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깊은 기면증에 빠져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이온의 귓가로 정원 울타리를 긁는 포악한 들개 무리의 발톱 소리가 육박해온다.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의식은 끈 떨어진 연처럼 아득한 심해 속을 표류했다. 몸은 물에 젖은 솜이불보다 무거웠고, 손가락 끝 하나조차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사흘 전, 은빛 카카오나무를 급속 개량하기 위해 '세계수의 맥박'을 무리하게 쥐어짜 낸 대가였다. 영식 도감이 부여한 기적은 달콤했으나, 그 뒤에 찾아온 기면증의 늪은 지독하리치만큼 깊고 어두웠다.

서걱, 서걱. 끄으으으-.

차가운 유리에 대고 쇠붙이를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잠결 속에서도 이온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얼어붙은 대지 위를 짓밟는 거친 발소리, 굶주림으로 미쳐버린 야생 들개들의 르릉거리는 목소리가 온실의 얇은 유리창을 흔들었다.

"형…… 일어나 봐, 형……."

볼가에 닿는 작고 미지근한 손길목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루미의 목소리였다. 잔뜩 겁에 질려 물기가 축축하게 배어 있는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등불처럼 이온의 의식을 잡아끌었다.

어서 일어나야 해. 아이들이 위험해.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려 퍼진 순간, 단단히 잠겨 있던 눈꺼풀이 기적처럼 들어 올려졌다.

"읍……!"

이온은 폐부 깊숙이 고여 있던 탁한 숨을 토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온몸의 뼈마디가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쉴 틈이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것은 온실 유리창 너머로 번들거리는 수십 개의 붉은 눈동자였다. 회색 털 가죽에 얼음부스러기를 잔뜩 묻힌 들개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온실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노스트바르트의 혹한 속에서 굶주릴 대로 굶주린 맹수들이었다.

"이온 형!"

바르크가 이온의 허춤을 꼭 쥐며 소리쳤다. 사흘 동안 제대로 자지도 못했는지, 녀석의 동그란 눈가에는 검은 그늘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꼬리는 다리 사이로 바짝 말려 들어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온은 떨리는 손으로 아이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른들의 거친 기척과 야생의 폭력적인 냄새가 코끝을 찌르자, 가슴 한구석에서 오래된 트라우마가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고,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당장이라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고만 싶었다.

하지만 제 손을 생명줄처럼 꽉 쥐고 있는 작은 손가락살들의 온기가 그를 붙잡았다.

"괜찮아……. 형이, 형이 지킬게."

이온은 마른침을 삼키며 창밖을 응시했다.

들개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대한 흑색 개가 혓바닥을 다지며 온실 정원의 경계선 안으로 앞발을 들이밀었다. 그 순간이었다.

바스락.

그들이 딛고 선 하얀 눈밭 아래에서 청록빛 줄기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1화에서 이온이 온실 주위에 촘촘히 심어두었던 '고무 탄성 가시덤불'의 씨앗들이었다. 사흘 동안 이온이 잠든 사이, 녀석들은 온실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온기와 마력을 듬뿍 빨아들이며 대지 밑바닥에 거대한 탄성의 그물을 완성해두고 있었다.

우두머리 개가 먹잇감을 향해 맹렬하게 도약했다.

스르릉!

순간, 눈 더미 속에서 매끄럽고 통통한 청록빛 덩굴줄기가 튀어 올랐다. 줄기는 일반적인 가시덤불처럼 단단하거나 날카롭지 않았다. 오히려 두꺼운 고무 가죽처럼 유연하고 질긴 질감이었다.

우두머리 개의 앞발이 덩굴줄기에 닿는 찰나, 덩굴이 고무줄처럼 뒤로 사정없이 늘어났다.

용수철처럼 한계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청록빛 줄기가 이내 강력한 탄성 에너지를 내뿜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팅-!

청아하면서도 묵직한 파열음이 정원을 울렸다. 하늘로 솟구친 것은 들개였다. 우두머리 개는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은 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허공을 가르며 저 멀리 눈더미 너머로 날아갔다.

"깨갱?!"

뒤를 따르던 들개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우두머리는 저 멀리 백여 미터 밖 안전지대의 푹신한 눈더미 속에 머리부터 처박혔다. 그 모습은 흡사 거대한 서커스의 한 장면 같았다.

"우와아……."

바르크가 입을 쩍 벌린 채 창문에 이마를 바짝 붙였다.

들개들은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울타리 안으로 다시 진입하기 위해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고무 탄성 가시덤불은 침입자들을 환영할 준비가 완전히 끝나 있었다.

팅! 타앙-! 팅-!

경쾌한 탄성음이 연달아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접근하는 족족, 들개들은 대포알처럼 하늘로 쏘아 올려졌다. 어떤 녀석은 공중에서 세 바퀴를 돌며 날아갔고, 어떤 녀석은 꼬리를 바짝 내린 채 포물선을 그리며 눈밭으로 곤두박질쳤다. 날카로운 가시로 살을 찢는 비인도적인 덫이 아니었다. 오직 지형의 고저 차와 물리적인 튕김 작용만을 극대화한 평화로운 격퇴였다.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가시덤불의 유연한 움직임은 마치 대지가 살아서 춤을 추는 듯한 장관을 연출했다.

마지막 남은 한 마리가 꼬리를 내리고 뒤돌아 달아나려 했으나, 발밑에서 불쑥 솟아오른 덩굴이 엉덩이를 툭 쳤다.

팅-!

"깽-!"

마지막 들개까지 밤하늘의 유성처럼 멀리 날아가 눈밭에 처박히는 것을 끝으로, 온실 주변은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살상도, 피비린내도 없는 완벽한 격퇴였다.

이온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형! 대단해! 저 나쁜 개들이 다 날아갔어!"

