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
무거운 철갑옷이 눈밭에 처박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투구 틈새로 흘러나온 붉은 피가 하얗게 얼어붙은 대지를 조용히 적셔 갔다. 이온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서늘한 공포에 손가락 끝이 잘게 떨렸다. 숨이 가빠지고, 목구멍에 단단한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른. 그것도 무자비한 황실의 문양을 가슴에 새긴 군인이었다. 과거 자신을 차가운 골방에 가두고 쓸모를 증명하라며 다그치던 이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때렸다. 이온은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르르…….”
바르크가 털을 곤두세우며 이온의 앞을 막아섰다. 꼬리는 빳빳하게 굳었고, 어린 송곳니 사이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루미 역시 이온의 옷자락을 꼭 쥔 채, 쓰러진 사내를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온실의 열린 문틈으로 밀려들어와 정원의 따스한 공기를 흩트려 놓았다. 이온은 거칠게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쓰러진 사내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철갑옷의 허벅지 부근이 어지럽게 찢겨 있었다. 그 상처는 칼날에 베인 것이 아니었다. 질기고 단단한 무언가에 강하게 조였다가 튕겨 나간 흔적이었다.
이온의 시선이 온실 외곽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는 덤불로 향했다. 1화에서 깊은 동토의 땅에 처음으로 심었던 ‘고무 탄성 가시덤불’이었다.
그동안 온실 주변을 든든하게 지켜 주던 푸른 덤불들이 지금은 팽팽하게 당겨졌다가 제자리로 돌아간 듯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질긴 고유의 탄성을 가진 가시덤불 줄기들은 침입자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만약 이 탄성 덤불이 침입자의 무거운 낙하 충격을 흡수하며 사방으로 튕겨내지 않았다면, 사내는 온실 경계에 닿기도 전에 뼈가 바스러져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덤불에 맺힌 투명한 진액이 사내의 무기에 묻은 마력을 빨아들여 무력화시킨 흔적도 역력했다.
“저, 저기…….”
이온이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목소리는 바람에 흩어지는 낙엽처럼 힘없이 흔들렸다.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투구 아래로 흘러내리는 숨결이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얼어붙은 동토의 마력 가루가 그의 피부를 파랗게 잠식해 들어가는 중이었다. 청색 마력 마비증의 전조 증상이었다.
이대로 두면 사내는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얼음 조각처럼 굳어 버릴 것이 분명했다.
‘도와야 해. 하지만 인간인데…… 나를 해치면 어쩌지?’
머릿속에서 두 개의 마음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두려움에 도망치고 싶은 발걸음과, 눈앞에서 꺼져 가는 생명을 외면하지 못하는 다정함이 손끝에서 얽혔다. 이온은 침을 삼켰다. 그리고 자신의 품속에 든든하게 자리 잡은 영식 도감의 온기를 느꼈다.
공존을 위해서만 베풀어야 하는 기적의 힘. 이 힘은 탐욕이 없는 순수한 구원을 바라고 있었다.
“루미, 바르크. 상자에서…… 지난번에 짜둔 달빛 은총초 즙이랑, 카카오 열매 달인 물을 가져다줄래?”
루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온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온실 안쪽으로 잽싸게 달려갔다. 바르크는 여전히 사내를 경계하며 이온의 발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온은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눈밭의 냉기가 바지 무릎을 적셨지만 개의치 않았다. 사내의 투구를 조심스럽게 벗겨 내자, 땀과 피로 범벅이 된 젊은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투박한 외모였지만 이마에 깊게인 주름에는 고단함이 서려 있었다.
루미가 숨을 헐떡이며 정화 즙이 담긴 유리병을 건넸다. 이온은 떨리는 손으로 사내의 턱을 벌리고 푸르스름한 은빛이 도는 정화 즙을 조금씩 흘려 넣었다.
구슬 같은 진액이 사내의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그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커흑! 쿨럭, 우욱!”
사내가 격하게 기침을 토해 내며 몸을 뒤틀었다. 그의 입에서 파란색 마력 결정 가루가 섞인 검은 피가 한 움큼 쏟아져 나왔다. 얼어붙었던 사지의 혈액이 정화 농작물의 강한 생명력에 반응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사내의 감겨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열렸다. 초점 없는 갈색 눈동자가 하늘을 헤매다, 제 위로 드리운 이온의 하얗고 앳된 얼굴을 포착했다.
