 터져 나온 탄성 가시덤불에 걸려 하늘 높이 던져졌다. 무거운 철갑옷을 입은 거구들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기괴하면서도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온의 함정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금이에요, 바르크!”
이온의 신호에 맞춰, 온실 지붕 기둥에 매달려 있던 바르크가 밧줄을 힘차게 잡아당겼다.
나무 위에 매달려 있던 거대한 ‘끈끈이 과즙 주머니’들이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는 기사들을 향해 정확히 떨어졌다. 이 주머니들은 이온이 정화 열매를 수확하며 모아둔, 극도의 점성을 가진 특수 과즙으로 가득 차 있었다.
퍼어억! 팍!
공중에서 기사들의 몸 위로 주머니가 터지며 분홍빛의 걸쭉한 과즙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이, 이게 무슨…… 으악! 몸이 안 움직여!”
바닥으로 떨어진 기사들이 서로의 어깨와 다리를 부딪치며 뒤엉켰다. 한 번 묻으면 강철조차 녹이지 않는 한 절대 떨어지지 않는 강력한 끈끈이 과즙이었다. 기사들이 버둥거릴 때마다 그들의 무거운 철갑옷이 쩍, 쩍 소리를 내며 자석처럼 서로에게 달라붙었다.
“내 손이 네 투구에 붙었어! 놔라, 이 자식아!”
“내가 붙이고 싶어서 붙인 줄 알아? 다리가 안 떨어져!”
서로를 밀쳐내려 할수록 점성은 더욱 강해져, 다섯 명의 기사들은 순식간에 하나의 거대한 철갑옷 뭉치가 되어 눈밭 위를 뒹굴었다. 칼을 쥐려 해도 손가락이 자루에 붙어버렸고, 방패를 들려 해도 옆 사람의 갑옷 깃에 방패가 철썩 달라붙어 쓸모없게 되었다.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무력한 폭력 없이 오직 자연의 역학 법칙과 기발한 지혜만으로 정예 정찰대를 완벽하게 무력화한 순간이었다.
“와아! 대단해! 진짜로 다 붙어버렸어!”
루미가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깡충깡충 뛰었다. 경계심 가득했던 바르크 역시 꼬리를 바르르 떨며 이온의 허벅지에 머리를 가볍게 부딪쳤다. 칭찬을 바라는 어린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이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르크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거대한 고철 더미 속에서 혼자 가까스로 떨어져 나와 눈밭을 기어가던 조장이 보였다. 그의 갑옷 역시 끈끈이 과즙으로 범벅이 되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바르크가 날카롭게 콧김을 뿜으며 조장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르릉…….”
“흐익! 괴, 괴물 수인 놈이……!”
조장은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서려다, 품속에 넣어두었던 가죽 주머니 하나를 눈밭 위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은빛 강철 기사단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기밀 주머니였다.
이온은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다가가 눈 위에 떨어진 주머니를 주워 올렸다. 차가운 가죽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주머니끈을 풀고 내부를 살피자, 정교한 마법 봉인이 걸린 두꺼운 양피지 문서 한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온은 침을 삼키며 천천히 문서를 펼쳤다. 그곳에는 붉은 왁스로 단장 엘릭의 직인이 찍혀 있었고, 유려하지만 가학적인 필체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극비 지령: 노스트바르트 정찰대 앞. 온실을 발견하는 즉시 침투하여 그 안에 거주하는 모든 생명체를 무력화할 것. 특히 온실 내에 숨어든 아기 수인들은 제국의 특수 마력 광산으로 송환하기 위해 생포할 것을 명한다. 이들은 단순한 가축이 아니며, 광산 깊은 곳의 마력 결정을 채굴하는 데 유용한 생체 도구이다. 반항할 경우 사지를 절단하여 복속시켜서라도 반드시 노예 수송선에 태우도록.]
문서를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가던 이온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루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고, 바르크의 그르렁거림이 뚝 멈췄다.
단순한 영지 강탈이 아니었다. 이 아이들을 다시금 그 지옥 같은 노예 광산으로 끌고 가 영원히 부려 먹겠다는 끔찍한 음모가 적혀 있는 문서였다.
이온은 문서를 쥔 손가락에 잔뜩 힘을 주었다.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이 가슴속에서 세차게 소용돌이쳤다.
바로 그때, 저 멀리 어두운 침엽수림 너머에서 더욱 거대하고 무거운 철갑의 진동이 대지를 흔들며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정찰대의 뒤를 쫓아오던 본대의 움직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