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을 찢어 발기며 솟구친 붉은 불꽃은 지독하게도 붉었다.
단순한 불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끈적끈적한 마력의 실줄기들이 엉켜 만들어진, 사방 수십 킬로미터 밖의 모든 눈동자를 끌어당기는 거대한 낙인이었다. 얼어붙은 구름마저 핏빛으로 물들이며 번져가는 그 광경을 바라보는 순간, 이온은 목구멍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갈비뼈 안쪽을 부술 것처럼 사정없이 두드려 댔다. 손가락 끝이 차갑게 식어 가며 가늘게 떨렸다.
‘기사단이…… 온다.’
머릿속에서 쇠붙이가 부딪치는 서늘한 소음과 거친 어른들의 고함이 환청처럼 휘몰아쳤다. 자신을 가두고, 조종하고, 마침내 쓸모가 없어지자 차가운 눈밭에 버려두었던 제국의 차가운 얼굴들. 대인기피증이라는 깊은 늪이 발목을 붙잡고 바닥이 없는 심연으로 끌어내리는 것만 같았다. 귀를 막고 이대로 온실 한구석에 웅크려 숨고 싶었다.
“형…… 아…….”
바닥에 주저앉은 바르크가 꼬리를 가랑이 사이로 바짝 밀어 넣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커다란 눈망울에는 자신이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는 두려움과 절망이 가득 고여 있었다. 늑대 귀가 머리칼 속으로 완전히 파묻힐 만큼 바짝 누웠다.
“내가, 내가 만져서…… 나 때문에 나쁜 사람들이 오나 봐…….”
루미가 비틀거리면서도 동생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작은 손으로 바르크의 어깨를 꼭 안아 주었지만, 정작 루미의 얇은 입술 역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이들의 몸에서 풍기는 미약한 단호박 수프의 단내가 차가운 붉은 마력의 냄새에 짓눌려 지워지고 있었다.
그 향기가 사라지려는 순간, 이온의 심장에 박혀 있던 공포가 다른 빛깔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아이들은 갈 곳이 없었다. 사지가 파랗게 굳어가는 천형을 얻고 짐승처럼 버려졌던 아이들이었다. 나침반을 만진 것은 그저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의 사소한 몸짓이었을 뿐이다. 이곳마저 빼앗긴다면, 이 여린 생명들은 다시 그 지옥 같은 동토의 눈보라 속으로 내던져질 터였다.
‘더는 빼앗기지 않아.’
누구에게도 조종당하지 않고, 아무도 자신을 내버리지 않는 완벽하게 안전하고 따뜻한 영원의 안식처. 제 손으로 가꾸기 시작한 이 작은 과수원 가게는 이온 자신뿐만 아니라 이 가여운 수인 아이들의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이온은 떨리는 손을 뻗어 바르크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차가운 털 가죽 너머로 아이의 빠른 심장박동이 전해졌다.
“괜찮아, 바르크. 네 잘못이 아니야.”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지만, 이온은 억지로 힘을 주어 속삭였다.
“형이 지켜줄게. 이곳은 아무도 못 들어와.”
그것은 스스로에게 바치는 단단한 맹세였다. 두려움에 도망치던 소년의 마음속에, 침략자들의 발길을 단 한 걸음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수호의 장벽이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이온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세계수의 맥박’ 도감을 펼쳤다.
사르륵, 고대의 마력이 깃든 종이가 넘어가며 은은한 푸른빛을 뿜어냈다. 하늘 높이 치솟은 붉은 신호가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이며 더욱 기세를 가두기 전에 흐름을 끊어야 했다. 기사단의 추적망이 이 온실의 정확한 좌표를 고정하기 전에 주파수를 교란할 방법이 필요했다.
도감의 갈색 페이지 위에 반짝이는 글씨가 떠올랐다.