“여, 여기는…… 천국인가……?”
사내의 목소리는 갈라진 논바닥처럼 거칠었다. 이온은 움찔하며 몸을 뒤로 뺐다. 사내는 그 사소한 움직임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황급히 내저었다.
“아, 악! 미안하네! 내가 험악하게 생겨서 놀라게 했군. 나, 나는 해칠 의도가 전혀 없네! 진짜라네!”
그는 보기보다 무척이나 소란스럽고 부산스러운 어투로 말을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이온이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쇳소리 나는 갑옷을 버둥거리며 억지로 세 걸음 뒤로 물러나 주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주는 그 배려에 이온의 팽팽했던 긴장감이 미세하게 누그러졌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왜 기사단의 옷을 입고…… 여기에…….”
이온이 모기만 한 소리로 묻자, 사내는 제 가슴의 문양을 힐끗 보더니 쓰라린 표정으로 침을 뱉었다.
“그 빌어먹을 기사단 이름은 꺼내지도 말게. 내 이름은 시릴이네. 제국 기사단에서는 ‘낙제생 천재 마도 공학자’라고 불렸지. 뭐, 말이 좋아 공학자지, 실제로는 놈들이 광산에서 파내 온 마력 결정을 무기화하는 노역에 시달리던 노예나 다름없었어.”
시릴은 흙먼지와 기름때가 찌든 제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말도 마게. 그 엘릭 단장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잔혹한지 아는가? 죄 없는 어린 수인 아이들을 광산 구덩이에 밀어 넣고 손톱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땅을 파게 하더군. 제국의 자연을 무자비하게 갉아먹는 것도 모자라, 살아 있는 생명까지 도구로 쓰는 꼴을 더는 볼 수가 없었네. 그래서 내가 가꾸던 간이 동력 장치를 터뜨리고 한밤중에 도망쳤지.”
그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그런데 도망치다 그만 길을 잃고 혹한에 마비되어 죽어가던 차였네. 기사단 놈들이 쫓아오는 소리는 들리는데, 몸은 굳어가고…… 그때 이 온실에서 흘러나오는 온기를 보고 무작정 기어왔지. 그런데 입구에 있던 그 무시무시한 가시덤불은 대체 뭔가? 밟자마자 내 몸이 하늘로 붕 떠올랐다가 이 안쪽으로 툭 떨어지더군. 덕분에 놈들의 추격조를 따돌릴 수 있었지만 말이야.”
시릴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의 눈빛에는 거짓이나 탐욕이 없었다. 오히려 제국이 자행한 착취에 대한 깊은 혐오와 미안함만이 서려 있었다.
이온은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른에 대한 기포증으로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시릴의 조심스러운 태도와 참회 섞인 목소리는 이온의 닫힌 마음을 조금씩 두드렸가기 시작했다.
그때, 시릴의 시선이 온실 한쪽에 놓인 작은 물건에 머물렀다.
“어? 저건…….”
시릴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가 가리킨 것은 루미가 소중하게 품고 다니던, 톱니바퀴 몇 개가 부러진 채 멈춰 있는 깨진 장난감 태엽 장치였다. 3화에서 루미가 이온에게 보여 주었던, 수용소에서부터 가지고 나온 유일한 보물이었다.
“저거, 고대 마법 제국의 전도용 놋쇠 태엽이잖아? 비록 톱니가 몇 개 나가고 축이 뒤틀렸지만, 마력 전도율만큼은 요즘 제국 놈들이 쓰는 싸구려 철 부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물건인데…….”
시릴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꼼지락거렸다. 기술자 특유의 피가 끓어오르는 모양이었다.
“내가 저거 고쳐 줄 수 있네! 아니, 그냥 고치는 수준이 아니라, 이 온실의 마력 흐름이랑 동조시켜서 자동으로 씨앗을 뿌리거나 물을 공급하는 ‘자동 씨앗 살포 동력기’로 개조할 수도 있어! 내 가방 안에 아직 쓸 만한 유물 공학 도구들이 남아 있거든.”
그의 목소리에는 순수한 열정이 가득했다. 아이들을 해치려는 기사단의 잔인함과는 거리가 먼, 오직 무언가를 만들고 고치는 것을 사랑하는 이의 눈빛이었다.
이온은 가만히 손을 뻗어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마력 가위와 영창 도구를 쥐었다. 그리고 주저하는 걸음으로 시릴에게 다가갔다.