루미가 이온의 목을 껴안으며 방방 뛰었다. 바르크 역시 굳어 있던 꼬리를 채찍처럼 세차게 흔들며 이온의 뺨을 핥아댔다.

"바, 바르크, 간지러워……."

이온은 아이들을 품에 꼭 안아주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단단했던 얼음벽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성인 인간이 두렵고 무서웠지만, 이 작은 생명체들만큼은 결코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꼬르륵-.

정적이 찾아온 온실 안에 우렁찬 소리가 울렸다. 루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이온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사흘 동안 꼬박 굶으며 불침번을 섰으니 배가 고픈 것이 당연했다.

"기다려봐.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

이온은 아직 몸이 뻐근했지만,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온실 한구석에는 사흘 전 수확해 둔 따뜻한 은빛 카카오 열매와 정화된 대지에서 자라난 밀이 가득했다. 이온은 밀가루를 곱게 체쳐 내고, 잘 발효된 천연 효모를 섞어 반죽을 시작했다.

치대질 때마다 반죽에서는 은은한 풀꽃 향기가 풍겼다. 반죽을 동글동글하게 빚어 화덕에 넣고, 은빛 카카오를 맷돌에 갈아 달콤하고 진한 초콜릿 잼을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실 안은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로 가득 찼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빵을 꺼내 반으로 쪼개자, 하얀 김과 함께 겉은 바삭하고 속은 구름처럼 부드러운 속살이 드러났다. 그 위에 검붉고 진득한 은빛 초콜릿 잼을 듬뿍 발랐다.

"자, 어서 먹어봐."

이온이 건넨 빵을 루미와 바르크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아이들의 눈이 보석처럼 빛났다. 바삭한 식감 뒤로 밀가루의 구수한 풍미와 카카오의 깊은 단맛이 입안 가득 번졌다. 은빛 카카오의 정화 마력이 온몸의 미세한 혈관을 따라 흐르며, 사흘간 축적되었던 피로와 추위를 깨끗이 씻어내렸다.

"형이 만든 빵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루미가 우물거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바르크는 아예 볼에 초콜릿을 잔뜩 묻힌 채 허겁지겁 빵을 삼켰다. 이온은 손가락으로 바르크의 볼에 묻은 잼을 닦아주며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천천히 먹어. 많으니까."

"형…… 우리 버리지 않을 거지?"

루미가 빵을 꼭 쥔 채, 조심스럽게 이온의 눈치를 살폈다. 과거 수용소에서 쓸모없다는 이유로 버려졌던 기억이 아이의 마음속에 여전히 흉터로 남아 있는 듯했다.

이온은 루미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아이의 작은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절대 안 버려. 우리 여기서 평생 같이 살 거야. 여기가 우리 집이야."

그 말에 바르크가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이온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루미 역시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이온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세 사람의 온기가 온실의 추위를 완벽하게 밀어내는 순간이었다. 비로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이 영원한 가족의 끈으로 묶이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친 이온은 밖의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온실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갔다.

바스락거리는 눈을 밟으며 고무 탄성 가시덤불이 뻗어 있는 울타리 근처로 향했다. 들개들이 튕겨 나간 자리에 무언가 반짝이는 시커먼 물체가 떨어져 있었다.

"음? 이게 뭐지?"

이온이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워 올렸다.

차가운 금속 재질의 물건이었다. 겉면에는 기하학적인 마법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고, 중앙에는 은빛 강철 기사단의 상징인 '방패와 검' 문양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은빛 마법 견장의 조각이었다.

순간, 이온의 심장이 얼어붙는 것처럼 싸늘해졌다.

"이건…… 제국 기사단의 장비잖아?"

들개들이 이 근처를 배회하다가 기사단의 시체나 그들의 주둔지에서 이것을 물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무자비하기로 소문난 '은빛 강철 기사단'의 지배 영역이 이 온실 근처까지 뻗어 와 있다는 뜻이었다.

수인을 짐승처럼 취급하고, 정화력을 가진 땅을 무자비하게 약탈하는 그들이 이 온실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온의 손끝이 다시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대인기피증의 공포가 가슴을 짓눌렀다.

"형, 그게 뭐야? 반짝거려!"

바르크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다가와 이온의 손에 들린 또 다른 물건을 낚아챘다. 견장 조각 옆에 떨어져 있던, 부서진 나침반 형태의 마법 도구였다.

"아, 바르크! 만지면 안 돼!"

이온이 황급히 손을 뻗었지만, 한 발 늦었다.

바르크가 신기한 듯 나침반 뒷면의 튀어나온 붉은 보석 버튼을 꾹 눌러버린 것이다.

딸깍-.

불길한 금속음과 함께, 부서져 있던 나침반 내부의 마법 회로가 거꾸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붉은 마력의 실줄기들이 엉키며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구오오오-!

"엇……?"

바르크가 놀라 나침반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마법 나침반은 찢어지는 듯한 경고음을 내뿜더니, 이내 하늘을 향해 거대하고 붉은 마법 광선을 쏘아 올렸다.

파아아앗-!

붉은 마법 신호 탄환은 구름 낀 동토의 밤하늘을 붉은색 낙인처럼 선명하게 물들이며 밤하늘 높이 솟구쳤다. 사방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도 한눈에 보일 만큼 강렬하고 파괴적인 붉은 빛이었다.

그것은 은빛 강철 기사단이 조난 시 사용하는 최상급 강제 추적 신호였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 붉은 빛을 반사하며 번들거리는 철갑옷의 군대가 이쪽을 향해 서서히 고개를 돌리는 환영이 보이는 듯했다.

이온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아……."

고요했던 과수원의 밤하늘 위로, 거대한 파멸의 신호탄이 붉은 꽃처럼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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