[서리 정화 무 (Frost-Purge Radish)] - 분류: 마력 흡수형 구근 식물 - 특징: 대지 아래 숨은 탁한 마력과 사악한 파동을 빨아들여 단단한 뿌리 속에 가두고 정화한다. 차가운 서리 마력을 양분으로 삼아 극강의 정화 가루를 만들어낸다. - 주의: 급속 성장을 위해서는 조율자의 생명 에너지가 소모된다.
“마력을 빨아들이는 무…….”
이온은 소매 안쪽에 고이 보관해 두었던 은빛 씨앗을 꺼냈다. 얼음 결정처럼 단단하고 투명한 씨앗이었다. 그는 온실 문을 열고 붉은 불빛이 뿜어져 나오는 마법 나침반 바로 옆, 부드러운 흙살이 다져진 곳으로 달려갔다.
무릎을 꿇고 흙을 파헤쳤다. 얼음장 같은 흙의 감촉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씨앗을 깊숙이 묻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흙 위에 얹었다.
‘세계수의 맥박을…….’
숨을 가다듬고 온 신경을 집중하자, 심장 가장 깊은 곳에서 따스하고 푸른 맥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생명의 기운이 손바닥을 통해 대지로 뿜어졌다.
쿠구구구-.
갑자기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고, 눈앞이 어두워지며 길고 깊은 잠이 자신을 불러내려는 감각이 덮쳐왔다. 생명력을 일시적으로 소모할 때 찾아오는 기면증의 전조였다. 이온은 혀끝을 세게 깨물며 정신을 붙잡았다. 지금 잠들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자라나라……!”
이온의 외침과 함께, 흙을 뚫고 새하얀 줄기들이 기적처럼 솟구쳤다.
보통의 무와는 달랐다. 줄기는 투명한 얼음 유리처럼 빛났고, 그 끝에 달린 이파리들은 밤하늘의 별빛을 머금은 듯 은은한 청색 광채를 뿜어냈다. 단 몇 초 만에 흙 위로 커다랗고 둥근 무의 윗부분이 우람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혹한의 마비독과 나침반이 뿜어내는 붉은 마력을 흡수하기 시작한 무의 표면에 붉은색 줄무늬가 이리저리 얽히기 시작했다.
“루미! 바르크! 저 무를 뽑아서 절구에 찧어야 해! 서둘러!”
이온의 다급한 목소리에 아이들이 정신을 차렸다. 루미는 재빠르게 부엌으로 달려가 커다란 돌절구와 달구지용 자루를 챙겨왔고, 몸집은 작지만 힘이 센 바르크는 흙 위로 튀어나온 서리 정화 무의 줄기를 붙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흐읍…… 영차!”
스윽, 소리와 함께 어른 머리통만 한 하얗고 단단한 무가 뽑혀 나왔다. 무의 표면은 마치 붉은 잉크를 빨아들인 스펀지처럼 붉은 반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단한 껍질 안쪽에서 기사단의 마법 파동이 요동치는 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루미와 바르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온의 지시에 따라 무를 조각내고 돌절구에 넣어 찧기 시작했다. 쿵, 쿵, 돌공이가 부딪칠 때마다 은빛 가루와 함께 향긋하고 매콤한 무즙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즙이 닿는 곳마다 공기 중에 떠돌던 붉은 아지랑이가 연기처럼 녹아내렸다.
하지만 하늘 높이 쏘아 올려진 거대한 붉은 광선은 여전히 굳건했다. 공중 수백 미터 높이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신호막을 차단하려면, 이 정화의 힘을 저 높은 곳까지 쏘아 올려 넓게 퍼뜨려야만 했다.
이온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게 있었지.’
이온은 온실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1화에서 처음으로 씨앗을 심고, 지난번 들개 무리가 침입했을 때 엄청난 탄성으로 놈들을 먼 하늘로 튕겨 보냈던 ‘고무 탄성 가시덤불’이 웅장하게 똬리를 틀고 있었다. 질기고 유연한 초록색 가죽 같은 줄기들은 웬만한 강철보다도 튼튼한 탄성을 품고 있었다.