바르크가 걱정스레 바짓가랑이를 물었지만, 이온은 살며시 바르크의 머리를 쓰다듬어 진정시켰다.
이온은 시릴의 앞에 멈춰 섰다. 여전히 무릎이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그는 용기를 내어 시릴에게 영창 도구를 내밀었다.
“이걸로…… 저희 집을, 아이들을 지킬 수 있게 도와주실 수 있나요?”
시릴은 멍하니 이온이 건넨 도구를 바라보았다. 마력이 은은하게 깃든 고결한 정화의 도구였다. 사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제국에서 오직 파괴와 약탈의 도구만을 만들라며 핍박받던 그에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도구가 쥐어진 순간이었다.
“나 같은 놈을 믿어 주는 건가……?”
시릴이 떨리는 손으로 도구를 받쳐 들었다.
“약속하겠네. 내 목숨을 걸고, 이 아름다운 과수원과 이 여린 아이들을 지키는 방패가 되겠어. 내가 가진 모든 공학 기술을 이 땅을 위해 쓰겠네.”
[대인 공포의 장벽을 허물고, 제국 기사단의 일급 유물 공학 기술자 '시릴'을 동맹으로 포섭하였습니다!] [농장의 기술 등급이 상승하며, 비살상 방어 및 자동화 설비 개조가 가능해집니다.]
귓가에 맑은 바람 소리와 함께 영식 도감의 공명이 울려 퍼졌다. 가슴속을 짓누르던 무거운 트라우마의 사슬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해방감이 이온을 감쌌다. 어른을 향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얻어낸 값진 승리이자 대수확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시릴의 표정이 이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나저나, 마냥 안심하고 있을 때가 아니네. 내가 도망쳐 나오기 직전에 기사단 본부에서 본 정보가 있어.”
시릴이 목소리를 극도로 낮추며 이온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단장 엘릭 크로이츠, 그자가 완전히 미쳐 가고 있네.”
“네? 엘릭 단장이요?”
“그자는 마력 마비 지대의 독성을 이겨내겠답시고 본국에서 공수해 온 ‘정화 결정석’을 매일같이 복용하고 있네. 하지만 그건 임시방편일 뿐이지. 결정석에 축적된 부작용 독소가 온몸에 쌓여서, 지금 그 자의 사지는 이미 시퍼렇게 유리처럼 굳어 가고 있어. 마비 증세가 심해질 때마다 극심한 통증과 함께 광기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상태란 말이지.”
시릴이 진저리를 치며 몸을 떨었다.
“그 통증을 잊고 완전히 정화되려면, 이 온실에서 자라나는 기적의 열매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그자가 알아챘네. 지금 엘릭은 자신의 사지가 완전히 마비되어 부서지기 전에 이 과수원을 통째로 강탈하고, 여기 있는 수인 아이들을 전부 노예로 팔아넘겨 제국 중앙으로 영전하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걸세.”
이온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탐욕에 눈이 멀고 광기에 젖은 인간만큼 무서운 것은 없었다.
“그럼…… 어떡하죠?”
루미가 불안한 듯 이온의 손을 꼭 잡았다.
시릴은 품을 뒤적거리더니, 가죽 겉표지가 다 닳아 빠진 소형 마도 지도 장치를 꺼냈다. 기사단에서 탈출할 때 훔쳐 온 수색 지도였다. 그가 장치 옆면의 태엽을 감자, 지도의 양피지 위로 푸르스름한 마력의 빛이 차오르며 온실 주변의 지형이 입체적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지도 위, 온실을 둘러싼 하얀 눈밭 경계선 바로 바깥쪽에 붉은 점 수십 개가 촘촘하게 나타났다.
붉은 점들은 정지해 있지 않았다. 서서히, 하지만 확실한 포위망을 그리며 온실을 향해 좁혀오고 있었다.
“어, 이럴 수가…….”
시릴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그의 목소리가 심하게 흔들렸다.
“벌써 온 건가? 내 탈영 흔적을 쫓아온 정찰 기사대 놈들이야! 정예병들이…… 이미 저 앞, 고무 탄성 가시덤불 경계선 바로 코앞까지 밀려왔네!”
바스락, 서걱!
온실 밖, 어두운 눈 덮인 숲속에서 쇠가 부딪히는 서슬 퍼런 마찰음이 칼바람을 타고 선명하게 흘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