이온은 덤불 앞으로 달려가 가장 굵고 탄력 있는 줄기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가시덤불은 주인의 손길을 알아보았는지 날카로운 가시를 부드럽게 눕히며 이온의 손길에 순응했다.
“이 줄기를 새총처럼 쓰는 거야.”
이온은 찧어낸 서리 정화 무의 즙과 가루를 끈적끈적한 찰흙처럼 뭉쳤다. 루미가 곁에서 도왔다. 아이의 야무진 손놀림 덕에 순식간에 커다란 정화 무 가루 경단 여러 개가 완성되었다.
이온은 고무 탄성 가시덤불의 두 줄기를 양쪽 기둥에 단단히 묶고, 그 중앙에 정화 무 경단을 얹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줄기를 뒤로 잡아당겼다.
찌이이익-.
고무 가죽이 팽팽하게 늘어나며 엄청난 위치 에너지가 축적되기 시작했다. 가시덤불 줄기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지만, 세계수의 맥박으로 가꾸어진 식물은 결코 끊어지지 않았다.
“바르크, 신호기가 있는 쪽으로 각도를 맞춰줘!”
“웅! 맡겨줘, 형!”
바르크가 꼬리를 꼿꼿이 세우고 나침반의 붉은 광선 중심부를 향해 가시덤불의 방향을 조율했다.
“지금이야!”
이온이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줄기를 놓았다.
콰아아앙-!
공기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거대한 정화 무 경단이 밤하늘을 향해 포탄처럼 쏘아 올려졌다.
빛의 속도로 상승한 경단은 정확히 붉은 광선이 하늘 높이 뿜어져 나가는 중심부에서 폭발했다.
파아아아안-!
하늘 가득 새하얀 은가루가 꽃가루처럼 사방으로 흩날렸다. 끈적한 정화 무즙이 붉은 마력의 실줄기들에 달라붙더니, 무서운 속도로 그 힘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붉은 빛이 하얀 서리 안개 속으로 잠식되어 가며 비명을 지르듯 지직거렸다.
그 순간, 온실 바닥에 놓여 있던 추적 나침반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거꾸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역류 회로가 정화 마력의 침투를 견디지 못하고 과부하를 일으킨 것이다.
***
같은 시각, 온실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은빛 강철 기사단의 전방 수색 기지.
어두컴컴한 막사 안에서 마도병들이 대형 마법 스크린(레이더)을 감시하고 있었다. 스크린 위에는 동토의 지도와 함께, 방금 전 감지된 강력한 조난 신호의 붉은 점이 선명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기사단장님께 보고드려라! 제3구역 외곽에서 유실되었던 최상급 추적 신호가 포착되었다! 좌표 고정까지 앞으로 10초…….”
마도병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치던 그 순간이었다.
화면 중앙에 고정되려던 붉은 점이 갑자기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어? 이게 무슨……?”
지이이이잉-!
갑자기 마법 스크린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주파 소음이 흘러나왔다. 스크린 표면에 하얀 서리가 파랗게 끼기 시작하더니, 이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은빛 광채가 막사 안을 가득 메웠다.
“눈, 눈이……! 으아악!”
“마력 역류다! 차단해! 당장 연결을 끊어!”
펑! 퍼퍼펑-!
수색 기지 곳곳에 설치되어 있던 마법 수신기들이 연쇄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통신석들이 검게 그을리며 깨져 나갔고, 기사단의 자랑이던 광역 추적 레이더망이 순식간에 암전 상태로 내려앉았다.
새하얀 정화의 노이즈 폭탄이 기사단의 마법 네트워크를 타고 역류하여, 그들의 추적 시스템 자체를 완전히 마비시켜 버린 것이다. 기사단원들은 서로 부딪치며 비명을 질렀고, 막사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들이 기계를 복구하고 다시 신호를 잡으려면 적어도 수일은 걸릴 터였다. 완벽하고 통쾌한 역습이었다.
***
온실의 밤하늘을 가득 메웠던 붉은 불빛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다시 고요하고 어두운 동토의 밤이 찾아왔다. 은은한 달빛만이 하얀 눈밭을 비추고 있었다.
“하아, 하아…….”
이온은 무릎을 꿇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생명력을 급격히 소모한 탓에 손끝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피로가 밀려왔다. 당장이라도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바닥에 떨어져 있던 기사단의 나침반이 마지막으로 조그만 금속음을 냈다.
타타탁, 틱-.
붉은 빛이 완전히 씻겨 나가고 맑은 은빛으로 정화된 나침반의 바늘이 미친 듯이 돌다가, 한 곳을 향해 뚝 멈춰 섰다.
바늘이 가리키는 곳은 사방의 방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온이 딛고 서 있는 온실 바닥, 정확히는 대지 아래 수십 미터 밑바닥을 완만하게 비스듬히 가리키고 있었다.
바늘의 끝에서 맑은 은빛 마력이 뿜어져 나와 흙바닥에 스며들자, 이온의 머릿속에 존재하던 ‘세계수의 맥박’ 도감이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며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직접 새겨 넣었다.
[숨겨진 대지의 맥박 포착] - 위치: 온실 하부 암반층 너머 - 정보: 고대 마법 문명이 남겨둔 대규모 ‘온천 수맥’의 근원지. 따뜻한 온기와 정화된 마력이 융합된 물길이 흐르고 있음. - 효과: 이 수맥을 지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온실의 범위를 수십 배로 확장하고 혹한의 동토를 영구적인 온기의 땅으로 개간할 수 있음.
이온의 조그만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온천 수맥이라니. 이 가혹한 추위와 얼음만이 가득한 노스트바르트에서 만물을 녹일 따뜻한 물길이 바로 발밑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기적과도 같았다. 만약 그것을 끌어 올릴 수만 있다면, 이 작은 온실을 넘어 정말로 거대하고 따뜻한 영원의 과수원을 만들 수 있을 터였다.
희망의 싹이 가슴속에서 풋풋하게 피어났다.
“형아! 하늘이 다시 예뻐졌어!”
바르크가 이온의 허리를 꼭 안으며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루미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온의 소매를 붙잡고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아이들의 맑은 미소를 보며 이온 역시 엷은 미소를 지었다.
‘지켜냈어…….’
긴장이 풀리자 참을 수 없는 졸음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눈꺼풀이 무거워져 스르르 감기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스락-.
부드러운 눈을 밟는 소리가 아니었다.
온실 울타리 외곽, 방금 전 정화 무 경탄을 쏘아 올렸던 그 울창한 ‘고무 탄성 가시덤불’ 지대에서 거칠고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려왔다. 가시덤불의 강인한 줄기들이 팽팽하게 늘어났다가 튕겨 나가는 소리였다.
“그르르르……!”
바르크가 순식간에 꼬리를 꼿꼿이 세우고 이빨을 드러내며 앞장섰다. 루미 역시 경계 태세를 갖추며 이온의 앞을 가로막았다.
서걱, 서걱.
가시덤불의 날카로운 바늘에 긁히는 소리와 함께, 덤불 틈새로 무언가 거대하고 무거운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것은 은빛으로 번들거리는 철갑옷이었다. 하지만 그 갑옷은 곳곳이 찢겨 나갔고, 붉은 피가 얼어붙어 검붉은 얼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자비하기로 소문난 제국의 ‘은빛 강철 기사단’의 문양이 새겨진 견장이 처참하게 부서진 채 매달려 있었다.
인간이었다.
그는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며, 가시덤불을 억지로 헤치고 온실의 온기가 흘러나오는 안쪽을 향해 기어 나오고 있었다. 투구 사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초점 없는 눈동자가 이온과 수인 아이들을 향했다.
“살려…… 줘…….”
쉰 목소리로 짧은 신음을 뱉은 기사단 탈영병이 이온의 발치에 쿵 소리를 내며 그대로 쓰러졌다. 그의 손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하얀 눈밭을 붉게 적셨다.
이온의 눈동자가 두려움과 경악으로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